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발한 꽃 만발한 꽃 ㅡ 헤르만 헤세 봉숭아나무에 꽃이 만발했지만 하나하나가 다 열매가 되지는 않는다. 푸른 하늘과 흐르는 구름 속에서 꽃은 장밋빛 거품처럼 밝게 반짝인다. 하루에도 백 번이나 꽃처럼 많은 생각이 피어난다— 피는 대로 두어라. 되는 대로 되라지, 수익은 묻지 마라. 놀이도, 순결도, 꽃이 만발하는 일도 있어야 한다. 그렇잖으면, 세상이 살기에 너무 좁아지고 사는 데에 재미가 없어질 것이다. 모리아/길 2023.03.10
그림자 창세기 1장 27절에 나오는 ‘형상’(Image)이라는 단어의 원어는 ‘םֶלֶצ’(ṣelem)이며, 그 의미는 ‘그림자’(shade)로 알려져 있다. 이로부터 ‘유령, 환영, 형상’ 등의 용례로 확장되고, 형용사로 활용될 경우 ‘단지’(mere) 또는 ‘빈, 공허한’(empty) 등으로 쓰이기도 한다. 구약학자들에게는 확증편향이나 과잉 일반화로 비칠 의견일지 모르지만, 목회와 신앙적 차원에서 단어가 주는 교훈을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유추하고 싶다. 먼저 그림자가 몸체와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인류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근본적 목적과 이유는 하나님과 동행 또는 동거하는 삶에 있다는 해석이다. 달리 표현하면 삶의 근본 토대와 궁극적 방향 그리고 최고 우선순위가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의미한다.. 모리아/길 2023.03.01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ㅡ 반 칠환 보도블록 틈에 핀 씀바귀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하는 힘으로 다시 걷는다. 모리아/길 2023.02.25
희망은 깨어 있네 희망은 깨어 있네 ㅡ 이해인 나는 늘 작아서 힘이 없는데 믿음이 부족해서 두려운데 그래도 괜찮다고 당신은 내게 말하더군요 살아있는 것 자체가 희망이고 옆에 있는 사람들이 다 희망이라고 내가 다시 말해주는 나의 작은 희망인 당신 고맙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숨을 쉽니다 힘든 일 있어도 노래를 부릅니다 자면서도 깨어 있습니다 모리아/길 2023.02.24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ㅡ 이현주 바다 그리워, 깊은 바다 그리워 남한강은 남에서 흐르고 북한강은 북에서 흐르다가 흐르다가 두물머리 너른 들에서 남한강은 남을 버리고 북한강은 북을버리고 아아, 두물머리 너른 들에서 한강 되어 흐르는데 아름다운 사람아,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설레는 두물머리 깊은 들에서 바다 그리워, 푸른 바다 그리워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모리아/길 2023.02.19
못다한 정 못다 한 정 ㅡ 박노해 깊은 산중에 산막을 치고 우람한 나무들을 우지끈 찍어넘겨 강물에 떠내려보내는 산꾼들은 뗏목 위에 산딸기 머루 꽃들을 얹는다 저 그리운 사람 마을 누군가에게 강가에 우는 그대여 기다림에 울다 지친 그대여 이 장강에 쓰러져 흐르는 뗏목 같은 생목숨 위에 얹힌 달고 고운 꽃송이를 받으라 거친 일생에 못다 한 못다 한 정 받으라 모리아/길 2023.02.12
가로수의 마음을 읽다 가로수의 마음을 읽다 ㅡ 서정윤 가로수가 길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늘상 그냥 가로수이지만 한 십년만 지나면 가지를 뻗는 손이 확연히 표 날 만큼 비스듬하다 그냥 모르는 척 살아도 마음이 끌리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우리가 보기에 너무나 태연한 가로수도 스스로의마음을 숨기기에 십 년이란 너무 긴 시간이었을까 가장 절망적일 때 마주보고 느낄 수 있는 그대가 적당한 거리에 서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눈빛으로 정이 들어 그리워할 수 있는 그대 작은 이파리 한 장 날린다. 십 년이나 그보다 더 많이 지난 후에 표시가 날 내 마음을 . 조금씩 얼굴이 붉어진다, 기우는 해가 저만큼 남아 있다. 모리아/길 2023.02.08
존 녹스의 탄생지, 해딩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 존 녹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존 녹스 로드의 여정을 출발했다. 존 녹스의 탄생지는 에든버러 남쪽에 위치한 해딩톤(Haddington)이란 소도시다. 필자는 렌터카 운전대를 잡고 에든버러에서 약 1시간을 달려 해딩톤에 도착했다. 존 녹스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겨 있는 세인트메리 교회에 도착했지만, 너무 이른 시각에 도착해서 교회 개방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교회 뒤쪽으로 걸어가니 새로운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녹색의 평원을 배경으로 교각 아래가 아치형으로 되어 있는 넌게이트 다리와, 그 밑으로 흐르는 강물 위에 오리 떼가 평화롭게 노닐고 있었다. 다리 건너편에는 존 녹스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으로 알려진 기포드게이트(Giffordgate) 마을이 있었다. 강가의 의자에 앉아 흐.. 모리아/길 2023.02.02
길 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길 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이상윤- 길 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시간의 재가 되기 위해서 타오르기 때문이다 아침보다는 귀가하는 새들의 모습이 더 정겹고 강물 위에 저무는 저녁 노을이 아름다운 것도 이제 하루 해가 끝났기 때문이다 사람도 올 때보다 떠날 때가 더 아름답다 마지막 옷깃을 여미며 남은 자를 위해서 슬퍼하거나 이별하는 나를 위해 울지마라 세상에 뿌리 하나 내려두고 사는 일이라면 먼 이별 앞에 두고 타오르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느냐 이 추운 겨울 아침 아궁이를 태우는 겨울 소나무 가지 하나가 꽃보다 아름다운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이 아니겠느냐 길 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어둠도 제 살을 씻고 빛을 여는 아픔이 된다. 모리아/길 2023.02.02
꽃들은 피어난다 꽃들은 피어난다 ㅡ 이기철 오늘이 무슨 요일인가를 묻지 않고 꽃들은 피어난다 최소한 작년보다 더 잘피려고 마음 고쳐먹으면서 꽃들은 피어난다 거기가 벼랑인지 담장인지 가시덩굴인지 묻지도 않고 꽃들은 피어난다 제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모름지기 붉게 서럽도록 희게 꽃들은 피어난다 언제 지면 되느냐고 묻지도 않고 꽃들은 피어난다 뿌리에서 올라와 뿌리의 생각을 잊어버린 채 누구의 시에 제 이름이 씌어질지도 모르는 채 꽃들은 피어난다 지상에서 제일 짧고 아름다운 것이 제 생인 줄도 모르고 꽃들은 피어난다 모리아/길 2023.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