모리아/시 1441

집 상이 차려졌다, 아들아 크림의 고요한 흰색과 함께, 그리고 네 벽에는 질그릇들이 푸른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다. 여기 소금이 있고, 기름은 여기 가운데는 거의 말을 하고 있는 빵, 빵의 금빛보다 더 아름다운 금빛은 대나무나 과일엔 없으니, 그 밀 냄새와 오븐은 끝없이 기쁨을 준다. 굳은 손가락과 부드러운 손바닥으로 우리는 더불어 빵을 쪼갠다, 귀여운 애야. 검은 땅이 흰 꽃을 피워내는 걸 네가 놀라운 눈으로 보고 있는 동안. 빵을 가지러 가는 네 손을 낮추어라. 네 엄마가 자기의 손을 낮추듯이, 아들아, 밀은 공기로 된 것이고 햇빛과 괭이로 된 것이란다. 그러나 이 빵, ‘신의 얼굴’이라고 불리는 이 빵은 모든 식탁에 놓여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다른 애들이 그걸 갖지 못했다면 아들아, 그걸 건드리지..

모리아/시 2021.03.24

어깨동무

[어깨동무] - 시인 천양희 - 되면 한다는 사람보다 하면 된다는 사람이여 .....때문에라는 사람보다 .....에도 불구하고 라는 사람이여 상실을 실상으로 보는 사람이여 금지를 지금으로 보는 사람이여 나는 그대들과 어깨동무하고 싶다 위기가 위험이라는 사람보다 위기가 기회라는 사람이여 아니다 아니다 하는 사람보다 그래그래 하는 사람이여 나는 그대들과 어깨동무하고 싶다

모리아/시 2021.03.22

마른 투구꽃

마른 투구꽃 ㅡ 시인 윤경덕 책갈피 속에 마른 투구꽃 하나 세월을 감추고 있다 희미한 추억으로 얼룩진 마음 갈색 투구를 쓰고 바라본다 검푸르게 타올랐던 욕정들 깊숙이 간직하고 마디마디 머금은 엷은 잔주름 사이마다 푸른 바람이 분다 때때로 우리가 추억하는 것은 흑백으로 흩어지고 항상 떠오르는 것은 바람결에 살랑거리는 보랏빛 향기 거친 손으로 꺽어놓은 자리마다 평면으로 주름진 헛바람이 휑 지나간다 내 묵은 몸속에는 마른 투구꽃이 피고 부서진다

모리아/시 2021.03.19

내가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

[내가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 - 시인 문정희 - 내가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 그때 나는 별을 바라본다. 별은 그저 멀리서 꿈틀거리는 벌레이거나 아무 의도도 없이 나를 가로막는 돌처럼 나의 운명과는 상관도 없지만 정작 연애보다는 사랑한다라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어쩌면 별도 사막일지 몰라 결국 지상에는 없는 불타는 지점 별!을 나는 좋아한다. 별이라고 말하며 흔들린다. 아무래도 나는 사물보다 말을 더 좋아하는가보다. 혼자 차를 마시면서도 차를 마시고 싶다라는 말을 하고 싶고 여행보다 여행 떠나고 싶다라는 말을 하지만 나는 별을 좋아한다. 나의 조국은 별같은 말들이 모여서 세운 시의 나라 나를 키운 고향은 책인지도 몰라

모리아/시 2021.03.19

두 번은 없다

두 번은 없다 ㅡ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

모리아/시 2021.03.18

99-1 골목

99-1 골목 시인 심인숙 무수히 많은 국숫발이 흔들린다 빗금 친 그 사이로 가늘고 긴 햇살이 굽이굽이 신기루 속 골목을 열고 있다 하얀 그림자가 담과 모퉁이 사이를 돌아나갈 때, 나지막한 공장의 판자지붕, 몇몇 살아남은 무궁화나무와 붙박인 낮달, 멈출 것 같지 않은 기계 소리가 탈탈거리며 지나가고 파르스름한 철 대문은 먼지 속 나팔꽃에 반쯤 기울어져 있다 오랜 시간을 견디는 것은 마음의 풍경뿐이다 바람은 느리고 들여다보면 햇빛 속에 대숲 하나 보인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허리 굽은 노인도 나타난다 할머니, 거기 계세요? 불쑥 도둑괭이라도 튀어나올 만한 호젓한 이곳에는 아직도 이야기가 도사리고 있는지 아이는 남고 부지깽이를 쥐고 있던 증조할머니는 없다 누군가 틀어놓은 노랫가락이 흩날리다 툭툭 끊어지는 골..

모리아/시 2021.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