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정과/설교 자료

4월 14일(부활절 3째) 주일 설교 자료

ree610 2024. 4. 9. 13:57

교회력 설교자료(2024년 4월 14일, 부활3)  

글쓴이 : 조헌정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ㆍ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고, 여기에 필자의 한국 목회 20년, 미국 목회 20년의 경험과 신학이 반영되어 있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겸하였다.
그러나 교단별로 창조절 적용 구간이 다르기에 사순절과 같이 성령강림절 기간을 7주(50일)로 하고 그 이후부터 창조절로 부른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본문]
  행 3:12-19; 시편 4; 요1 3:1-7; 눅 24:36b-48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부활절 이후 성령강림절까지는 제1성서 본문 대신 사도행전 본문을 택하고 있다)

사도행전 3:12-19

12   베드로가 그 사람들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어찌하여 이 일을 이상하게 여깁니까? 또 어찌하여 여러분은, 우리가 우리의 능력이나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하기나 한 것처럼, 우리를 바라봅니까?
13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일찍이 그를 넘겨주었고, 빌라도가 그를 놓아 주기로 작정했을 때에도, 여러분은 빌라도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
14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운 그를 거절하고, 살인자를 놓아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15   그래서 여러분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증언하는 증인입니다.
16   그런데 바로 이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고 또 잘 알고 있는 이 사람을 낫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이름을 믿는 믿음에 힘입어서 된 것이니, 예수로 말미암아 그 믿음이 이 사람을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완전히 성하게 한 것입니다.
17   그런데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해서 그렇게 행동하였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1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고 미리 선포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습니다.
19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돌아와서, 죄 씻음을 받으십시오.

[신학적 관점]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갔다가 성전 문 앞에 있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한 장애인을 고쳐준 사건 이후에 일어난 이야기이다. 하나의 병 치유 기적이 예수 부활 믿음과 신학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오늘날 의술에 의한 치유 (기적)와는 어떻게 구별되는 것인가? 문자적으로 읽기보다는 이는 당시의 기존사고 체계를 뒤집는 하나의 변혁 사건의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이 신학적으로는 옳은 접근 방식이다.

본문은 로마기독교 시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럽과 미국은 물론 기독교가 주류가 된 사회에서 유대인 핍박(홀로코스트)의 근거로 악용되어 오고 있다. 우리는 부활 예수는 역사적 예수에 근거하고 있고, 역사적 예수는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목회적 관점]

장애인을 영어로는 handicapped 혹은 disabled로 말한다. 필자는 80년 초반 이러한 용어 대신 otherly-abled person(다른 방면으로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표기하는 훈련을 받았다. 본문은 장애인은 장애가 없는 사람으로 치유 받았을 때에만 정상적인 인간이 된다고 하는 잘못된 선입견을 갖도록 한다.
이는 이천년 전 사고방식이다. 신학자 몰트만은 그의 장애신학에서 인간 존재를 ‘건강’ 혹은 ‘능력’ 혹은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경우 장애인들을 약하고 비정상이고 혐오스러운 존재로 보게 되는 위험을 갖게 된다고 경고한다.

“모든 장애는 또한 천부적인 선물이다.”
장애는 우리가 한 인간에게 결여된 것에 대해 경직되기 때문에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는 하나의 천부적인 선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가치 기준으로부터 한순간이라도 해방된다면, 그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유한 가치와 우리를 위한 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 성령의 은사들은 주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그 사람이 있는 상황 자체로부터 생겨납니다....
결과적으로 장애인 됨도 그 장애인이 하느님의 상과 세상에서의 빛이 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라면 장애는 그 형태가 어떠하든 성령의 은사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지평 안에 있는 사회선교』 위르겐 몰트만. 정종훈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0. 93쪽)

[주석적 관점]

“여러분은 일찍이 그를 넘겨주었고, 빌라도가 그를 놓아 주기로 작정했을 때에도, 여러분은 빌라도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13절) 이는 문헌이나 역사적으로 증거가 없다. 마가, 마태, 누가 모두 ‘바나바’ 얘기를 하고 있지만, 명절 때마다 살인자 그것도 로마제국에 반기를 든 역대급 반란의 두목들을 놓아준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다. 어느 나라고 이런 예는 있을 수가 없다. 이는 당시 복음서 저자들이 처한 역사적 상황과 밀접히 관련된 이야기이다.
  예루살렘 독립전쟁 이후 유대민족에 대한 박해가 극심해지자, 예수따르미 초대공동체들은 자신들은 성전종교에 기반한 유대인들과는 다른 그룹임을 밝힐 필요가 생겼다. 그리하여 예수 십자가 죽음의 원인을 정치적인 이유가 아닌 종교적인 이유로 각색한 것이다.
특히 누가는 바울과 함께 이방인 선교를 앞세움으로 유대교의 아브라함 혈통주의 신앙과 거리를 두었으며 사도행전은 이런 기조를 근본에 깔고 초대공동체는 물론 바울은 유대교로부터 계속 박해를 당한다.
더구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모두 서두에서 역사성이 희박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데오빌로’라는 로마 관헌에게 보내는 일종의 (기록보관용) 보고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복음서는 당시 일종의 불온문서에 해당했다. 1세기 말 로마당국이 상당 부분 할례나 안식일이나 정결법에 있어 유대교 전통을 따르고 있는 예수따르미 그룹을 정통 유대인 그룹에서 구분해 낼 재간은 없었다.
   공식적으로 예수는 로마제국의 지배를 거부하는 정치범들만 처형하는 십자가 극형을 당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복음서 이야기와는 달리 사도들의 전통에 따른 사도신조는 분명하게 예수는 로마총독 빌라도에 의해 죽임을 당했음을 선언하고 있다.

유대교의 전통에 따라 예수 부활 이후에도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에 기도하러 갔던 베드로가 반유대주의자로 갑작스레 전환하는 본문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편집사적으로 보면 성전이 이미 사라지고 없던 시대에 성전을 언급하고 있다. 곧 폐허 성전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기독론적인 자기 이해이다.

[설교적 관점]

흔히 병치유의 기적을 원할 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것을 말한다. 본문에서 예수는 단지 입술을 통해 나오는 소리 말을 뜻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예수’ 이름과 베드로와 요한이 불렀던 ‘예수’ 이름은 그 음가(音價)는 같지만, 들려지는 내용은 판이하게 다르다.
이천년 전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의 ‘예수’ 이름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의 ‘빨갱이’란 단어와 같이 불온시 여겨지는 용어였다. 예수는 생전에 성전에서 채찍을 들어 제사장들의 비호를 받는 희생제사용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을 내어쫓고 성전용 화폐로 교환하는 환전상들의 책상을 엎는 불법(?)을 행한 사람이었다.

오늘날에도 병고침을 넘어 ‘예수’ 이름으로 여러 가지 기적 사건을 경험한다. 인간 모두가 장애인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기적은 매 순간 여기저기에서 일어난다.
본문은 단순히 놀라기만 하고 이상히 여기는 태도(12절)를 넘어서서 회개하고(메타노이아) 돌아와서(에피스트레포) 죄씻음을 받을(19절) 것을 권면한다. 머리보다 행동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가던 길을 돌이켜서 반대 방향으로 삶을 바꾸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삶의 방향은 무엇인가? 이는 이미 언급한바, 자기 소유를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공동소유로 내어놓는 공동체의 삶이다.(2:42)

시 4 편

1   내 무죄함을 밝히시는 하느님, 부르짖사오니 들어 주소서. 이 곤경에서 나를 빼내 주소서. 불쌍히 여기시고 내 기도를 들으소서.
2   너희, 사람들아! 언제까지 나의 영광을 짓밟으려는가? 언제까지 헛일을 좇고 언제까지 거짓 찾아 헤매려는가? (셀라)
3   알아 두어라, 야훼께서는 경건한 자를 각별히 사랑하시니, 내가 부르짖으면 언제나 들어 주신다.
4   무서워하여라, 다시는 죄짓지 말아라. 자리에 누워 반성하여라, 고요를 깨지 말아라. (셀라)
5   제물을 바쳐 죄를 벗어라. 그리고 야훼만을 의지하여라.
6   "그 누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보여 줄까" 하고 말하는 자가 많사오니, 밝으신 당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돌리소서, 야훼여.
7   이 마음에 심어 주신 당신의 기쁨, 곡식이다, 포도주다, 풍년에 흥겨운 저들의 기쁨보다 크옵니다.
8   누운즉 마음 편하고 단잠에 잠기오니, 야훼여, 내가 이렇듯 안심하는 것은 다만 당신 덕이옵니다.

요한1서 3:1-7

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셨는지를 생각하여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라고 일컬어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임을 압니다. 그 때에 우리가 그를 참 모습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에게 이런 소망을 두는 사람은, 그가 깨끗하신 것과 같이, 누구나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4   죄를 짓는 사람마다 불법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죄는 곧 불법입니다.
5   여러분이 아는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6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마다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마다 그를 보지도 못한 사람이고, 그를 알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7   어린 자녀 여러분, 아무에게도 미혹을 당하지 마십시오.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습니다.

[신학적 관점]

신학에 있어 이런 분류는 없지만, 본문은 죄와 의를 다루고 있어 ‘죄와 의의 신학’이라는 용어를 붙일만하다.
‘죄와 의’는 성서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이다. 그런데 ‘죄와 의’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모두가 본문에서와 같이 하느님을 기준으로 삼지만, 사람마다 하느님에 대한 정의가 다 다르니 죄와 의에 대한 정의도 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렇게 정의를 내리는 경우 다종교사회인 남한사회에서 이웃 종교인들은 성서가 말하는 하느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니 윤리, 도덕은 온데간데없이 남한 인구 절반이 넘는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 되고 본문에서 5번 등장하는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는 기독교인들은 무조건 의인이 된다.

[목회적 관점]

가족은 혈연에 기초하지만, 성서가 말하는 하느님의 자녀는 혈연에 기초하지 않는다. 관계를 뜻한다.
혈연은 한번 맺어지면 끊어질 수 없지만, 관계는 일종의 계약 관계임으로 유동적이다. 6, 7절은 세례를 통해 요한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되었지만, 죄를 짓거나 유혹이 당하는 사람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교회에도 치리 제도가 있어 그 관계를 끊는 경우가 있다.

[주석적 관점]

요한1서 공동체는 요한복음에 익숙한 공동체로 새 시대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역사적 예수를 부정하는 ‘그리스도 적대자’들로(4:1-6) 인해 공동체 내에 분열이 일어났다. 따라서 본문이 말하는 ‘죄와 의’의 구체적인 판단의 기준은 ‘역사적 예수’를 믿는가 믿지 않는가이다.

[설교적 관점]

부활 세 번째 주간이다. 그런데 예수 부활에 강조를 두고 말씀을 선포하다 보면 역사적 예수에 소홀하기 쉽다. 왜 요한1서의 저자인 지도자는 예수가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하는 것을 강조할까?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부활승천하신 그리스도를 일방적으로 강조할 때, 어떤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인가?

이 땅의 정의와 평화를 심기 위한 십자가를 향한 갈릴리 예수의 고난에 찬 삶은 사라지고 부활의 영광만 드러남으로 기독교인들의 사회적 책임이 방기(放棄)될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24:36b-48

36   예수께서 몸소 그들 가운데 들어서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말씀하셨다.
37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38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39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지 않으냐?"
40   이렇게 말씀하시고, 손과 발을 그들에게 보이셨다.
41   그들은 너무 기뻐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42   그래서 그들이 그에게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니
43   예수께서 받아서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4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45   그 때에 예수께서는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곧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이며,
47   그의 이름으로 죄를 사함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다' 하였다. 너희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48   이 일의 증인이다.

[신학적 관점]

요한복음에서와 같이 저자 누가는 부활 예수의 몸은 죽음 이전의 지상 그대로의 몸의 부활을 강조한다. 두 저자 모두 자기의 몸을 만져보라고 말한다. 다만 누가는 요한복음에서처럼 예수의 몸에 못자국과 창자국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부활 예수께서는 식욕(食慾)을 느껴 구운 물고기를 잡수셨다고 보고한다. 그런데 바로 앞 절에서 엠마오를 향해 걸어가던 글라보와 다른 한 제자가 한 나그네를 만나 동행을 하며 여러 얘기를 나누었는데, 저들이 처음에는 부활 예수인지를 몰랐고, 후에 떡을 뗄 때에야 비로소 알아보았다는 점에서 부활의 몸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삼위일체 교리에 따라 부활 예수의 몸은 승천 이후에도 여전히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지닌 신비한 몸으로서 존재한다고 믿는데, 그렇다면 지금도 무언가를 먹어야 하는 몸인지 아니면, 이는 지상에 머물던 40일간만 그랬던 것인가? 하는 질문도 생긴다. 이는 당시 예수의 유령 가현설(Docetism)에 대한 비판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이 되었지만, 이로 인해 또 다른 질문이 파생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따라서 부활 예수의 사실성에 집중하는 것 대신 부활이 전하고 있는 신학적인 메시지 곧 죽음을 넘어 죄사함을 통한 새로운 몸으로서의 증인됨에 집중하는 것이 옳다.

[목회적 관점]

“그의 이름으로 죄를 사함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다”(47절) 여기서 말하는 죄는 어떠한 죄를 말하는 것인가? 개인의 사사로운 죄인가? 그리고 예수를 믿어 죄를 회개하고 사함을 받으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인가?

[주석적 관점]

24장 부활에 대한 이야기는 6단계로 진행이 된다. 1. 무덤가의 여인들과 두 사람(1-8절) 2.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알린다(9-11절) 3. 베드로가 빈무덤을 확인한다(12절) 4. 엠마오상의 두 제자(13-32) 5.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있음(33-49) 6. 예수와 제자들이 베다니로 감(50-55절)

증인(martures ,헬)은 단순히 본 것을 전하는 자(witness)를 넘어 순교(martyr)를 각오함을 뜻한다.

[설교적 관점]

부활 예수의 첫 마디는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다. 로마제국의 시대는 권력 쟁투와 끊임없는 전쟁의 시대였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교회 용어로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증인을 말하는 것이지만, 세상의 용어로 바꾼다면 ‘평화’이다. 평화의 증인(martyr)이 되라는 말은 예수와 같이 이 땅의 평화 실현을 위해 목숨을 걸라는 것이다.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