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길 197

창문

[창문] -정호승- 창문은 닫으면 창이 아니라 벽이다. 창문은 닫으면 문이 아니라 벽이다. 창문이 창이 되기 위해서는 창과 문을 열어놓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세상의 모든 창문이 닫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열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는 데에 평생이 걸렸다. 지금까지는 창문을 꼭 닫아야만 밤이 오는 줄 알았다. 많은 사람들이 창문을 열었기 때문에 밤하늘에 별이 빛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제 창문을 연다. 당신을 향해 창문을 열고 별을 바라본다. 창문을 열고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당신의 모습이 보인다.

모리아/길 2023.01.31

길은 광야의 것이다.

[길은 광야의 것이다] - 백무산 - 얼마를 헤쳐왔나 지나온 길들은 멀고 아득하다 그러나 저 아스라한 모든 길들은 무심하고 나는 한 자리에서 움직였던 것 같지가 않다 가야 할 길은 얼마나 새로우며 남은 길은 또 얼마나 설레게 할 건가 하지만 길은 기쁨과 희망을 안겨주었고 동시에 나락으로 내몰았다 나에게 확신을 주었고 또 혼란의 늪으로 내던졌다 길을 안다고 나는 감히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되돌아 서서 길의 끝이 아니라 시작된 곳을 찾았을 때 길이 아니라 길을 내려 길을 보았을 때 길은 저 거친 대지의 것이었다 나는 대지에서 달아나지 않았으므로 모든 것은 희생되었다 그러자, 한순간에 펼쳐진 바다와 같은 아, 하늘에 맞닿아 일렁이는 끝없는 광야의 그늘을 나는 보았다 우리들 삶은 그곳에서 더이상 측..

모리아/길 2023.01.30

저녁 산

저녁 산 배문성 혼자 깊어가는 너를 어쩔 것인가 멀고 또 멀어, 끝없이 사라지고 있는 저 산자락 앞에서 오늘이 마지막인 것들이 차례로 찾아와 저물고 있다. 삶을 매듭짓는 방식은 이렇게 저무는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무도 모르게 그냥- - - - -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견디는 것이란 상처란 상처는 다 끄집어내, 죄값을 묻고 또 물어 스스로를 괴롭히고 난 뒤에도 살아남는 것 그래- - - - - 견디는 것이란 한없이 넘어가는 저녁 산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 있는 것 오래 견뎌온 상처들이 하나씩 둘씩 밀려오는 저녁 상처를 내려놓은 삶들이 천천히 사라지고 저녁 산은 끝없이 아득한 저 너머로 넘어간다

모리아/길 2023.01.27

밤길

밤길 ㅡ 이현주 자동차가 끊어져 시오 리 밤길을 걸었습니다. 오랜만에 걷는 호젓한 밤길에서 옛 친구들을 만났지요. 별은 검은산 위에 외로이 떠 있고 보오얀 달빛을 어깨에 얹은 구름도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등 뒤로 따라오던 달빛은 혼자서 걷지 말라고 작은 그림자를 앞세워주더군요. 멀리 산기슭 사람 마을에서는 아스라한 불빛 사이로 개 짖는 소리 들리고 모두들 잠들었을 시간에 어디서 나무 타는 냄새 꿈결같이 흐르는데 자동차 끊긴 밤길 시오 리, 왠지 자꾸만 슬프고 고맙고 그래서 눈물 훔치며 걸었습니다. * 오목 ㅡ 요즘은 시골도 가로등 불빛이 있고 없는 곳에는 멀리서라도 빛이 보여 걸을만 하다. 시오리 딱 면소재지에서 집으로 걸어오는 거리다. 아무도 없는 밤길을 달과 별을 벗 삼아 그리고 내 그림자를 위안..

모리아/길 2023.01.19

유일한 박사의 유언장

유일한 박사의 유언장 1971년 3월, 한 기업의 설립자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공개된 유언장. 기업을 설립하여 큰 부를 축적한 그였기에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유언장으로 쏠렸습니다. 유언은 편지지 한 장에 또박또박 큰 글씨로 적혀있었습니다. 손녀에게는 대학 졸업까지 학자금 1만 달러를 준다. 딸에게는 학교 안에 있는 묘소와 주변 땅 5천 평을 물려준다. 그 땅을 동산으로 꾸미고, 결코 울타리를 치지 말고 중∙고교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여 그 어린 학생들이 티없이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더불어 느끼게 해달라. 내 소유 주식은 전부 사회에 기증한다. 아내는 딸이 그 노후를 잘 돌보아 주기 바란다. 아들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거라. 유언장은 모두를..

모리아/길 2023.01.18

기다리는

기다리는 ㅡ 강 희근 세상의 반은 기다리기 또는 놓아주기 목련이 피고 버스가 가고 그림이 있는 미술관 그 앞 정류소에 기다리는 사람 보내는 사람 약속이 꽃잎으로 하늘 하늘 떨어져 내리고 새로운 버스는 왔다가 가고 봄은 이제 적어 놓은 글자 끄트머리를 지우고 끄트머리의 끝 머리카락 손가락에서 빠져 나가고 긴 침묵과 반란이 가고 세상의 반이 다 가고 기다리고 끝내는 남고 남은 것은 기다리는

모리아/길 2023.01.09

희망을 위하여

[희망을 위하여] - 곽재구 -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게 껴안은 두 팔을 놓지 않으리 너를 향하는 뜨거운 마음이 두터운 네 등 위에 내려앉는 겨울날의 송이눈처럼 너를 포근하게 감싸 껴안을 수 있다면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져 네 곁에 누울 수 없는 내 마음조차도 더욱 편안하여 어머니의 무릎잠처럼 고요하게 나를 누울 수 있다면 그러나 결코 잠들지 않으리 두 눈을 뜨고 어둠 속을 걸어오는 한 세상의 슬픔을 보리 네게로 가는 마음의 길이 굽어져 오늘은 그 끝이 보이지 않더라도 네게로 가는 불빛 잃은 발걸음들이 어두워진 들판을 이리의 목소리로 울부짖을지라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게 껴안은 두 손을 풀지 않으리.

모리아/길 2023.01.05

여정길

[여정길] -채정완- 살아가는 여정길은 너무나 먼 길이라지만 누구에게는 짧고 누구에게는 길지요 같은 음식도 누구에게는 맛이 있고 누구에게는 맛이 없는 법이지요 같은 곳을 바라보아도 누군가에게는 아름다움을 주지만 그렇지 못하기도 하지요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여정길에서 만난 사람들이지요 잠시 머무르다 가는 길 잘 돌아보며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모리아/길 2023.01.02

달라진 장례문화, 인간과 죽음

인간과 죽음 인간의 죽음은 일상적인 현상이다.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은 유한하기 때문에 인간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자연의 이치에서 보면 죽음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지만 인간은 죽음 앞에서, 그리고 타인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두려움과 공포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한 인간의 죽음으로 인해 존재가 사라지는 현상과 그 사람과 나의 관계가 영원히 단절되는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죽음은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점을 분명하게 각인시켜 준다. 죽음의 가장 큰 특징은 불가역성이다. 죽은 다음 다시 살아난 사람은 없다. 이는 곧 죽음이 영원한 이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은 사람들에게 슬픔과 아쉬움, 그리고 무엇보다 떠나가는 사람은 남은 자에게, 남은 자는 떠나가는 사람에게 더 이..

모리아/길 2022.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