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1 골목
시인 심인숙
무수히 많은 국숫발이 흔들린다
빗금 친 그 사이로 가늘고 긴 햇살이 굽이굽이 신기루 속 골목을 열고 있다
하얀 그림자가 담과 모퉁이 사이를 돌아나갈 때, 나지막한 공장의 판자지붕, 몇몇 살아남은 무궁화나무와 붙박인 낮달,
멈출 것 같지 않은 기계 소리가 탈탈거리며 지나가고 파르스름한 철 대문은 먼지 속 나팔꽃에 반쯤 기울어져 있다
오랜 시간을 견디는 것은 마음의 풍경뿐이다
바람은 느리고 들여다보면 햇빛 속에 대숲 하나 보인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허리 굽은 노인도 나타난다
할머니, 거기 계세요?
불쑥 도둑괭이라도 튀어나올 만한 호젓한 이곳에는 아직도 이야기가 도사리고 있는지
아이는 남고 부지깽이를 쥐고 있던 증조할머니는 없다
누군가 틀어놓은 노랫가락이 흩날리다 툭툭 끊어지는 골목,
일렁이는 대숲을 헤지는 것이 바람인지 나인지 그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하얀 골목 어귀,
굽이치는 국숫발마다 둥근 햇빛이 미끄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