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정과/설교 자료

2024년 부활절 설교 자료

ree610 2024. 3. 26. 14:03

 

부활절 설교 자료(2024년 3월 31일, 부활절)  

글쓴이 : 조헌정 목사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고, 여기에 필자의 한국 목회 20년, 미국 목회 20년의 경험과 신학이 반영되어 있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겸하였다. 그러나 교단별로 창조절 적용 구간이 다르기에 사순절과 같이 성령강림절 기간을 7주(50일)로 하고 그 이후부터 창조절로 부른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주일 본문]
사 25:6-9; 시 118:1-2; 14-24; 행 10:34-43; 요 20:1-18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이사야 25:6-9

6   만군의 주께서 이 세상 모든 민족을 여기 시온산으로 부르셔서, 풍성한 잔치를 베푸실 것이다. 기름진 것들과 오래된 포도주, 제일 좋은 살코기와 잘 익은 포도주로 잔치를 베푸실 것이다.
7   또 주께서 이 산에서 모든 백성이 걸친 수의를 찢어서 벗기시고, 모든 민족이 입은 수의를 벗겨서 없애실 것이다.
8   주께서 죽음을 영원히 멸하신다. 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말끔히 닦아 주신다. 그의 백성이 온 세상에서 당한 수치를 없애 주신다. 이것은 주께서 하신 말씀이다.
9   그 날이 오면,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할 것이다. 바로 이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바로 이분이 주님이시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한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으니 기뻐하며 즐거워하자.

[신학적 관점]

제2성서에서 부활은 일차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을 의미하며 나아가 마지막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몸의 부활을 의미한다. 집단적인 이해보다는 개인적인 이해가 앞선다.

반면 본문은 바빌론의 포로로 붙잡혀 있는 상태를 수의를 입고 있는 민족의 죽음으로 말하고 이어 제국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죽음이 없는 부활로 노래한다.(8절) 그런데 본문은 유다 한 민족만을 말하지 않고 모든 (약소) 민족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9절) 온전한 세계 평화를 노래하고 있다.

[목회적 관점]

오늘날 건강과 장수가 하느님의 축복으로 이해되면서 ‘죽음’은 금지어가 되었다. 의사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은 말기암 환자의 경우라 하더라도 목사들이 병상에서 죽음을 언급하는 일은 쉽지 않다. 마지막 순간까지 기적적인 치료 회복을 위해 기도한다. 결국 환자는 죽음을 부정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고 말하지만, ‘죽음’을 말하지 않고 어찌 부활을 얘기할 수 있을까? 필자는 매년 성회수요일을 맞이하면서 유언장을 나눠주고 이를 사순절기간동안 목회실에 제출하도록 하고 이는 사망시까지 비밀보장을 하도록 하였다. 물론 설교를 통해 이를 자주 언급하였다.  

[주석적 관점]

이사야서 24-27장은 마지막 때에 의인들의 승리를 노래하는 “이사야의 묵시록”이라 불린다. 주석가들은 586 BCE 예루살렘 멸망 이후 후대 편집가들에 의해 삽입된 것으로 본다.

모세 시대의 히브리족의 시내산 축제(출 24:9-11)가 모든 민족의 축제로 확대되었다.

[설교적 관점]

현대인에게 받아들이긴 힘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이라는 기적 사건에 강조를 둠으로 인해 부활에 관한 집단적이고 사회역사적인 관점이 너무 약화되어 있다. 몸의 부활과 함께 본문이 말하는 세계 평화의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시편 118:1-2, 14-24

1   야훼께 감사노래 불러라, 그는 어지시다. 그의 사랑 영원하시다.
2   이스라엘 문중아, 노래 불러라. "그의 사랑 영원하시다."
14   야훼는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이시다.
15   의로운 사람들의 집집에서 터져 나오는 저 승리의 함성. "야훼의 오른손이 힘을 떨치셨다!
16   야훼의 오른손이 번쩍 들렸다! 야훼의 오른손이 힘을 떨치셨다!"
17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야훼께서 하신 일을 널리 선포하리라.
18   야훼께서는 나를 벌하시고 또 벌하셨지만 그러나 죽게 버려두지는 아니하셨다.
19   정의의 문을 열어라. 내가 들어가 야훼께 감사기도 드리리라.
20   이것이 야훼의 문, 의인들이 이리로 들어가리라.
21   나의 기도 들으시고 나를 구해 주셨으니 주님께 감사기도 드립니다.
22   집짓는 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23   우리 눈에는 놀라운 일 야훼께서 하신 일이다.
24   이 날은 야훼께서 내신 날, 다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자.

사도행전 10:34-43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않는 분이시고,
35   그분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어느 민족에 속해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3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을 보내셨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주님이십니다.
37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이 일은, 요한의 세례 활동이 끝난 뒤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 지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38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께 성령과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 예수께서는 두루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행하시고, 악마에게 억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39   우리는 예수께서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나무에 달아 죽였지만,
40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흘째 되는 날에 살리시고, 나타나 보이게 해주셨습니다.
41   그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택하여 주신 증인인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와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42   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자기를 살아 있는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의 심판자로 정하신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하셨습니다.
43   이 예수를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하기를,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신학적 관점]

예수 부활 사건은 단순히 생(生)과 사(死)라는 개인의 영역에 속하는 사건이 아니라, 인간 세계가 구별해 놓은 모든 경계를 부수는 우주적인 개벽 사건이다.

베드로는 예수를 만나 크게 두 번 생각을 바꿔야 했다. 첫째는 하느님의 보냄을 받은 메시야는 십자가에 매어 달리는 죽임을 당하여서는 결코 안되었다.(막 8:27-33) 이 때문에 그는 스승 예수로부터 ‘사탄’이라 불린다. 이후 그는 스승 예수의 죽음을 피해 달아났다가 부활 예수를 만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깨달았다. 부활 예수를 만나긴 했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는 옛 관습에 매여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할례를 받지 않는 이방인은 결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가 욥바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에, 하늘의 환상을 통해 모세 율법이 정한 깨끗함(유대인)과 더러움(이방인)의 구분이 잘못된 생각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로마 백부장인 고넬료의 집을 찾아가 오늘의 얘기를 전한다. 하느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목회적 관점]

예수 부활 사건은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나의 경계 혹은 안전지대(comfort zone)를 부수지 않고 어떻게 예수 부활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부수어야 할 깨끗함과 더러움의 경계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주석적 관점]

초대교회 교인들은 부활 예수께서 왜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시지 않았을까?(41절) 하는 의문을 갖고 있었다. 바울은 이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가 되시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죄사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증언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답한다.(41-42절)

[설교적 관점]

하느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어떠한가? 말씨가 다르다고 조선족 사람들을 차별하고 얼굴색이 조금 검다고 동남아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장애인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예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죄사함은 곧 성령으로 거듭난 삶을 의미한다. 죄사함을 받은 사람,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사람이 누군가를 정죄하는 일은 타당한 일인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는 일은 율법에 어긋나는 유대인 동료들로부터 비난받는 일이었다. 백부장인 고넬료 또한 로마법에 의해 처형당한 갈릴리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를 집으로 초청하는 일 또한 로마인 동료들로부터 비난받을 일이었다. 성령은 서로가 서로의 안전지대를 벗어나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만남을 일어나도록 만드신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거룩하심이 드러난다. 보통 부활절에 세례를 베푼다. 베드로는 고넬료 집안에 모인 사람들이 성령의 언어를 말하자 저들에게 세례를 베푼다. 로마인이 유대 변방 갈릴리 어부 출신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것을 오늘날의 상황에 비춘다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통해 이룩하시고자 하는 바는 이 땅의 ‘평화’였다.(8절) 부활 이후에도 이 목적은 같다. 오히려 이를 더욱 공고히 하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금 일으키셨다.(re-surrect)  

요한복음 20:1-18

1   주간의 첫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 문을 막은 돌이 이미 옮겨져 있었다.
2   그러므로 그 여자는 뛰어서,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로 가서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무덤으로 갔다.
4   둘이 함께 뛰었는데,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뛰어서, 먼저 무덤에 이르렀다.
5   그는 몸을 굽혀서 고운 베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으나,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그를 뒤따라와서,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고운 베가 놓여 있었고,
7   예수의 머리를 쌌던 수건은 그 고운 베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한 곳에 따로 개켜 있었다.
8   그제서야 먼저 무덤에 다다른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9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10   그 제자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11   그런데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울다가 몸을 굽혀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 머리맡에 있었고, 또 한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여인아, 왜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하였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에, 마리아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분이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
15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여보세요, 당신이 그분을 옮겨 갔거든, 어디에다 두셨는지를 말해 주십시오. 내가 그분을 모시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가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부니!" 하고 불렀다. (그것은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너는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내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내가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18   막달라 사람 마리아는, 자기가 주를 보았다는 것과, 주께서 자기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서 전하였다.

[신학적 관점]

예수의 부활은 육체성을 지닌 몸의 부활을 강조한다. 후에 도마는 직접 못자국과 창자국을 만져본다. 그런데 왜 마리아에게는 이것이 허락되지 않았는가? 성차별이 아니라면, 아버지께 먼저 다녀와야 한다는 신학적인 의미는 무엇인가?(17절) 덧붙여 도마가 예수의 몸을 만져볼 당시 예수는 닫힌 문을 열지 않고 벽을 통과하여 들어오신다.(19절) 예수 부활의 몸에 대한 영성과 육체성의 동시성은 인간 이성으로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신의 초월성이라는 단어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요한복음은 부활의 첫 증인으로 공관복음서에서와 같이 여러 여인들이 아닌 막달라 마리아 혼자이다. 십자가 죽음 현장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를 포함하여 네 명의 여인이 함께 있었다.(요 19:25) 그런데 왜 부활 장면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만을 드러내는 것인가? 신학적인 의도는 무엇인가? 베드로와 ‘사랑하시는 제자’는 이 마리아를 통해 예수 부활의 소식을 듣고 무덤을 찾아가지만, 빈무덤을 보고도 아직 부활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8절에서의 저들이 보고 믿었다고 하면서도 9절에서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활에 대한 사실로서의 믿음과 (마리아가 경험하는) 실존으로서의 믿음의 차이를 말하는 것인가?

[목회적 관점]

도마가 예수의 손과 발에 있는 못자국과 허리에 나 있는 창자국을 직접 손으로 만져 확인했다는 증언은 예수 몸의 부활의 사실성을 인정하는 긍정 효과도 되지만, 다음과 같은 부정적인 질문도 생긴다. 우리 또한 부활을 하게 되면 우리 몸에 있는 수술의 흔적들은 복원이 되지 않고 그대로 남는 것인가? 다리가 잘린 장애인은 다리가 잘린 채로 팔이 없는 장애인은 팔이 없는 상태로 부활하는 것인가? 신성모독에 해당할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참수형을 당한 사람은 어떻게 부활하는 것인가? 물론 부활은 바울의 주장과 같이 세상에서의 몸이 하나의 씨앗이라면 부활은 하나의 열매이기에 씨의 안목으로 그 열매를 추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주석적 관점]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다른 제자’는 먼저 무덤에 도착했고 벗겨진 베옷을 통해 예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보았으나 베드로를 기다렸다가 그가 먼저 들어가고 나서 들어간다. 이는 수제자 베드로에 대한 예의인가? 둘 사이의 경쟁 관계는 복음서 끝까지 이어진다.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부활 예수는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고 마리아는 이에 ‘라보니’로 대답한다. 마리아는 처음 동산지기로 착각한다. 그런데 음성을 듣자 예수인 것을 알아챈다. 선한 양의 비유에서 양은 그 목소리를 듣고 목자는 그 양의 이름을 부른다.(요 10:3) ‘사랑하시는 그 제자’의 후보군 가운데 마리아 또한 포함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일까? 그의 정체성이 누구이든지 분명한 것은 요한 저자는 1세기 말의 여러 예수따르미 공동체들 가운데 요한공동체야 말로 예수께서 진정 ‘사랑하시는 공동체(the Beloved Community)’임을 말하고 있다.

[설교적 관점]

오늘 모든 목사들이 설교 단상에서 반복해서 말하는 단어가 하나 있다. 그건 ‘몸의 부활’이라는 단어이다. 여기서 말하는 몸은 무엇인가? 우리가 ‘몸’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의학에서 말하듯이 살과 뼈와 내장으로 구성된 생명체인가? 아니면 생물학에서 말하듯이, 수십억 년 전 원초적 생명체와 연결되어 있는 진화의 고리인가? 아니면, 물리학에서 말하듯이, 138억 년동안 진행 중인 우주 빅뱅 폭발의 파편들인 세포들의 집합체인가? 아니면 신학에서 말하듯, 하느님의 형상을 띤 타자와 구별되는 개별화된 인격체인가? 아니면 어느 미학자가 말하듯이 “몸이란 가없는 시공간의 응축된 세계의 ‘마디’인가?(김동규 『멜랑콜리아』 22쪽) 게다가 복음서의 저자들마다 예수 부활에 대한 그 해석이 조금씩 달라 그리 만만치가 않다.

누가는 엠마오를 내려가다가 떡을 뗄 때, 함께 한 나그네가 부활 예수임을 알아차린다.(24:35) 곧 초대교회에서의 공동체의 나눔으로서의 성찬을 강조한다. 반면 마태복음은 갈릴리에서의 지상선교명령에 방점이 있다. 그런데 가장 먼저 쓰인 마가복음은 빈 무덤 이야기를 통해 부활 예수를 만나려거든 갈릴리로 오라는 것인데, 이는 결국 예수께서 하셨던 갈릴리 하느님 나라 운동을 계속 이어가라는 얘기이다.(마태복음 또한 이를 강조한다) 이 얘기를 듣고 두려움에 떨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여성 제자들에 관한 증언은 여기에 일치한다. 왜냐하면 예수를 따라 갈릴리에서 하느님 나라 운동을 이어가는 것은 결국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가가 이해하는 부활은 부당한 죽임을 당한 스승 예수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역사 진실 운동을 하라는 것이다.

부활은 사실로서 증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질문을 만들어 내기에 부활은 복음의 핵심인 하느님 나라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천국과 영생이라는 개인/종교적 관점이 아닌 하느님 나라라는 사회/역사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옳다. 이사야서의 세계 평화의 관점과 사도행전에서의 사회적 경계를 허무는 두 본문과 함께 연계하여 설교하는 것이 필요하다. 부활 anastasis라는 헬라어 단어 문자적 뜻은 ‘다시 일어선다’는 말이다.(부사 ava는 ‘두 번.’ ‘위로부터,’ ‘새로 나다’)의 다양한 의미가 있다. 참고 요한 3:3) 지금 우리는 영생에 방점을 두고 해석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저항의 의미로 읽혔다.(비교. insurrection 반란)

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말한다. “고통 그 자체는 아무 의미도 없다. 고통을 없애려고 투쟁할   때에만 고통은 의미가 있다.” 십자가 죽음의 사건을 부활 승리의 사건으로 고백하려면 우리가 먼저 십자가의 사건에 동참해야 하는 것이지, 십자가만 바라보고 입으로 부활을 믿습니다라고 노래한다고 해서 우리의 부활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죽은 시체가 살아났다는 말이 아니라 그를 기억하는 제자들 가운데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능력의 영으로 희망의 영으로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단테가 쓴 ‘신곡’의 지옥문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그렇다면 부활의 영이 들어가는 천국문에는 이렇게 씌어 있을 것이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너희 자신이 곧 희망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몸, 곧 그 살과 피를 우리로 하여금 나누어 먹도록 부탁하신 것은 바로 자신이 국가폭력으로 인해 살해당했던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이고, 그리고 오늘의 갈릴리의 현장으로 가서 억눌린 사람들 편에 서서 역사의 진실을 밝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