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시 1441

반성은 특별하다

[반성은 특별하다] /세월호 참사 7주기에 - 나 해철 - 바다는 여전히 푸르다 아무런 실색도 없이 반성도 없이 세상은 다시 변함이 없고 오늘도 탁한 먼지는 하늘을 덮고 있다 바다가 산맥이 되고 세계가 천국이 되는 것을 바랐던가 인간 집단은 결코 선한 존재가 될 수 없는가 배도 비행기도 방송 중계기도 바로 곁에 있었는데 한 학년 친구들 250명을 산 채로 수장시킨 인간에게 반성은 가능한 것인가 반성에 도달하는 것이 비범한 일인가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여 해탈에 닿는 것처럼 차라리 불가능한 것이라고 반성은 특별한 것이라고 바다도 세상도 천연덕스럽게 주장하는 것인가

모리아/시 2021.04.16

내일

[내일] - 시인 박용주 - 오늘을 빛나게 닦아놓고 정갈한 마음으로 내일을 기다립니다 내일이 신기루이며 실망으로 끝나더라도 오늘 우리는 내일을 준비합니다 내일이 없으면 오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어제의 슬픔을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힘들어도 참아낼 수 있는 것은 희망과 꿈으로 오는 내일을 기다려서입니다 이 밤 지나고 밝아오는 아침엔 덜 고통하고 덜 슬픈 날이기를 두 손 모아 빌어 봅니다

모리아/시 2021.04.15

모습

[모습] - 시인 오 규원 살아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 만의 잎은 제각기 몸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하나, 들판의 고독 하나, 들판의 고통 하나도 다른 곳에서 바람에 쓸리며 자기를 헤집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 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

모리아/시 2021.04.14

남을 위해 사는 삶은 없습니다

남을 위해 사는 삶은 없습니다 박인혜 집 모퉁이 작은 들꽃에게 미소를 짓는다면 그냥 들꽃이 아니라 내 눈에 의미로 남아 가슴에 담깁니다 길가에 뒹구는 깨진 병 조각 쓰레기통에 넣는다면 내 마음 구석 깨진 상처 한 조각 치우는 것입니다 아픈 사람 마음 한번 쓰다듬어 주려 먼 길을 같이 걷는다면 걸어가는 그 길에는 내 마음에 사랑의 꽃을 피우는 시간입니다

모리아/시 2021.04.14

꽃씨를 닮은 마침표처럼

꽃씨를 닮은 마침표처럼 ㅡ 이 해인 내가 심은 꽃씨가 처음으로 꽃을 피우던 날의 그 고운 설레임으로 며칠을 앓고 난 후 창문을 열고 푸른 하늘을 바라볼 때의 그 눈부신 감동으로 비 온 뒤의 햇빛 속에 나무들이 들려주는 그 깨끗한 목소리로 별것 아닌 일로 마음이 꽁꽁 얼어붙었던 친구와 오랜만에 화해한 후의 그 티없는 웃음으로 나는 항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못 견디게 힘든 때에도 다시 기뻐하고 다시 시작하여 끝내는 꽃씨를 닮은 마침표 찍힌 한 통의 아름다운 편지로 매일을 살고 싶다

모리아/시 2021.04.13

다섯 그루

다섯 그루 황형철 염치쯤이야 모른 척하고 꼭 좀 탐이 나는 게 있어 가만 앉아서도 상춘할 수 있는 산수유 하나 묵을 갈아 시를 곁들일 수 있는 홍매화 하나 게으른 나 대신해 먼 데까지 향기 나눌 수 있는 자목련 하나 긴긴 무더위쯤 함께 이겨낼 탐스러움 배롱나무 하나 까치밥도 넉넉히 남길 수 있는 감나무 하나 이렇게 딱 다섯 그루만 가갑게 좀 두면 날마다 가슴은 두근반 세근반 할 것인데 멍하니 해바라기하며 심심소일 살랑살랑 바람도 훔치고 싶어

모리아/시 2021.04.12

기도

[기도] - 구 상 땅이 꺼지는 이 요란 속에서도 언제나 당신의 속사귐에 귀 기울이게 하옵소서. 내 눈을 스쳐가는 허깨비와 무지개가 당신 빛으로 스러지게 하옵소서. 부끄러운 이 알몸을 가리울 풀잎 하나 주옵소서. 나의 노래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내 혀를 닮게 하옵소서. 이제 다가오는 불 장마 속에서 '노아'의 배를 타게 하옵소서. 그러나 저기 꽃잎 모양 스러져 가는 어린 양들과 한 가지로 있게 하옵소서.

모리아/시 2021.04.11

봄밤의 편지

[봄밤의 편지] - 박 용 재 꽃들이 툭툭 떨어져 대지의 품에 안기는 봄밤 낡은 볼펜으로 편지를 쓴다 그대와 걸었던 길들을 따라 자욱하게 먼지를 일으키며 바람의 떼들이 달려오고 그대를 사랑한다던 서투른 맹세도 바람처럼 달려온다 세월 속으로 꽃들은 조용히 왔다가 갔다 이 쓸쓸한 봄밤 내 그대를 사랑함은 그대를 그냥 곁에 두고 싶은 편안함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 듣던 노래 함께 가던 영화관의 퀴퀴한 냄새를 잊지 못한다 그대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일상의 기억 속에서 재빠르게 지나간다 과거로부터 편지들이 배달되고 다시 그대에게 답장을 쓰는 것은 내가 지고 가야 할 운명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그 짐을 덜어줄 동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새벽이 저만큼 등불을 켜고 걸어오는 봄밤 그대의 깨질 듯한 웃음소리가 그립다

모리아/시 2021.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