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정과/설교 자료

4월 7일 교회력(부활절 2주) 설교 자료

ree610 2024. 4. 5. 13:48

 

교회력 설교 자료(2024년 4월 7일, 부활2)  

글쓴이 : 조헌정 *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고, 여기에 필자의 한국 목회 20년, 미국 목회 20년의 경험과 신학이 반영되어 있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겸하였다.
그러나 교단별로 창조절 적용 구간이 다르기에 사순절과 같이 성령강림절 기간을 7주(50일)로 하고 그 이후부터 창조절로 부른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주일 본문]
  행 4:32-35; 시 133; 요1 1:1-2:2; 요 20:19-31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사도행전 4:32-35

32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누구 하나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33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그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34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신학적 관점]

저자 누가는 예수 부활의 영으로 거듭난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초대교회 공동체의 가장 큰 특징을 자기 것을 내어놓는 공동소유로 말한다. 이는 당시에는 로마제국의 사회지배 이념 곧 계급과 힘에 의한 통치 이념 오늘날로 말하면 자유경쟁이라는 미명(美名)하에 일어나는 개인소유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초대교회는 공산사회의 원초(元初)이다.(35절) 부활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에서 시작하는데,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일은 ‘하늘 채움’을 위해 고난에 찬 ‘자기 비움’을 뜻하는데, 이는 곧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기 위해 세상 욕망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목회적 관점]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이 땅에서의 그림자이자 이를 준비하는 훈련장이다. 하느님 나라의 가장 큰 특징은 하느님 앞에서 모두가 똑같다는 평등일 것이다. 그런데 능력이 똑같다면 이는 로봇이 되니 능력의 차이는 존재하되, 지향하는 세계관은 같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신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한다”고.(눅 12:48)

[주석적 관점]

사도행전은 일명 성령행전으로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땅끝까지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라(1:8)는 것이 주제이다. 무엇에 대한 증인인가? 부활 예수를 믿는 증거는 입술의 고백이 아닌 개인 소유를 포기하는 결단에 있다. 참조: 행 2:42-47; 6:1-7  

[설교적 관점]

현대사회에서의 성공의 잣대는 땅과 집의 크기이다. 특히 남한사회는 더욱 그러하다. 아파트는 삶의 보금자리가 아닌 투기로 변한지 오래 되었고, 정치를 잘하고 못하고의 기준은 자신의 부동산 가치가 얼마나 올랐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데 목회자들은 초대교회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얘기를 자주 한다. 초대교회 정신으로 돌아가자면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땅과 집 이상의 소유를 포기해야 한다. 본문은 물론 제1성서에서 땅은 하느님의 소유임을 자주자주 강조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하느님의 축복은 땅과 아파트의 크기로 변해버렸다. 교회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과는 달리 복 있는 사람이 아닌 벌을 받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십일조헌금은 본래 땅의 소득을 가질 수 없었던 제사장과 레위인을 비롯한 가난한 자를 위한 나눔헌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더 많은 (물질) 축복을 받기 위한 일종의 투자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자신이 바라는 물질 축복에 해당하는 <선(先) 십일조 헌금>이라는 단어까지 등장하고 말았다.
교회는 하느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거룩한 공동체이다. 거룩은 문자적으로 구별되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참 교회는 세상 가치와 구별될 때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딤전 6:10)임을 과감히 선포하고 이를 실천할 때,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는 참 교회가 된다.  

소련식 공산주의를 지향하던 국가들이 지나친 이념의 집착과 독재정치로 무너진 것이지, 가진 것을 함께 소유하는 공산공유(公産公有) 사회주의가 무너진 것은 아니다. 이는 성서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경제체제이다. 땅의 개인 소유로부터 차별이 시작하고 악이 시작한다. 성서는 ‘땅은 하느님의 것’임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이 실현을 위해 안식년과 희년이 선포되었으며 예수 또한 땅을 원래의 주인(지파)에게 돌려주는 희년의 해에 그의 공생애를 시작했다.(눅 4장)    

시 133 편

1   이다지도 좋을까, 이렇게 즐거울까! 형제들 모두 모여 한데 사는 일!
2   아론의 머리에서 수염 타고 흐르는, 옷깃으로 흘러 내리는 향긋한 기름 같구나.
3   헤르몬산에서 시온산 줄기를 타고 굽이굽이 내리는 이슬 같구나. 그곳은 야훼께서 복을 내린 곳, 그 복은 영생이로다.

요한1서 1:1-2:2

1   이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태초로부터 계신 것이요,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자세히 살펴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 본 것입니다.
2   이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원한 생명을 여러분에게 증언하고 선포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본래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우리와 서로 사귐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입니다.
4   우리는 우리의 기쁨이 차고 넘치게 하려고 이 글을 써 보냅니다.
5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들어서 여러분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요,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
6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하면서, 그대로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진리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7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서 살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8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안에 없는 것입니다.
9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더우시고 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10   우리가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
1   나의 자녀 여러분,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씁니다. 누가 죄를 지을지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는 우리의 죄 때문에 속죄제물이 되셨으니, 우리의 죄 때문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하여 그렇게 되셨습니다.

[신학적 관점]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관한 세 가지 용어가 등장한다.
변호인(2:1, parakletos), 의로운 분(2:1, dikaios), 속죄제물(2:2, hilamos).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생명’으로 말한다. 저자 요한이 말하는 우리의 ‘죄’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담의 원죄인가? 아니면 각자의 거짓된 행위와 미움과 욕망으로 가득찬 개인의 죄인가? 그런데 저자는 ‘죄’와 ‘불의’를 같은 의미로 말하면서(9절), 죄의 개념을 개인을 넘어선 ‘온 세상’의 죄라고 말한다.(2절) 여기서 말하는 온 세상(코스모스)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세상’과 같은가 다른가? 요한이 말하는 세상은 하느님 나라에 대적하는 로마제국을 말하고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세상은 인류공동생명체로서의 ‘지구촌(global village)’을 말한다.

[목회적 관점]

어둠의 행실에 머물고 있으면서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는 모순에 찬 요한공동체를 일깨우고 있다. 부활신앙은 잘못하면 우리로 하여금 죄의 현실 속에 머물고 있는 우리 자신을 간과하게 만든다. 현실의 부조리를 타파하는 현존의 믿음이 되어야지 타계신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주석적 관점]

1장 1절에서 ‘생명을 만져보았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요한복음 20장의 도마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 요한1서의 공동체는 여러 가지 점에서 요한복음 공동체와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생명이라는 영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당시 시대 철학인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방어를 계속하고 있다. 요한복음공동체의 적대자가 성전 세력이었다면, 요한1서의 적대자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통해서 오셨다는 것과 몸의 부활을 부정하는 가현설(Docetism)이었다.(비교 요1 2:18-27; 4:1-6)

[설교적 관점]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단지 우리 자신의 죄 때문만이 아니라, 세상의 죄 때문이다. 세상의 죄는 무엇인가? 하느님과 우리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너와 나’를 분열시키는 세상 권력과 물질 탐욕이다.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사회의 구조악이다. 사회구조 개혁이 뒷받침 되지 않는 개인의 변화는 시간이 지나면 곧 본래대로 돌아가고 만다. 사도행전에서의 초대교회는 공동소유의 공동체가 되어 세상 변혁의 밀알이 되었다. 혼자의 힘은 약하다. 나눔과 공동소유로서의 세상을 향한 교회 공동체의 예수 부활의 외침은 여전히 계속된다.

요한복음 20:19-31

19   그 날, 곧 주간의 첫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 걸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오시어, 그들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를 보고 기뻐하였다.
21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셨다.
22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그들에게로 숨을 내뿜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해 주면 사해질 것이요, 사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 하고 말하였으나, 도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서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었다. 문이 잠겨 있었는데, 예수께서 오시어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하고 인사하셨다.
27   그런 다음에,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치고 믿음을 가져라" 하고 말씀하셨다.
28   도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고 대답하니,
29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30   예수께서는 이 책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적도 제자들 앞에서 행하셨다.
31   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신학적 관점]

저자 요한은 도마를 통해 예수의 부활의 몸을 강조함으로 부활의 역사성과 사실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동시에 이를 ‘표적’(semeion, 30절) 중의 하나, 곧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말하고 있다. 이는 신학적으로 매우 함축적인 의미를 갖는다. 사실성을 넘어 이를 재현하는 실존의 삶을 강조하고 있다. 요한에게 있어서는 보는 것을 넘어 믿는 것이 중요했다.(참조 1:50) 그리고 이 믿음은 (하늘의) ‘평화(샬롬)’로 압축이 된다,

[목회적 관점]

교회는 간혹 세상이 두려워서 문을 닫고 있지는 않는가? 신앙이라는 자기 논리에 갇혀 이웃과 단절된 공동체로 남아 있지는 않는가? 예수는 벽을 문으로 알고 들어오신다. 참다운 부활공동체가 되려면 먼저 자기를 감싸고 있는 안전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예수가 전하는 평화는 개인 심령의 평화가 아닌 십자가 죽음의 세력을 깨뜨리는 세상 평화이다.

[주석적 관점]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예수는 ‘어버이와 나는 하나이다’라는 곧 에고에이미 발언으로 인해 유다인들로부터 돌에 맞을 뻔한다.(5:18; 10:31) 요한공동체는 예수를 따름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으로부터 추방당한 공동체이다.(9:34) 더구나 성전 세력의 핵심인 사두개파는 부활 자체를 부정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더욱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부활 예수의 몸이 지상 예수의 몸과는 다른 곧 시공 초월성을 지닌 몸을 강조하기에 문을 걸어 담근 이유를 설명하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 26절에서 다시 한번 강조한다.

도마(Thoams)는 본명이 아니다. 본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쌍둥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이다. 아람어로는 디두모이다. 본명 대신에 ‘쌍둥이’라는 별명이 더 잘 알려져 있었던 이유는 그의 쌍둥이 형제가 너무나 유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매우 잘 알려진 정치인이나 연예인의 경우 그의 가족을 소개할 때,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그 유명한 사람의 형이나 동생이다라고 소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도마’라는 별명으로 불려기는 그는 누구의 쌍둥이였을까? 놀랍게도 James Robinson이란 제2성서학자는 예수의 쌍둥이였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예수의 육체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내가 만져 보기 전에는 확신할 수 없다’는 본문의 발언이나 문맥상 생뚱맞은 발언이긴 하지만, ‘우리도 가서 예수와 함께 죽자’(11:16)는 발언 그리고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14:5)라고 하는 모든 발언들은 모두 예수와 살과 피를 함께 나누고 함께 자라났던 쌍둥이의 발언으로 타당성을 갖는다.  

30, 31절은 21장이 선교의 목적에서 쓰인 후기의 첨가임을 말하고 있다.

[설교적 관점]

도마가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하는 고백은 단순한 예수부활 신앙고백을 넘어 종교적으로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다. 종교적으로는 도마가 진정 예수의 쌍둥이였다면 이는 놀라운 고백이 된다. 그리고 사회정치적으로는 당시 노예들은 주인을 ‘주님!’이라고 불렀으며 로마 황제 또한 ‘신의 아들’로 ‘하느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었다. 도마의 신앙고백은 요한공동체의 고백이기도 하다. 이는 로마제국의 지배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갖고 있다.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