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 설교자료(2024년 3월 24일, 종려주일)
글쓴이 : 조헌정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고, 여기에 필자의 한국 목회 20년, 미국 목회 20년의 경험과 신학이 반영되어 있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겸하였다. 그러나 교단별로 창조절 적용 구간이 다르기에 사순절과 같이 성령강림절 기간을 7주(50일)로 하고 그 이후부터 창조절로 부른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 성탄절, 부활절은 내용을 가리키지만, 사순절은 기간을 가리킨다. 사순절은 의미로 보나 정확성으로 보나 적절한 용어는 아니다.
나는 왜 사순절 대신 저항절이라 부르는가. 예수가 저항하지 않았다면, 예수는 고난받지도 않았을 것이고, 처형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수는 불의한 세력에 저항하였기 때문에 고통받았다. 예수는 수동적으로 고난받은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예수는 조용히 살다가 처형된게 아니다. 기도하다가, 성서공부하다가, 예배 참석하다가 처형된게 아니다. 저항했기에 처형되었다. 사순절 단어는 예수의 저항을 외면하고 있다. 예수 고난보다 예수 저항을 더 생각하고 따르는 시기다.(가톨릭 성서학자 김근수)
[주일 본문]
사 50:4-9a; 시 31:9-16; 빌 2:5-11; 막 14:1-15:47(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이사야 50:4-9a
4 주 하나님께서 나를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셔서, 지친 사람을 말로 격려할 수 있게 하신다. 아침마다 나를 깨우쳐 주신다. 내 귀를 깨우치시어 학자처럼 알아듣게 하신다.
5 주 하나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셨으므로, 나는 주께 거역하지도 않았고,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
6 나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고, 내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겼다. 내게 침을 뱉고 나를 모욕하여도 내가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니, 그들이 나를 모욕하여도 마음 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냈다.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겠다는 것을 내가 아는 까닭은,
8 나를 의롭다 하신 분이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나와 다투겠는가! 함께 법정에 나서 보자. 나를 고소할 자가 누구냐? 나를 고발할 자가 있으면 하게 하여라.
9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실 것이니, 그 누가 나에게 죄가 있다 하겠느냐?
[신학적 관점]
제2이사야에서 네 개의 ‘고난받는 종의 시(노래)’ 중 세 번째 시이다. 고난받는 주체는 개인으로서의 공동체이다. 사랑하는 종의 고통은 주인의 고통이기도 하다. 종은 주인에게 속한 자이다. 히브리족속의 특이한 점이라면 애굽에서 불러낸 신의 음성에 항상 귀를 기울려야 한다(5절)는 것이다. 곧 십계명의 서두에서 강조한바, 역사의 주인으로서의 해방의 신임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바빌론포로생활을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잔혹한 현실에 매여 자유와 해방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에 속했지만, 동시에 세상과는 다른 길로 부름을 받은 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론(eccleciology)의 기본이다. 개인에게 있어서나 공동체에 있어서나 ‘고난’이 신앙의 중심이 되는 운명이다.
[목회적 관점]
목회자는 외롭다. 자신을 변명할 수가 없다. 변명은 곧 공동체에 속한 사람 중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때리는 자에게 등을 맡겨야 하고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겨야 한다.(6절) 이는 예언자로서의 목회자의 숙명이자 (누군가에게는) 특권이 된다.(8절) 목회자는 호렙산 정상의 꺼지지 않는 가시덤불 불을 바라보는 자이자, 신발을 벗고 거룩한 곳에 서 있는 자이다.
[주석적 관점]
고난받는 종이 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인가? 본문은 ‘학자(學者)’로 번역했는데, ‘선생(先生)’이 보다 적합한 번역이다. 우리 말에서 학자는 학문에 집중함으로 현실참여가 부족한 사람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예언자와는 동떨어진 어휘이다. 여기서 선생은 귀를 열어 신의 음성을 듣고 자신이 깨달은 바를 학생(백성)과 함께 나누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지식전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과 함께 고난의 삶을 살아가면서 행동으로 본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상황 주석으로 본다면 본문은 오늘날 강대국의 패권(군사력)의 힘에 의해 바빌론포로와 같은 상황에 처한 백성들을 향한 말씀이다. 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와 한강토의 백성들을 향한 말씀이다.
[설교적 관점]
보통은 종려주일로 지키지만, 올해는 고난의 종이 강조된다. 고난은 부활의 승리를 위한 디딤돌이다. 과거 중세기독교는 지배자의 편에 서서 고난 자체를 미화하고 순종을 강조했다. 이는 부조리로 가득 찬 현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하느님의 종으로서의 고난받음은 지배자의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불씨가 되어야 한다. 곧 저항이다.
가까운 역사에서 고난받는 저항의 종으로서 역사변혁을 이끌어 온 사람을 말하자면,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멘달라 대통령, 흑인민권운동의 로자 팍 여사와 말틴 루터 킹목사, 그리고 김대중대통령과 문익환목사 등이다.
시편 31:9-16
9 야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괴롭습니다. 울다 지쳐 눈은 몽롱하고 목이 타며 애간장이 끊어집니다.
10 괴로와서 숨이 넘어갈 것 같으며 한숨으로 세월을 보냅니다. 더 견딜 수 없이 기운은 다하였고 뼈 마디마디가 녹아납니다.
11 나는 원수들의 모욕거리, 이웃들의 혐오거리, 벗들의 구역질감, 거리에서 만나는 이마다 피해 갑니다.
12 죽은 사람처럼 기억에서 사라지고 쓰레기처럼 버려졌사옵니다.
13 사람들의 비방소리 들려 오며 협박은 사방에서 미쳐 옵니다. 그들은 나를 노려 무리짓고 이 목숨 없애려고 음모합니다.
14 야훼여, 나는 당신만을 믿사옵니다. 당신만이 내 하느님이시라 고백하며
15 나의 앞날을 당신의 손에 맡기오니, 악을 쓰는 원수들의 손에서 이 몸을 건져 주소서.
16 나는 당신의 종이오니 웃는 얼굴을 보여 주소서. 한결같은 사랑으로 이 몸을 구하소서.
빌립보서 2:5-11
5 여러분은 이런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여 주신 태도입니다.
6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이들 모두가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11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신학적 관점]
6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의 모습(morphe)’으로서의 ‘동등함’은 존재론적으로 본질에 있어 하나인가 그렇지 않은가에 관하여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안과의 예수의 신성 논쟁의 소지가 된다. 오늘날 천주교와 동방정교와 개신교의 신학 차이가 성만찬에 관한 해석뿐만이 아니라 이 구절에 대한 해석에서 드러난다.
삼위일체 논쟁의 배경에는 종교적 이유보다는 정치적 이유가 더 컸다. 로마제국을 보다 쉽게 통치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하나됨이 중요했던 콘스탄티누스황제는 이 회의를 소집하고 모든 경비를 댔다. 본래는 아리우스파가 더 많았지만, 정치적 이유로 말미암아 아타나시우스파가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다. 이로써 동방정교회와의 분리가 시작되었다. 교리는 교회의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 중요하긴 하지만, 이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모양이 되어 수많은 분파를 형성하는 원인이 된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신격화는 세계기독교왕국 건설의 동기가 되어 서구기독교제국들은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대륙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저들의 고유한 종교전통을 모두 이단시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 꿇지’(8절) 않는 수많은 원주민을 학살하는 만행이 행해졌다. 홀로코스트의 반유대주의 또한 이에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이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을 크게 저하시키고 있다. 헬라철학에 기초한 사변(思辨)적인 교리 논쟁의 폐해는 아직도 이웃종교를 이단시 여기는 잘못을 낳고 있다. 자기 오만으로 가득 찬 교리화된 기독교는 결국 생명구원이 아닌 생명경시로 귀결되고 만다.
본문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으로서의 케노시스(kenosis, 자기 비움)에 강조가 있었던 예배문이었다. 곧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자기 부정과 겸손으로서의 하나됨을 강조하는 신앙고백이 결과적으로는 차별의 근거를 제공하는 성서구절로 변하고 만 것이다. 옥중의 바울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이다.
[목회적 관점]
겸손 혹은 겸양은 개인에게 있어서는 미덕이 될 수 있지만, 사회 집단에 있어서는 불의한 구조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 성차별, 빈부차별, 계급차별, 인종차별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강자에게 겸손을 강조하는 것은 말이 되지만, 차별받는 약자에게 겸손을 요구하는 것은 부조리한 현실에 눈을 감으라는 얘기가 되기에 이는 정의의 하느님께는 죄악이 된다.
[주석적 관점]
일부 성서번역에서는 ‘태도(態度)’가 아닌 ‘마음’으로 번역을 했다. 태도는 외면을 강조하기에 적절하지 않아 보이긴 하지만, 어쩌면 태도는 내면을 포함한 실천행동을 담고 있어 내면만을 뜻하는 ‘마음’보다 보다 나아 보이기도 한다. 바울이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공동체의 하나됨이었다. 마음은 개인의 영역에 속한다.
[설교적 관점]
바울의 하느님의 동격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바르트가 얘기한 것처럼 교리적인 이유가 아닌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자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 언어였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인 케노시스는 잘못하면 억압과 차별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집단적인 케노시스는 억압과 차별을 해체하는 해방자의 역할을 감당한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찬양이자 신앙고백으로 시(詩)의 형태를 지녔음을 기억하자. 시의 제목을 오늘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갈릴리의 해방자 예수를 향한 민중들의 합창인 ‘호산나!’로 붙일 수 있을 것이다.
마가복음 14:1-15:47
1 유월절과 무교절 이틀 전이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흉계를 꾸며서 예수를 죽일까' 하고 궁리하고 있었다.
2 그런데 그들은 "백성이 소동을 일으키면 안 되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고 말하였다.
3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한센병으로 고생하던 환자 시몬의 집에 머무실 때에,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는데, 한 여자가 매우 값진 순수한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4 그런데 몇몇 사람이 화를 내면서 자기들끼리 말하기를 "어찌하여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서,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 하였다. 그러고는 그 여자를 나무랐다.
6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가만두어라. 왜 그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
7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으니, 언제든지 너희가 하려고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8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곧 내 몸에 향유를 부어서, 내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미리 한 셈이다.
9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10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넘겨 줄 마음을 품고, 그들을 찾아갔다.
11 그들은 유다의 말을 듣고서 기뻐하여, 그에게 은돈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를 넘겨 줄 적당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2 무교절 첫째 날에, 곧 유월절 양을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가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드시게 준비하려 하는데 어디에다 하기를 바라십니까?"
13 예수께서 제자 두 사람을 보내시며 말씀하셨다.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그러면 물동이를 메고 오는 사람을 만날 것이니, 그를 따라가거라.
14 그리고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가서, 그 집 주인에게 말하기를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내 사랑방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십니다' 하여라.
15 그러면 그 사람이 자리를 깔아서 준비한 큰 다락방을 너희에게 보여 줄 것이니, 거기에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를 하여라."
16 제자들이 떠나서, 성안으로 들어가서 보니,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유월절을 준비하였다.
17 저녁때가 되어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와 함께 가셨다.
18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고 있는 사람이 나를 넘겨 줄 것이다."
19 그들은 근심에 싸여 "나는 아니지요?" 하고 예수께 말하기 시작하였다.
20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그는 열둘 가운데 하나로서, 나와 함께 같은 대접에 빵을 적시고 있는 사람이다.
21 인자는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대로 떠나가지만, 인자를 넘겨주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았을 것이다."
22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것은 내 몸이다."
23 또 잔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은 모두 그 잔을 마셨다.
24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25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것을 마실 그날까지, 나는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을 것이다."
26 그들은 찬송을 부르고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
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목자를 칠 것이니, 양 떼가 흩어질 것이다' 하였기 때문이다.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뒤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다."
29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모두가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30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밤에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31 그러나 베드로는 힘주어서 말하였다. "내가 선생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절대로 선생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나머지 모두도 그렇게 말하였다.
32 그들은 겟세마네라고 하는 곳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예수께서는 두려워하며, 괴로워하셨다.
34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서 깨어 있어라."
35 그러고서 조금 나아가서 땅에 엎드려서, 될 수만 있으면 이 시간이 자기에게서 비껴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36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37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
38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39 예수께서 다시 떠나가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 다시 와서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들은 졸려서 눈을 뜰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할지를 몰랐다.
41 예수께서 세 번째 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남은 시간을 자고 쉬어라. 그 정도면 넉넉하다. 때가 왔다. 보아라, 인자는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42 일어나서 가자. 보아라, 나를 넘겨줄 자가 가까이 왔다."
43 그런데 곧, 예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왔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그와 함께 왔다.
44 그런데, 예수를 넘겨줄 자가 그들에게 신호를 짜주기를 "내가 입을 맞추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잡아서 단단히 끌고 가시오" 하고 말해 놓았다.
45 유다가 와서, 예수께로 곧 다가가서 "랍비님!" 하고 말하고서, 입을 맞추었다.
46 그러자 그들은 예수께 손을 대어 잡았다.
47 그런데 곁에 서 있던 이들 가운데서 어느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내리쳐서, 그 귀를 잘라 버렸다.
48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너희는 강도에게 하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49 내가 날마다 성전에 너희와 함께 있으면서 가르치고 있었건만 너희는 잡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 말씀을 이루려는 것이다."
50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
51 그런데 어떤 젊은이가 맨몸에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니,
52 그는 홑이불을 버리고, 맨몸으로 달아났다.
53 그들은 예수를 대제사장에게로 끌고 갔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54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를 뒤따라 대제사장의 집 안마당에까지 들어갔다. 그는 하인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
55 대제사장들과 온 의회가 예수를 사형에 처하려고, 그를 고소할 증거를 찾았으나, 찾아내지 못하였다.
56 예수에게 불리하게 거짓으로 증언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지만, 그들의 증언은 서로 들어맞지 않았다.
57 더러는 일어나서, 그에게 불리하게, 거짓으로 증언하여 말하기를
58 "우리가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내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허물고, 손으로 짓지 않은 다른 성전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 하였습니다."
59 그러나 그들의 증언도 서로 들어맞지 않았다.
60 그래서 대제사장이 한가운데서 일어서서, 예수께 물었다. "이 사람들이 그대에게 불리하게 증언하는데도, 아무 답변도 하지 않소?"
61 그러나 예수께서는 입을 다무시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대제사장이 예수께 묻기를 "그대는 찬양을 받으실 분의 아들 그리스도요?" 하였다.
62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바로 그이요. 당신들은 인자가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
63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고 말하였다.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인들이 더 필요하겠소?
64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예수는 사형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정죄하였다.
65 그들 가운데서 더러는, 달려들어 예수께 침을 뱉고,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고 하면서 "알아맞추어 보아라" 하고 놀려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하인들은 예수를 손바닥으로 쳤다.
66 베드로가 안뜰 아래쪽에 있는데, 대제사장의 하녀 가운데 하나가 와서,
67 베드로가 불을 쬐고 있는 것을 보고, 그를 빤히 노려보고서 말하였다. "당신도 저 나사렛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이지요?"
68 그러나 베드로는 부인하여 말하기를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다" 하였다. 그리고 그는 바깥 뜰로 나갔다.
69 그 하녀가 그를 보고서, 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 말하기를 "이 사람은 예수와 한패입니다" 하였다.
70 그러나 그는 다시 부인하였다. 조금 뒤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갈릴리 사람이니까 틀림없이 그들과 한패일 거요."
71 그러나 베드로는 저주하고 맹세하여 말하기를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였다.
72 그러자 곧 닭이 두 번째 울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그 말씀이 생각나서, 엎드려서 울었다.
1 새벽에 곧 대제사장들이 장로들과 율법학자들과 더불어 회의를 열었는데 그것은 전체 의회였다. 그들은 예수를 결박하고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었다.
2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께 물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그러자 예수께서는 빌라도에게 "당신이 그렇게 말하였소" 하고 말씀하셨다.
3 대제사장들은 여러 가지로 예수를 고발하였다.
4 빌라도는 다시 예수께 물어 말하였다. "당신은 아무 답변도 하지 않소? 사람들이 얼마나 여러 가지로 당신을 고발하는지 보시오."
5 그러나 예수께서는 더이상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빌라도는 이상하게 여겼다.
6 그런데 빌라도는 명절 때마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죄수 하나를 놓아 주곤 하였다.
7 그런데 폭동 때에 살인을 한 폭도들과 함께 바라바라고 하는 사람이 갇혀 있었다.
8 그래서 무리가 올라가서, 자기들에게 해주던 관례대로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9 빌라도가 말하기를 "여러분은 내가 그 유대인의 왕을 여러분에게 놓아 주기를 바라는 거요?" 하였다.
10 그는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시기하여 넘겨주었음을 알았던 것이다.
11 그러나 대제사장들은 무리를 선동하여, 차라리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청하게 하였다.
12 빌라도는 다시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러면, 당신들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그 사람을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13 그들은 다시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14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정말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소?" 그들은 더욱 크게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15 그리하여 빌라도는 무리를 만족시켜 주려고,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을 한 뒤에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넘겨 주었다.
16 군인들이 예수를 뜰 안으로 끌고 갔다. 그 곳은 총독 공관이었다. 그들은 온 부대를 집합시켰다.
17 그런 다음에 그들은 예수께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서 머리에 씌운 뒤에
18 "유대인의 왕 만세!" 하면서, 저마다 인사하였다.
19 또 갈대로 예수의 머리를 치고, 침을 뱉고, 무릎을 꿇어서 그에게 경배하였다.
20 이렇게 예수를 희롱한 다음에, 그들은 자색 옷을 벗기고, 그의 옷을 도로 입혔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갔다.
21 그런데 어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길에, 그 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로서,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다. 그들은 그에게 강제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다.
22 그들은 예수를 골고다라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골고다는 번역하면 '해골 곳'이다.)
23 그들은 몰약을 탄 포도주를 예수께 드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받지 않으셨다.
24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는데, 제비를 뽑아서, 누가 무엇을 차지할지를 결정하였다.
25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때는, 아침 아홉 시였다.
26 그의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혀 있었다.
27 그들은 예수와 함께 강도 두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하나는 그의 오른쪽에, 하나는 그의 왼쪽에 달았다. (28절 없음)
29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면서, 예수를 모욕하며 말하기를 "아하!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30 자기나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너라!" 하였다.
31 대제사장들도 율법학자들과 함께 그렇게 조롱하면서 말하기를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보고 믿게 하여라!" 하였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도 그를 욕하였다.
33 낮 열두 시가 되었을 때에,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34 세 시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그것은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뜻이다.
35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몇이, 이 말을 듣고서 말하기를 "보시오, 그가 엘리야를 부르고 있소" 하였다.
36 어떤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을 신 포도주에 푹 적셔서 갈대에 꿰어, 그에게 마시게 하며 말하기를 "어디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두고 봅시다" 하였다.
37 예수께서는 큰소리를 지르시고서 숨지셨다.
38 (그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39 예수를 마주 보고 서 있는 백부장이, 예수께서 이와 같이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서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하고 말하였다.
40 여자들도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막달라 출신 마리아도 있고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도 있고 살로메도 있었다.
41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예수를 따라다니며 섬기던 여자들이었다. 그 밖에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이 많이 있었다.
42 이미 날이 저물었는데, 그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었다. 아리마대 사람인 요셉이 왔다.
43 그는 명망 있는 의회 의원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대담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청하였다.
44 빌라도는 예수가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여, 백부장을 불러서, 예수가 죽은 지 오래되었는지를 물어 보았다.
45 빌라도는 백부장에게 알아보고 나서, 시체를 요셉에게 내어주었다.
46 요셉은 고운 베를 사 가지고 와서, 예수의 시신을 내려다가 그 고운 베로 싸서, 바위를 깎아서 만든 무덤에 그를 모시고, 무덤 입구에 돌을 굴려 막아 놓았다.
47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어디에 그가 안장되는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신학적 관점]
시간상으로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향한 하루의 이야기이지만, 신학적으로느ᅟᅳᆫ 너무나 많은 주제를 담고 있어 한두 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다.
구원사의 관점에서 보면 ‘성전 휘장이 두쪽으로 찢어졌다’는 구절을 통해 하느님과의 직접 소통이 가능한 구원론을 얘기할 수 있지만, 이는 오래된 사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후대의 해석이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라는 성전체제를 유지하는 종교기득권자들이 예수 죽음의 책임자로 등장을 하고 빌라도는 그 책임을 면하는 것으로 나와 있어 예수 죽음의 책임을 종교지도자들로 말하지만, 사도신조에서는 오히려 빌라도의 책임을 묻고 있어 정치적 대결로 말한다. 십자가는 로마의 지배에 저항하고 독립을 쟁취하려는 정치범들을 사형시키는 제도였다. 십자가 처형의 목적은 죄수들이 오랜 기간 극심한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형수들은 마을 언덕 위에서 여러 날 동안 낮에는 뜨거운 태양열 아래에서 밤에는 차가운 광야 바람 속에서 까마귀와 들개들에게 살점을 뜯기우며 죽어갔다. 저들의 처참한 모습과 고통에 찬 신음소리는 마을 사람들에게 큰 공포를 안기웠다. 보통 사형수들은 3일에서 일주일간에 걸려 죽어갔다. 27절의 예수의 양옆에서 처형을 당한 두 강도(lestai) 또한 독립투쟁가를 말한다.
마가복음서가 기록된 시기는 바로 유대독립전쟁 직후였다. 로마가 유대민족 혹은 유대교를 철저히 핍박하던 시기였다. 예루살렘 성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도록 철저히 불태우고 파괴했고 군대를 주둔시켜 더이상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저자 마가는 예수운동이 갖는 로마제국과의 대결이라는 사회정치적인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예수 죽음은 유대인들의 시기로 인한 종교갈등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었다.
[목회적 관점]
보통 남성들이 여성들에 비해 용맹함이 뛰어나다고 말하지만, 본문은 정반대이다. 예수의 죽음 앞에서 수제자 베드로를 비롯한 남성들은 모두 예수를 부인하거나 도망을 친 반면 여인들은 예수의 주위에 머물러 있다. 교회 일을 할 때에도 남성들은 주요 직책을 맡지만, 실제 일을 하는 경우는 여성들이다. 이제는 여성들의 지도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이에 합당한 직임을 주어야 한다.
[주석적 관점]
14장 62절의 대제사장의 ‘네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 하는 질문에 ‘내가 바로 그이요’(ego eimi, I am)은 히브리어로 YHWH(I am that I am, 출 3:14)가 된다. 이에 대제사장은 매우 분노하여 이를 신성모독죄로 여긴다. 요한복음에서는 7번 등장한다.
명절에 죄수 한 명을 풀어준다는 전통은 역사 문헌에서는 증명이 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반란을 꾀했던 죄수의 두목 바나바를 풀어준다는 것은 맞지 않다.
15장 13절의 ‘물동이를 메고 오는 그 사람’은 누구인가? 제자들도 알지 못했던 다락방을 준비했던 그 사람은 누구인가? 오래 전 예루살렘 여행가이드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남성들은 우물가에 가거나 물동이를 메지 않았다고 한다. 예수가 남성들로 구성된 에세네파에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라는 것이다.
가룟 유다의 본래 헬라어 명칭은 Iscariot Judas이다. 왜 헬라어로나 영어로 명명된 ‘이스카리옷’이 한국어에서 갑자기 앞의 두 철자가 생략이 된 ‘가룟’으로 번역이 되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이스카리옷이 출신 지방을 말한다고 하지만, 성서에 이런 이름으로 된 지방은 없다. 제자들의 경우 보통 과거 직업이나 배경을 뜻하는 단어들이 이름 앞에 붙는다. 세리 마태, 열혈당원 시몬 등이다. 독립투쟁을 하던 열혈당원(젤롯당) 가운데 과격한 폭력을 사용하는 시카리(Sicarii)파가 있었다. 시카리는 단검을 말한다. 이들은 소매 속에 단검을 숨기고 축제가 진행되는 동안 군중들 속에 숨어 있다 로마에게 협력했던 매국노들을 처단하고 군중 속으로 피하는 사람들이다. 서구신학자들은 이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요세푸스 또한 유대전쟁사에서 독립투쟁가들을 LESTAI라고 부른다. 이를 강도로 번역하는 것은 잘못이다. 따라서 가룟유다의 배반은 돈이 탐나서라기 보다는(그는 재정을 담당한 회계였다. 노예 한명 값에 예수를 팔았다는 것은 돈 때문만이 아니었다) 예수와 함께 민중폭력을 통한 유다의 독립을 원했던 그는 예수가 마지막 순간 십자가 죽음을 선택하는 것에 대한 불만으로 배반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해석이다.
[설교적 관점]
본문이 담고 있는 내용이 너무 다양하여 모든 내용을 다 담을 수는 없을 것이다. 고난주간을 앞두고 가능하면 십자가 죽음이 갖고 있는 역사적 예수의 관점에서 설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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