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정과/설교 자료

5월 5일(부활절 6주) 어린이주일 설교

ree610 2024. 5. 2. 11:43

교회력 설교자료(5월 5일, 부활절 6주, 어린이주일)  

글쓴이 : 조헌정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였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주일 본문]
  행 10:44-48; 시 98편; 요1 5:1-6; 요 15:9-17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사도행전 10:44-48}

44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에, 그 말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내리셨다.
45  신자가 된 유대인으로서 베드로와 함께 왔던 사람들은 성령의 선물이 이방 사람들에게까지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46  그들은, 이방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과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때에 베드로가 말하였다.
47  "이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았으니, 그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48  그런 다음에, 그는 그들에게 명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였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였다.

[신학적 관점]

사도행전 2장 마가의 다락방에서의 첫 번째 성령강림이 유대인들을 위한 사건이었다면, 본문은 로마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모인 이방인들을 위한 두 번째 성령강림 사건이 된다. 이는 베드로가 첫 번째 성령강림 이후 인용한 요엘의 말씀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의 성령을 부어주리니...”(2:17)의 성취이기도 하며, 욥바에서의 보자기 환상 가운데서 들은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10:15)의 실현이기도 하다.

유대민족의 틀에 갇혀 있던 YHWH의 구원과 해방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틀을 깨고 세계 모든 인류를 향해 나아간다는 점에서 본문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우리 사회는 빈부, 학력, 나이, 성, 인종과 이념으로 인한 차별이 존재하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차별의 장벽을 허물도록 부름을 받았다.

[목회적 관점]

어느 사회에나 서로를 나누는 구분의 경계가 있고 이로 인해 차별이 존재한다. 오늘 나의 목회 현장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적용해 본다면?

[주석적 관점]

사도행전에서 본문은 네 번째 성령강림 사건에 해당한다(2:1-4; 4:31; 8:17). 그런데 본문은 앞의 세 경우와는 달리 성령강림이 먼저 있고 이어 세례가 진행된다.

[설교적 관점]

베드로가 설교하는 가운데 성령이 임한다. 이는 베드로의 편견을 깨고 그를 깜짝 놀라게 만들면서 그의 설교를 중단시킨다. 설교자는 자신의 하는 말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청중 가운데 임하는 성령의 활동에 눈을 떠야 한다.

베드로는 갈릴리 출신으로 로마법에 의해 처형당한 예수의 수제자였고 고넬료는 예수를 사회를 소란스럽게 하는 위험인물로 보아 처형한 로마제국에 속한 군 장교였다. 이 두 사람은 당시 사회에서는 양극단에 서 있는 사람으로 도저히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베드로는 유대인으로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일이 금지되었고, 고넬료 또한 베드로를 만나는 일은 자신의 미래를 망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둘은 성령에 의해 자신들의 장벽을 깨고 서로 만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됨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일구는 한 신앙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었다. 예수 부활의 영으로서의 성령은 곧 만날 수 없는, 아니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고 하나가 되게 하신다.

오늘날 남한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이 만나서는 안 되는, 혹은 만나기를 꺼리는 부류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시 98 편}

1  새 노래로 야훼를 찬양하여라. 놀라운 기적들을 이루셨다. 그의 오른손과 거룩하신 팔로 승리하셨다.
2  야훼께서 그 거두신 승리를 알려 주시고 당신의 정의를 만백성 앞에 드러내셨다.
3  이스라엘 가문에 베푸신다던 그 사랑과 그 진실을 잊지 않으셨으므로 땅끝까지 모든 사람이 우리 하느님의 승리를 보게 되었다.
4  온 세상아, 야훼께 환성을 올려라. 기뻐하며 목청껏 노래하여라.
5  거문고를 뜯으며 야훼께 노래 불러라. 수금과 많은 악기 타며 찬양하여라.
6  우리의 임금님, 야훼 앞에서 은나팔 뿔나팔 불어대며 환호하여라.
7  바다도, 그 속에 가득한 것들도, 땅도, 그 위에 사는 것들도 모두 환성을 올려라.
8  물결은 손뼉을 치고 산들은 다 같이 환성을 올려라.
9  야훼 앞에서 환성을 올려라. 세상을 다스리러 오신다. 온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시고 만백성을 공정하게 다스리시리라.

{요한1서 5:1-6}

1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낳아 주신 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 그에게서 태어난 이도 사랑합니다.
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면, 이것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압니다.
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4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5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6  이 분은 오셔서 물과 피를 거치신 분인데,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를 거쳐서 오셨습니다. 성령은 증언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곧 진리입니다.

[신학적 관점]

요한1서 공동체는 로마제국의 핍박으로 인해 분열과 배교(背敎)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에 저자 장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하느님 사랑을 통한 형제 사랑으로 나아가고 이는 세상을 이기는 승리가 됨을 확언하고 있다. 이는 전쟁과 폭력에 기반에 로마제국에 대한 부정(否定)이다.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은 모두 거듭난 삶의 모범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하고 있다. 요한서신은 마치 요한복음에 나타난 핵심 단어의 해설서와 같다.

[목회적 관점]

목회는 한마디로 세상 안에서 참다운 삶에 대한 증언자가 되도록 하는 일이다.

[주석적 관점]

물은 세례를 피는 십자가 죽음을 상징한다. 교회는 세례와 성찬의 예식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거듭남을 경험한다. 7절과 8절이 본문에서 빠져 있는 것은 잘못하면 물과 피와 성령이 하나된다는 말씀이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로 오해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설교적 관점]

설교의 목적은 예수 따르미들이 세상에서 승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세상 승리는 부자가 되고 어떤 지위를 통해 명예와 권력을 얻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러한 세상 유혹을 물리치는 신앙 역설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본문에서의 세상은 신의 아들로 자처하면서 황제숭배를 강요하는 체재를 말한다. 이는 소수의 로마시민만이 모든 특권을 독차지하는 독재의 체제였다.

{요한복음 15:9-17}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10  너희가 나의 계명을 지키면,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나의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나의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12  나의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다 행하면 너희는 내 친구다.
15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받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신학적 관점]

17절은 지상 사역을 마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장(14-17장)의 핵심 말씀이다. 사랑은 하늘부터 땅까지 그 용법이 다양하다. 신의 본성을 뜻하기도 하지만, 인간들의 순간 쾌락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스어는 이에 관련하여 서로 다른 단어를 사용한다. eros나 epithymia는 욕망이 개입된 사랑을, agape나 philia는 그런 욕망이 배제된 사랑을 말한다. 본문에서의 사랑은 agape이다. 이는 아버지로 호칭되는 하느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 되는 관계성의 표출이기도 하다.

[목회적 관점]

목회의 목표는 사랑공동체(코이노니아)의 완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은 ‘인간 서로 사랑’의 근본이 된다. 이때 사랑이 갖게 되는 희생의 아픔은 종으로서의 의무가 아닌 친구로서의 특권이 된다.

[주석적 관점]

agape는 라틴어로는 caritas로, 영어로는 charity(자비, 자선)로 번역된다. 넓은 의미에서 philanthropy(인류 사랑, 박애)의 뜻을 갖는다.

9, 10절의 ‘머뭄’과 16절의 ‘열매’는 앞 절의 포도나무 그림 비유의 연장이다. 시대적으로 보면 예수공동체에 대한 로마제국의 핍박과 유대 회당의 거부가 강하게 일어날 때이다. 곧 포도나무 비유 말씀은 공동체가 와해의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선택이 아닌 그분의 선택임을 재차 강조함으로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고 있다(16절).

[설교적 관점]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받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예수 이름으로 하는 기도는 그것이 무슨 소원이든지 뚝딱! 이루어지는 도깨비 방망이가 된다는 말이 아니다. 쉽게 말해 우산과 아이스크림을 파는 두 아들을 둔 어머니의 기도와 같이 애당초 성립될 수가 없는 기도이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1:14) 끝까지(17:24)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한다. 곧 하느님의 영광이 전제된 소원을 예수 이름으로 말할 때 무엇이든지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이는 포도나무 가지로서의 우리 자신과 농부이신 하느님 어버이의 ‘영광’으로서의 포도 열매를 연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ㅎㆍㄴ’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