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시 1441

옛 샘

옛 샘 ㅡ 한스 카로사 등불을 끄고 자거라! 일어난 채 계속 울리는 것은 오직 옛 샘의 물줄기 소리 하지만 내 지붕 아래 손님이 된 사람은 곧 이 소리에 익숙해진다. 당신 꿈속에 흠뻑 빠져 있을 동안 어쩌면 집 주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릴는지 모른다. 거친 발소리, 샘 근처 자갈 소리가 나며 경쾌한 물소리는 뚝 멈출지 모른다. 그러면 당신은 눈을 뜬다. 하지만 놀라지 말라! 별이란 별은 모두 땅 위에서 빛나고 나그네 한 사람이 샘으로 다가가서 손바닥으로 물을 뜨고 있는 것이다. 나그네는 떠나고 곧 물줄기 소리가 다시 들릴 것이다. 아 기뻐하여라, 당신은 혼자가 아니리니 별빛 속에 길을 가는 수많은 나그네가 길 가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신에게로 오고 있는 것이다.

모리아/시 2021.04.08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醮禮廳)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모리아/시 2021.04.07

새와 나무

새와 나무 ㅡ 류 시화 여기 바람 한 점 없는 산속에 서면 나무들은 움직임 없이 고요한데 어떤 나뭇가지 하나만 흔들린다 그것은 새가 그 위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별일 없이 살아가는 뭇사람들 속에서 오직 나만 홀로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새는 그 나뭇가지에 집을 짓고 나무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지만 나만 홀로 끝없이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집을 짓지 않은 까닭이다

모리아/시 2021.04.07

행복한 얼굴

[행복한 얼굴] - 시인 김 현승 내게 행복이 온다면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내게 불행히 와도 나는 그에게 또 감사한다. 한번은 밖에서 오고 한번은 안에서 오는 행복이다. 우리의 행복의 문은 밖에서도 열리지만 안에서도 열리게 되어있다. 내가 행복할 때 나는 오늘의 행복을 따스히 사랑하고 내가 불행할 때 나는 내일의 별들을 사랑한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숨결은 밖에서도 들이쉬고 안에서도 내어쉬게 되어있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바다는 밀물이 되기도하고 썰물이 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출렁거린다!

모리아/시 2021.04.07

가로등의 꿈

가로등의 꿈 ㅡ 볼프강 보르헤르트 나 죽으면 어쨌든 가로등이 되고 싶네 하여 너의 문 앞에 서서 납빛* 저녁을 환히 비추리. 아니면 커다란 증기선이 잠자고 소녀들이 웃음을 짓는 항구. 가르다랗게 나 있는 불결한 운하 옆에서 나는 깨어 고독하게 걸어가는 사람에게 눈짓을 보내리. 좁다란 골목, 어느 선술집 앞에 붉은 양철 가로등으로 나는 걸려 있고 싶네.... 하여 무심코 밤바람에 실려 그들의 노래에 맞추어 흔들고 싶네. 아니면 한 아이가 있어 혼자 있음을 깨닫고, 창틈에서 바람이 으르렁거리며 창 밖에는 꿈들이 귀신처럼 출몰하여 놀라워하거든, 눈을 크게 뜨고 그 아이를 비추어주는 가로등이 되고 싶네. 그래, 나 죽거든 어쨌든 가로등이 되어.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잠든 밤에도 오로지 홀로 깨어 달과 이야기를..

모리아/시 2021.04.06

사랑하는 사람들만 무정한 세월을 이긴다

[사랑하는 사람들만 무정한 세월을 이긴다] - 나 태주 - 사랑하는 사람들만 무정한 세월을 이긴다 때로는 나란히 선 키 큰 나무가 되어 때로는 바위 그늘의 들꽃이 되어 또다시 겨울이 와서 큰 산과 들이 비워진다 해도 여윈 얼굴 마주 보며 빛나게 웃어라 두 그루 키 큰 나무의 하늘 쪽 끝머리마다 벌써 포근한 봄빛이 내려앉고 바위 그늘 속 어깨 기댄 들꽃의 땅 깊은 무릎 아래에 벌써 따뜻한 물은 흘러라 또다시 겨울이 와서 세월이 무정타고 말하여져도 사랑하는 사람들만 벌써 봄 향기 속에 있으니 여윈 얼굴로도 바라보며 빛나게 웃어라

모리아/시 2021.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