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정과/설교 자료

부활절 4째주 설교 자료

ree610 2024. 4. 16. 22:50

교회력 설교 자료(4월 21일, 부활절 4주)  

글쓴이 : 조헌정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고, 여기에 필자의 한국 목회 20년, 미국 목회 20년의 경험과 신학이 반영되어 있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겸하였다.
그러나 교단별로 창조절 적용 구간이 다르기에 사순절과 같이 성령강림절 기간을 7주(50일)로 하고 그 이후부터 창조절로 부른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본문]
  행 4:5-12; 시 23 편; 요일 3:16-24; 요 10:11-18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사도행전 4:5-12}

5   이튿날 유대의 지도자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를 비롯해서,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그 밖에 대제사장의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7   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 세워 놓고서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 하고 물었다.
8   그 때에 베드로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들에게 말하였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장로 여러분,
9   우리가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과, 또 그가 누구의 힘으로 낫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라면,
10   여러분 모두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
11   이 예수는 '너희, 집 짓는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은 돌이지만,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12   예수 밖에는, 다른 어떤 이에게서도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이름은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들 가운데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는 달리 없습니다.“

[신학적 관점]

12절(예수 밖에는, 다른 어떤 이에게서도 구원은 없습니다.)은 우리나라와 같은 다종교 사회에서는 가장 논란이 되는 구절이다. 문자적으로 읽을 때, 이웃종교에는 구원이 없다는 선언이 되고, 이는 지난 세기 서구기독교국가들이 아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대륙에서 저질러 온 힘에 기반한 제국적 선교신학의 잘못을 반복하게 한다.

상황신학적으로 답할 수밖에 없다. 이 발언은 이천 년 전 유대인이었던 베드로가 유대교 안에서 자신들을 박해했던 유대교 지도자들을 향한 예수신앙고백이지 세계종교지도자모임에서 발언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들 가운데’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유대인들을 뜻하지, 세계 모든 사람을 총칭하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가 고백하는 ‘오직 예수만’으로의 구원이 그 당시에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먼저 묻고 이를 다른 문화권에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베드로가 말하는 예수 구원은 한마디로 말해 ‘집 짓는 사람들’(유대교)이 버린(십자가죽음) 돌이 하느님 나라 새역사의 ‘머릿돌’이 되는 곧 꼴찌가 첫째가 되는 민중 주체의 역사변혁으로서의 예수 구원론이다. 베드로는 이미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는’(요 1:46)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행 3:6)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켰다. 따라서 당시 유대인들이 로마의 식민지로 있었던 상황을 간주하여 볼 때, 오늘날에는 종교적인 의미로 변한 ‘구원’이라는 단어 대신에 ‘해방’이라는 단어로 번역함이 타당하다.

[목회적 관점]

베드로와 요한은 갈릴리 어부 출신으로 예수와 함께 했던 불온한 죄인으로 심문을 받고 있다. 그들 앞에는 당시 모든 권력을 손안에 쥐고 있던 유대 교권주의자(산헤드린)들이 앉아 있다. 마치 예수의 빌라도 법정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몇 주 전과는 달리 예수 부활의 성령에 붙잡혀 완전히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주석적 관점]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함에 있어 11절에서는 “모퉁이의 머릿(돌)”(kephalen gonias, head of corner, 참조 시 118:22)이라 말하는데 반해 에베소서 2:20과 벧전 2:6에는 그냥 ‘모퉁잇돌’(acrogoniaiou, cornerstone)로 번역되어 있다. 사각형의 돌집은 네 모퉁이의 돌이 모두 머릿돌이 됨으로 한옥에 익숙한 독자들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모퉁이의 머릿돌’ 혹은 그냥 ‘머릿돌’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설교적 관점]

본문은 누가공동체가 처한 ADE 90년경의 로마제국의 핍박 아래에서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두 가지 서로 다른 접근 방식으로 설교를 펼쳐갈 수 있다. 첫째, 교인들은 이 구절을 읽을 때, 누구나 자신을 베드로와 같은 약자의 위치에 놓고 성서를 읽는다. 그렇다면 그때 떠오르는 교권주의자들은 누구인가?

둘째, 오늘날 남한사회는 기독교가 주류가 되어 있기에 넓은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자신을 약자 베드로가 아닌 교권주의 혹은 기득권자들에 비유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이때 사회적으로 손가락질 받는 오늘날의 베드로는 누구인가? 세월호 피해 가족 등 아픔을 딛고 정의와 평등이 실현되는 새로운 사회를 꿈꾸며 투쟁하는 민중들이 될 것이다.

시 23 편

1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2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3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4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5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부어 내 머리에 발라 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6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요한1서 3:16-24}

16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17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나 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 머물겠습니까?
18   자녀 여러분, 우리는 말로나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19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서 났음을 우리는 알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20   우리가 마음에 가책을 받는 일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21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마음에 가책을 받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요,
22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받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23   이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24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그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압니다.

[신학적 관점]

요한1서 공동체는 요한복음에 익숙하다. 새세대를 위한 하나의 해설서와 같다. 본문은 요한복음의 핵심구절인 1장 14절의 ‘화육사상’과 3장 16절의 ‘하느님의 세상 사랑’에 대한 상황주석(eisgesis)이며 17장의 압축이다. 특히 22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나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의 의미를 풀어쓰고 있다. 곧 ‘하나됨’의 의미는 ‘내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에 있다. 사랑은 추상적 언어가 아니라, 삶의 매 순간 실현되어야 하는 실천적 언어이다.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삶과 죽음 자체가 이웃을 살리기 위한 ‘자기희생’이었기 때문이다. 신학은 논리(말)와 비판(혀)을 넘어 실천(행함과 진실함)이 목적이다.(18절)

[목회적 관점]

누구나 잘못을 범한다. 바울은 그래서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죄책 고백은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은 약하다. 잘못하면 과거에 저지른 죄책감에 눌려 회개만 외치다 제 자리에 머무는 무력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아마도 요한1서 공동체 안에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20절) 그래서 저자는 하느님의 용서를 확신하고(19절) 사랑을 베푸는 담대한 사람(21절)으로 거듭날 것을 강조한다.

[주석적 관점]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서 났음을 우리는 알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19절)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초입부의 조건 부사, ‘이렇게 함으로써’이다. ‘이렇게 믿음으로써’가 아니다. 물론 이는 잘못하면 펠라기우스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이는 저자가 의도하는 바가 아니다.

본문의 결론에 해당하는 24절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 안에 ‘머뭄’을 강조하는데, 이는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의 상황주석이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8절) “...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9절) “... 내 사랑 안에 머물게 될 것이다.”(10절)

[설교적 관점]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나의 구원을 위함이다. 그런데 이 구원은 지상세계를 떠나 천상세계로 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시키셨듯이 이를 믿는 우리 또한 우리 자매형제를 위해 우리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가끔 위험한 순간 자신의 안위를 따지지 않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위험에 뛰어드는 사람들을 본다. 이는 판단 이전의 찰나(刹那)의 행위이다. 믿음이란 내가 섰다 할 때 넘어질까 조심하며 꾸준히 앞을 향해 나아가는 행위이지만, 결국 구원은 찰나에 완성이 된다. 며칠 전 오랜 기간 청소원으로 일하던 한 나이 많은 여인이 유언장에 자신의 전 재산 오천만 원을 사회에 기부하고 돌아가셨다는 미담을 들었다. 아마도 쓰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참으며 돈을 모았을 것이다. 그의 삶은 남 보기에는 힘든 삶이었지만, 내면에는 남을 돕는다고 하는 기쁨으로 차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 애를 쓸 때는 스트레스와 짜증이 일어나지만, 남을 돕는 것을 상상할 때는 아드레날린이 서서히 올라오는 것을 경험한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 15:13)

요한복음 10:11-18

11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자기의 것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가 양들을 물어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14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내 양을 알고, 내 양은 나를 안다.
15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
16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이끌어 와야 한다. 그들도 내 음성을 들을 것이며, 한 목자 아래에서 한 무리 양 떼가 될 것이다.
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그것은 내가 목숨을 다시 얻으려고 내 목숨을 버리기 때문이다.
18   아무도 내게서 내 목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원해서 내 목숨을 버린다.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이것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명령이다.“

[신학적 관점]

신학적으로 보면 요한복음의 핵심 신학인 ‘에고에이미’ 기독론과 교단 차이를 극복하는(‘무리에 속하지 않은’) 하나의 교회론(catholic church)까지 언급하고 있다.

유대교는 희생제물을 통한 죄씻음의 용서가 성전제사의 근본이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 또한 희생제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하면 인간 예수를 양이나 비둘기와 같은 제물과 동일시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곧 결말이 이미 예정된 운명성과 피동성만이 강조된다. 그리하여 본문은 예수를 희생제물로 보는 십자가 희생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이는 정해진 운명에 따른 어쩔 수 없는 길이 아니라, 예수의 자유로운 결단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17절) 그런데 이러한 선택의 결단을 하느님의 ‘명령’으로(18절) 명명하는데, 이는 논리적인 모순이다. 왜냐하면 명령은 두 가지 선택 중에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할 때, 쓰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선택 자체가 명령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쩌면 우리는 아들의 뜻이 아버지의 뜻과 온전히 일치하는 폴 틸리히의 theonomy(신율)의 단계를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저자 요한은 공관복음서 저자와의 차이를 드러낸다. 곧 공관복음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에서는 아들의 뜻과 아버지의 뜻이 다르기 때문이다.

[목회적 관점]

선한 목자는 양을 알고 양 또한 목자를 안다. 직접 경험을 통해 쓴 필립 켈러의 『Psalm 23』에 의하면 목자는 200마리의 양을 우리에서 집어넣거나 밖으로 내어올 때, 한 명 한 명 양들의 이름을 부른다고 한다. 교회의 크기는 어느 만큼이 적절할까? 담임목사가 양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닐까? 켈러에 의하면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지을 때, 그 양이 갖고 있는 약점을 갖고 이름을 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름을 알뿐만 아니라 저들의 삶의 형편을 아는 만큼이 적절한 교회의 크기라고 말할 수 있다. 80년대 유명한 일화이다. 대형교회로 급성장한 서울 강남의 한 담임목사가 교회 근처의 한 주유소에 주유를 하러 갔다가 주인에게 전도를 하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자기 교회의 신임 집사였다.

소와 양의 차이: 소는 뒤에서 소리를 치고 그 주위를 돌면서 채찍을 휘두르면 우두머리를 따라 앞으로 달려간다. 반면 양은 뒤에서 소리를 치면 사방으로 흩어지고 만다. 그래서 소 떼와 달리 양 떼는 목자가 앞에서 이끌고 가야 한다. 양은 목자와의 신뢰가 바탕이다. 프로그램에 의한 목회는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주석적 관점]

목자와 양의 관계는 오늘날 현대교회에서의 목사와 교인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은 타당한가? 반드시 그렇지 않다.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관점에서는 타당하지만, 양은 목자에게 모든 것을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는 맞지 않다.

16절.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이끌어 와야 한다.” 다른 양들은 누구인가? 요한복음 저자는 공관복음서를 알고 있고, 저들의 공동체 또한 알고 있다. 저자 요한은 자신들의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충실한 공동체임을 자각하지만, 동시에 유아독존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준다. 흔히 교리의 차이가 있을 때, 다른 교단 혹은 교파를 이단(異端)이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서양교단들이 교단 일치를 향해 나아가지만, 한국교회는 여전히 분파주의에 휩싸여 있다. 장로교단만도 200개 교단이 넘는다. 한국교회의 분파주의는 서양선교사들이 자신의 편의에 따라 선교지역을 구분한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기장(Christ Presbyterian)과 예장(Jesus Presbyterian)의 분열을 가져 온 대구총회는 평양신학교를 대체하기 위해 김재준목사가 설립한 조선신학교를 인수하기 위한 미국선교사들의 농간에 기인한다. 김재준목사를 자유신학자로 몰아 이단으로 처리한 안건에 대한 찬반 표차는 6표에 불과했는데, 그날 참석한 미국선교사 총대 숫자가 25명을 넘었다. 조선인에 의한 자주적인 조선교회를 주창한 김재준목사는 당시 남한 전체 장로교 목사들의 70% 이상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때는 전쟁 중이라 멀리 떨어진 지역의 총대들은 대구까지 올 교통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미국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차는 물론 미군 지프차를 이용하여 자신들을 지지하는 총대들만을 집중적으로 실어 날랐다. 이로써 미국은 한강토를 남북으로 갈랐을 뿐만 아니라, 남쪽의 교회마저 이리저리 갈라놓았다.

[설교적 관점]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와의 차이는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재미작가 김은국의 장편소설 『순교자』(殉敎者, The Martyred)를 떠올리게 한다. 한국전쟁에 직접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엄청난 반전(反轉)이 숨어 있는 이 소설 이야기를 주제로 설교를 엮어나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오늘의 역사에서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친 목자는 누구인가: 엘살바도르의 로메로 대주교, 말틴루터 킹목사, 문익환목사 등이 있다.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ㅎㆍㄴ’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