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편지 54

편지

[편지] - 윤동주 -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진정 못 잊는다는 말을 말고 어쩌다 생각이 났었노라고만 쓰자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잠못 이루는 밤이면 행여 울었다는 말을 말고 가다가 그리울 때도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

모리아/편지 2024.03.22

순진한 강남 기독교인에게

영성일기의 허망함 "순진한 강남 기독교인에게 보내는 편지" 나는 강남 대형교회에 나가는 기독교 신자들의 얼굴에서 순진함을 본다. 그들은 신앙의 사람으로서 악의가 없고, 착해 보인다. 그들은 영성 일기를 쓰며 자신의 욕망을 헤아리고, 영성적 순결을 하루하루 점검한다. 이들은 주일마다 아주 순수한 표정으로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아멘 아멘을 반복한다. 순진함으로 가득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야말로 신앙인의 삶이라고 굳게 믿고, 그렇게 살아야 복을 받는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들은 다투기 싫어하고, 욕설을 하지 않으며, 더러운 짓을 하지 않는다. 아주 순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순진함에는 이중 삼중으로 포장된 누추한 욕망이 겹겹이 담겨 있다. 순진한 신자가 매일매일 영성일기를 쓰면서 찾아내는 악은 고작해야 ..

모리아/편지 2024.03.18

당신께 보내는 가을 편지

"화려한 일을 추구하지 말라.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재능이며, 자신의 행동에 쏟아 붓는 사랑의 정도이다." - 머더 테레사 ♡ 당신께 보내는 가을 편지 ♡ -김정래- 빠알간 나뭇잎 하나 둘 떨어지면 내 고운 사랑 이쁘게 써서 빨간 우체통 안에 넣어 당신에게 편지를 보내렵니다 편지 속에는 내 마음 소복이 담아 당신 얼굴 떠올리며 쓴 편지라고 당신 그리워하며 쓴 편지라고 그렇게 적어 놓겠습니다 사랑하는 내 당신은 우체부 아저씨가 전해주는 그 편지를 받으면 편지 겉봉에 입맞춤 한번하고 가슴에 꼭 안았다가 읽어주세요 답장은 안 해도 된답니다 그저 내 마음이니 그렇게 알고나 계세요 가을이 오면 꼭 쓰고 싶은 편지었으니까요 당신 그리워하는 가을의 내 마음을 전해주고 싶을 뿐이니까요

모리아/편지 2023.10.16

어둠이 일깨우는 소리

계수님께 변전기가 고장이 나서 덕분(?)에 실로 오랜만에 불꺼진 방에서 하룻밤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 캄캄한 밤이 오히려 낯설어 늦도록 깨어 있으니 불 켜 있던 밤에는 미처 듣지 못하던 여러 가지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멀리 누군가의 고향으로 달리는 긴 밤열차로부터 담 너머 언덕에서 뛰노는 동네 아이들 소리, 교도소의 수많은 쥐들을 전율케 하는 고양이의 앙칼진 울음소리, 가지를 흔들어 긴 겨울잠에서 뿌리를 깨우는 봄바람 소리, 그리고 상처받은 청춘을, 하루의 징역을 고달파하다 잠든 젊은 재소자들의 곤한 숨소리……. 어둠 속의 담뱃불처럼 또렷이 돋아납니다. 어둠은 새로운 소리를 깨닫게 할 뿐 아니라, 놀랍게도 나 자신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어둠은 나 자신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캐어물..

모리아/편지 2023.10.07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 조병화 - 너의 집은 하늘에 있고 나의 집은 풀 밑에 있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산다 너는 먼 별 창 안에 밤을 재우고 나는 풀벌레 곁에 밤을 빌린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잔다 너의 날은 내일에 있고 나의 날은 어제에 있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세월이다 문 닫은 먼 자리, 가린 자리 너의 생각 밖에 내가 있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있다 너의 집은 하늘에 있고 나의 집은 풀 밑에 있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산다

모리아/편지 2023.10.04

엽서

엽서 ㅡ 박 세림 새해에 받은 엽서 한 장의 그림이 불을 켠 듯 환하게 다가왔다 햇살 쨍쨍한 여름날 유채꽃밭 위에 선명하게 쏟아지는 햇살이듯 그 안에 적힌 투명한 이름 하나도 다가왔다 마당가의 짱짱한 빨랫줄에 앉은 고추잠자리 날개의 이내 빛이듯 나의 새해 안부가 궁금하다 화석처럼 그냥 문자 자국으로만 새겨지지 않았는지 또 어떤 빛깔로 남았을지 궁금하다 이제 나도 별빛도 담은 파도소리도 담은 들꽃의 향기도 함께 담은 그러한 엽서를 고르리라 그래서 이름 하나의 희망이 그 어느 누구에게서 다가오듯 불 켠 듯 환하게 다가오듯 그런 엽서를 띄우리라

모리아/편지 2023.08.31

국방부장관에게 공개서한

이종찬 광복회장, 이종섭 국방부 장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나라의 국방을 위해 노력하는 귀하에게 인사를 먼저 보냅니다. 최근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설치된 독립전쟁의 영웅들의 흉상을 제거하기로 귀하가 방침을 결정한데 대하여 몇 가지 충고를 드립니다. 1. 당초 독립전쟁 영웅의 흉상을 모시고자 할 때, 그 뜻은 국군의 역사가 해방 이후 일본군 잔재들이 모여서 편성한 것으로 한다면 부끄러운 역사로 기록되게 되었었습니다. 더 높은 숭고한 우리 국군의 역사로 승화시켜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독립전쟁의 역사를 우리의 것으로 받들자는 뜻에서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역사관을 후세에 무지한 자들이 쉽게 지울 수는 없습니다. 2. 내가 알고 있는 사례를 소개합니다. 1951년 10월 진해에서 육군사관..

모리아/편지 2023.08.27

이해인 님과 톨스토이

해야할 것을 하라.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 여름편지 ♡ - 이해인 - 움직이지 않아도 태양이 우리를 못 견디게 만드는 여름이 오면, 친구야 우리도 서로 더욱 뜨겁게 사랑하며 기쁨으로 타오르는 작은 햇덩이가 되자고 했지? 산에 오르지 않아도 신록의 숲이 마음에 들어차는 여름이 오면, 친구야 우리도 묵묵히 기도하며 이웃에게 그늘을 드리우는 한 그루의 나무가 되자고 했지? 바닷가에 나가지 않아도 파도소리가 마음을 흔드는 여름이 오면, 친구야 우리도 탁 트인 희망과 용서로 매일을 출렁이는 작은 바다가 되자고 했지? 여름을 좋아해서 여름을 닮아가는 초록빛 친구야 멀리 떠나지 않고서도 삶을 즐기는 법을 너는 알고 있구나 너의 싱싱한 기쁨으로 나를 더욱 살고 싶게 만드는 그윽한 눈빛의 고마운 친구야! "해야 할 ..

모리아/편지 2023.07.25

니논을 위하여

니논을 위하여 ㅡ 헤르만 헤세 바깥에는 별이 바삐 움직이고 모든 것이 불꽃을 날리고 있는데 이렇게도 생활이 암담한 나의 곁에 네가 있겠다는 것. 분망한 인생살이 속에서 하나의 중심을 네가 알고 있다는 것 이것이 너와 너의 사랑이 나를 위한 고마운 수호신이 되게 한다. 나의 암흑 속에서, 너는 참으로 은밀한 별을 느낀다. 너는 사랑으로 다시 나에게 삶의 달콤한 핵심을 생각케 한다. *암담한 생활 속에서 분망한 인생 살이 속에서 암흑 속에서 은밀한 별로 느껴지는 누가 있다면 그래도 살만한 인생이다. * 주 - 오정원

모리아/편지 2023.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