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8일 설교 자료(2024년 부활절 5째주)
글쓴이 : 조헌정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고, 여기에 필자의 한국 목회 20년, 미국 목회 20년의 경험과 신학이 반영되어 있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겸하였다. 그러나 교단별로 창조절 적용 구간이 다르기에 사순절과 같이 성령강림절 기간을 7주(50일)로 하고 그 이후부터 창조절로 부른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본문]
행 8:26-40; 시편 22:25-31; 요1 4:7-21; 요 15:1-8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사도행전 8:26-40}
26 그런데 주의 천사가 빌립에게 말하였다. "일어나서 남쪽으로 나아가서, 예루살렘으로부터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거라. 그 길은 광야 길이다."
27 빌립은 일어나서 가다가, 마침 에티오피아 사람 하나를 만났다. 그는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고관으로, 그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사람인데, 내시였다. 그는 예배드리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 돌아가는 길에, 마차에 앉아서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다.
29 성령이 빌립에게 "가서, 마차에 바싹 다가서거라" 하고 말씀하시니,
30 빌립이 달려가서, 그 사람이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읽는 것을 듣고 "지금 읽으시는 것을 이해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31 그가 대답하기를 "나를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올라와서 자기 곁에 앉기를 빌립에게 청하였다.
32 그가 읽던 성경 구절은 이것이었다. "양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이, 새끼 양이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것과 같이,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33 그는 굴욕을 당하면서, 공평한 재판을 박탈당하였다.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을 당했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이야기하랴?"
34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였다. "예언자가 여기에서 말한 것은 누구를 두고 한 말입니까? 자기를 두고 한 말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두고 한 말입니까?"
35 빌립은 입을 열어서 이 성경 말씀에서부터 시작해서, 예수를 알리는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36 그들이 길을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니, 내시가 "보십시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거리낌이 되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하고 말하였다.(37절 없음)
38 빌립은 마차를 세우게 하고, 내시와 함께 물로 내려가서,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39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니, 주의 영이 빌립을 데리고 갔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었지만, 기쁨에 차서 가던 길을 갔다.
40 그 뒤에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났다. 그는 돌아다니면서 여러 성에 복음을 전하다가, 마침내 가이사랴에 이르렀다.
[신학적 관점]
성령에 의한 사도 빌립의 땅끝까지의 선교활동을 말하고 있지만, 그 대상이 에디오피아 내시라는 달리 말하면 인종적(아프리카 흑인)으로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주류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던 사람이라는 점과 대화 내용의 핵심이 이사야의 ‘고난 당하는 종’(52:13-53:12)이었다는 점에서 신학적으로는 보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요소이다.(비교. 사 56:4-5) 아마도 솔로몬왕과 에디오피아 시바 여왕과의 외교 관계에 기반하여 후에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목회적 관점]
내시는 청소년 시절 궁궐에서 왕을 보좌하기 위해 생식기를 거세당하였다. 그리고 대신들과 여인들로부터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다. 내시가 그의 정체성이었다. 그는 유대교 순례자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였지만, 이방인의 뜰 그 이상은 허락이 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거부하는 종교에 계속 머물러야 할 것인가 하며 고민하였을 것이다. 그때 그는 이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다. "양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이, 새끼 양이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것과 같이,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굴욕을 당하면서, 공평한 재판을 박탈당하였다.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을 당했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이야기하랴?" 이는 마치 자신의 일생을 축약한 한(恨)의 이야기로 들렸을 것이다.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일컫는 이유는 이렇게 자신의 숨어 있는 깊은 내면의 존재성을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을 하나로 여겼다.
[주석적 관점]
간다게(kandake)는 에디오피아 말로 여왕을 뜻한다.
[설교적 관점]
사도행전은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땅끝까지 증인’ 선교활동이 주목적으로 쓰인 책이다.(1:8)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 예루살렘 성전에서 증인의 역할을 하다 핍박을 당한다. 그리하여 유대땅 밖으로 나아간다. 열두 사도에 의해 이방인 사역을 위해 선출된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었던 빌립은 유대 밖 남쪽 가사와 북쪽 사마리아 지방의 증인이다. 남성중심사회에서 그의 네 딸은 예언자라 불린다(참고, 행 21:8-9). 당시 땅끝은 물리적으로는 스페인이었다. 그러나 사도행전이 말하는 땅끝은 인간 사고의 한계를 깨고 그 경계를 넘는다는 신앙 개념이 더 강하다. 본문은 에디오피아 내시라는 한 인물이 이방인으로서 가장 첫 번째로 세례를 받는다. 그가 당시 읽고 있었던 이사야 예언서의 모체가 된 오경에 의하면 그는 구원공동체의 한 일원이 될 수가 없는 사람들 중 가장 첫 번째 부류의 사람이었다.(신 23:2)
내시가 빌립에게 물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거리낌이 되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오늘 누군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내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데에 무슨 거리낌이 되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최근 동성애자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베풀었다는 이유로 목사직을 박탈당한 목사가 있다.
{시편 22:25-31}
25 큰 회중 가운데서 내가 주를 찬송함도 주께서 주심이니, 주를 경외하는 무리 앞에서 나의 서원 지키리라.
26 가난한 사람 배불리 먹고 야훼를 찾는 사람은 그를 찬송하리니 그들 마음 길이 번영하리라.
27 온 세상이 야훼를 생각하여 돌아오고 만백성 모든 가문이 그 앞에 경배하리니,
28 만방을 다스리시는 이 왕권이 야훼께 있으리라.
29 땅속의 기름진 자들도 그 앞에 엎드리고 먼지 속에 내려간 자들도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리라. 이 몸은 주님 덕분에 살고,
30 오고오는 후손들이 그를 섬기며 그 이름을 세세대대로 전하리라.
31 주께서 건져 주신 이 모든 일들을 오고오는 세대에 일러 주리라.
{요한1서 4:7-21}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10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속죄제물이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1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 주신 것을 보았고, 또 그것을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계시고, 그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16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알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17 이것으로써 사랑은 우리에게서 완성된 것이니, 곧 심판 날에, 우리가 담대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담대해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대로,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형벌과 맞물려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19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20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의 형제나 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21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주님에게서 받았습니다.
[신학적 관점]
고린도전서 13장(이하, 전자)이 운율이 살아 있는 시(詩) 형태의 사랑장이라면 본문(이후, 후자)은 논설(論說) 형식의 사랑장이다. 전자는 처음부터 서술(敍述)로 시작해 서술(indicative)로 마치지만, 후자는 명제(命題)로 시작해 명령(imperative)으로 끝난다. 전자는 인간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을 말하지만, 후자는 전자와 달리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대명제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해석하고 이웃(형제자매) 사랑의 당위성(當爲性)을 말한다. 전자에는 하느님이란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천사’가 등장하지만, 이는 조건이 담긴 부정적 의미에서 등장한다. 믿음, 소망이 그렇듯이 사랑의 주체는 인간(‘나’와 ‘우리’)이다. 반면 후자에는 ‘우리’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만, 여전히 그 주체는 하느님이시다. 동양철학의 관점에서 전자가 기(氣)라면, 후자는 이(理)가 되고, 서양철학의 관점에서는 전자가 디오니소스라면 후자는 아폴로이다. 이는 마치 창세기의 창조 기사가 시 형태의 1장(P전승)과 산문(이야기) 형식의 2장(J전승)의 두 전승이 하나로 어울려져 있는 것과 같이 전자와 후자는 함께 읽어야 한다. 장로 요한은 전자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렇듯이 고린도전서 13장은 초대교회 안에서 따로 회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목회적 관점]
간혹 ‘하느님을 사랑합시다’라고 말할 때가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신적 속성상 인간 사랑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마치 개미가 인간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듯이...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표현할 수가 있는데, 이는 하느님을 대신하여 우리 가운데 있는 형제자매를 향한 사랑이다. 그런데 그 사랑은 본래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사랑인가? 아니다! 마치 거울이 빛을 받아 반사하듯이 우리의 사랑 또한 하느님 사랑의 반사에 불과하다. 그리고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은 그들이 본래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사랑하심으로 사랑할 대상으로서의 가치가 생겼기 때문이다.(19절)
[주석적 관점]
헬라어성서의 첫 단어는 agapetoi이다. 그냥 인사차 하는 ‘사랑하는 여러분’이 아니다. 하느님의 절대적 사랑으로 거듭난 새로운 존재 용어이다. give and take의 세상 구조(로마의 후원구조)를 깨뜨리는 언어이다.
[설교적 관점]
사랑이란 단어만큼 달콤하고 영혼의 필요를 채워주는 단어는 없다. 사랑에 맞서는 어떤 힘도 없다. 사랑에는 국경선도 없고 인간 한계인 죽음도 넘어선다. 그러나 사랑에는 아픔과 고통이 따른다. 그래서 사랑은 묘약(妙藥)이라는 말도 있다. 결국 사랑은 병도 주고 약도 준다.
우리말에 사랑이라 번역되는 헬라어는 관계에 따라 달리 사용되는 agape, eros, philia, stroge가 있으며, 이 이상의 단어를 말하는 학자도 있다. 에릭 프롬은 『The Art of Loving』에서 <형제자매간의 사랑(brotherly love), 무조건적인 사랑(motherly love), 이성 간의 사랑(erotic love), 자기사랑(self-love), 신에 대한 사랑(love of God)>으로 나누기도 했다.
20절의 ‘자기 형제자매’는 공동체 내의 사람들만을 일컫는 말인가? 아니면 공동체 밖의, 공동체를 핍박하고 모함하는 원수들까지도 포함하는 말일까?
사랑에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는 상대방의 거부나 실패 때문이다. 사랑은 그저 베푸는 것이다. 되돌려 받을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거래이지 사랑이 아니다.
인간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teteleiomene)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외치신 마지막 말씀이다. “다 이루었다(tetelestai)!”(요 19:30)
{요한복음 15:1-8}
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내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찍어 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열매를 더 많이 맺게 하려고 손질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그 말로 말미암아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 언제나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사람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6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그는 쓸모없는 가지처럼, 버림을 받아서 말라 버린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서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나의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나의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나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신학적 관점]
본문은 예수의 신성을 뜻하는 ‘에고 에이미’로 시작한다.(‘나는 나다’ 출 3:14)
삼위일체신학은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됨을 말하는 교리신학 언어이다. 이는 논리와 이성에 갇힌 차가운 교리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 구원을 위한 신-인간학 언어이다. 본문은 열매맺기를 위해 농부(하느님)와 포도나무(예수 그리스도)와 가지(인간)의 하나됨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삼위일체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성령은 물과 햇빛이 된다.
[목회적 관점]
열매를 자기 기준으로 생각하기 쉽다. 교회에 분열을 가져오면서도 자신의 믿음을 정당화하는 경우가 많다. 하느님의 의가 화해를 통한 일치라면 사람이 찾는 의는 자기 의일 경우가 많다. 대체로 잘려 나가는 마른 가지는 나무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진 가지들이다.
남한의 기독교인 중 가나안 교인이 최소 이백만 명이라고 한다. 이들은 예수의 포도나무에서 잘려 나간 가지인가? 아니면 여전히 나무에 붙어 있는가? 이는 그 열매에 따라 결정이 될 것이다. 그러면 열매는 무엇인가? 열매에 대한 해석은 사람에 따라 다 다르다. 본문은 그 기준을 ‘아버지의 영광’에 두고 있다.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이란 먼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무엇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가 하는 질문은 하느님 대신에 부모님을 넣어보면 좀 더 쉽게 판단이 될 것이다.
[주석적 관점]
13장에서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긴 다음 저녁식사 중 유다가 예수의 곁을 떠나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14-17장은 제자들을 향한 예수의 고별설교이다. 본문의 마른 가지는 유다를 의미한다.
3절의 ‘너희에게 말한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는 말은 세족을 뜻할 수 있다. 공동번역은 그 뜻이 보다 분명하다. “너희는 내 교훈을 받아 이미 잘 가꾸어진 가지들이다.”
‘머무르다’(menein)는 단어는 제2성서에서 118번 나오는데, 요한복음에만 67번 나온다. 이는 ‘하나됨’ 혹은 ‘일치’를 뜻하는 영지주의적 비밀 표상 언어이다.
제1성서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사 5:1-6, 호 10:1 등)
[설교적 관점]
열매는 인간 존재의 변화인가? 아니면 전도나 선교와 같은 어떤 가시적인 것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본문에 이어지는 16절에서는 열매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 하늘나라에서의 썩지 않을 열매는 쉽게 생각할 수 있으나 세상 안에서 썩지 않을 열매는 그 해석이 쉽지 않다.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9가지 열매일까?(갈 5:22, 사랑, 기쁨, 평화...) 본문에 이어지는 17절은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 그렇다면 세상 안에서의 썩지 않을 열매는 ‘서로 사랑함이다!’ 그러나 사랑은 막연하고 대상은 넓다. 예수는 사랑의 대상을 구체화시킨다. “가장 작은 자의 필요에 응하는 것이라고.”(마 25장)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한’(ㅎ ㆍㄴ)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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