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신경림의 '목계장터' 시비를 만남

ree610 2024. 5. 23. 18:16

지하철 동대역 6번출구 앞에서 노천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동국대 영문과 졸업한 신경림의  목계장터  시비를 만난다. 윤동주 시비가 연대 교정 밖 신촌  로터리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계장터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 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5일장 아흐레 나흘이란 말도 좋고 우리 엄니도 바르셨던 박가 분이란 말도 정겹다. 고향이 詩지 억지 아름다움이 詩겠는가? 잔 돌처럼 넘겨야 하는데 아직도 난 뾰족 돌인 것 같다. 아직 철이 들지 못했다.  

가난한 사랑노래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서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 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가난할수록 사랑은 꿈같은 이야기가 된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젠 그것이 생활이 되었다. ‘저항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실존주의가 명제가 이성간 사랑이 아니면 사랑은 가난과 관계없다는 생각을 내려앉게 한다.

가난한 충청도 촌놈 신경림을 꼬드겨서 서울이 좋다고 데려온 시인 김관식(1934~1970)의 유혹이 있었기에 신경림은 동대영문과도 졸업하고 이런 시를 남긴 것 아닐까...

자신을 믿고 서울 와서 늘 빈곤에 시달리는 신경림이 안쓰러웠는지 김관식은 예총에 가서 예총회장에게 ‘내가 이제 예총회장을 할 것이고 당신은 나가라 하자 예총 사무총장이 와서 그의 소란을 막자 자신이 예총회장이기에 사무총장을 파면한다고 하며 신경림을 사무총장으로 임명하겠다는 호기가 찐하니 좋다.

김관식은 1960년대 초, 월탄 박종화가 문학상 시상에 참가하여 축사를 길게 하자 박종화 면전에서 "어이, 박군 자네 이야기가 너무 길어. 나도 한마디 하겠으니 이제 그만 내려오지."라 큰 소리로 외쳤다.

박종화와는 나이 차이 물론 등단 햇수도 30년 이상 차이가 났는데도 이리 행동을 한 것. 대선배들에게는 오만방자했고 스므살 손위 동서인 시인 서정주에게 서군 난 서군이 한 짓을 알고 있지 하며 술 마시며 도발했던 그는  후배 시인들에게는 예의 있었고 자상했다는 요즘 보기 드문 전설이 내려온다.

‘괜히 왔다 간다’ 란 중광묘비에 <괜히> 란 말이 허무로 들리지 않고 괜히 찐하게 들린다.

명동에 돈 키오테 시인 김관식은 서정주의 처제와 결혼했다. 김관식의 행동은 돌아이로 회자되었다. 그의 언어는 자유와 배짱 그 자체였다. 그는 문단 선배들이게 서군 김군이라고 호칭했다.  그가 명동에 나오면 명동 예술인들은 둘로 나누어진다. 김관식과 어울리고 싶은 소수의 문인과 김관식을 피하는 다수의 문인들이었다.

36살 짧은 생을 사는 동안 김수영과 이봉구 천상병 조태일 등 자유로운 문인들은 그를 이해했고 이제는 우리가 그를 이해한다. 죽기 전날 홍은동 집에서 매달아 놓은 찌그러진 술 주전자를 바라보면서 그는 ‘저 놈이 날 죽었다’라고 하였다.

김관식은 61년 7월 민의원 선거 때 장면에게 맞서 서울 용산 갑구에 출마했다.  상대후보는 장면이었다. 무능한 군고무마 장면,  4.19가 민중과 학생들의 혁명인데 장면 같은 인간들이 그 열매를 독식한다고 생각했다. 촛불 혁명 이후와 비슷하다.

당연 선거는 졌고 김관식은 빚을 지고 집도 없게 된다. 그러자 그는 홍은동 산꼭대기 정착해 10년을 산다.  국유지 600여 평을 들어가 무허가로 집을 지었다 .서정주가 뭐하냐고 묻자 건설업을 한다고 말하는  호탕한 인물이었다.

집이 무허가라 헐리자 그는 ‘나라 땅이 백성 땅인데 시유지·국유지가 어디 있느냐’고 말했다. 사람들을 불러 모아 터를 닦고 집을 지었다. 관에서  허물면 김관식은 다시 짓고 또 허물면 또 짓고 이렇게 여덟 번째 집이 허물어지자 그는 아홉 번째  짓고 그는 지붕 위로 올라가 경찰관들을 향해 허물 테면 허물어 보라고 큰 소리를 질렀다.

마침내 경찰관들이 손을 들고 말았다. 경찰관들이 철수하자 김관식은 '내가 장면 정권에 이겼다!'고 환호하며 사람들을 모두 불러  잔치를 벌였다

그의 지은 집들에 시인들이 모였다. 시인 백시걸도 홍은동 산동네 식구가 되었고 충주 살던 신경림도 김관식의 권유로 이곳에 정착했다. 그리고 문인들이 모여 하늘을 벗 삼아 술을 마셨다. 천상병 고은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김관식의 이 무허가 집들로 인해 신경림의 ‘산동네에 오는 눈’과 ‘산1번지’가 나왔다.

신경림- 산동네에 오는 눈

하늘에서 제일 가까운 동네라서
눈도 제일 먼저 온다
깁고 꿰매고 때워 누더기가 된
골목과 누게 막과 구멍가게 위에
눈은 쌓이고 또 쌓인다

때로는 슬레이트 지붕 밑을 기웃대고
비닐로 가린 창틀을 서성대며
남 볼세라 사랑 놀음에 얼굴도 붉히지만
때와 땀에 찌든 얘기

피멍 든 노래가 제 가슴 밑에서
먹구렁이처럼 꿈틀대는 것도 눈은 안다
이 나라의 온갖 잘난 것들 모여들어

서로 찢고 발기고
마침내 저네들 발붙이고 사는
땅덩이마저 넝마로 만든
장안의 휘황한 불빛을 비웃으면서

눈은 내리고 또 내린다
하늘에서 제일 가까운 동네라서
눈도 제일 오래 온다

신경림- 산1번지

해가 지기 전에 산 일번지에는
바람이 찾아온다.
집집마다 지붕으로 덮은 루핑을 날리고

문을 바른 신문지를 찢고
불행한 사람들의 얼굴에
돌 모래를 끼어 얹는다.

해가 지면 산 일번지에는

청솔가지 타는 연기가 깔린다.
나라의 은혜를 입지 못한 사내들은
서로 속이고 목을 조르고 마침내는
칼을 들고 피를 흘리는데

정거장을 향해 비탈길을 굴러가는
가난이 싫어진 아낙네의 치맛자락에
연기가 붙어 흐늘댄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산 일번지에는
통곡이 온다. 모두 함께
죽어버리자고 복어 알을 구해 온
어버이는 술이 취해 뉘우치고
애비 없는 애를 밴 처녀는

산벼랑을 찾아가 몸을 던진다.
그리하여 산 일번지에 밤이 오면
대밋 벌을 거쳐 온 강바람은
뒷산에 와 부딪쳐
모든 사람들의 울음이 되어 쏟아진다.

김관식 시인이  명동 술자리에서 젊은 시인들에게 한 말이 찡하다. ‘나는 날마나 한미우호관계로 밤을 지내면 잔다. 왜냐면 미국 밀가루 포대를 엮어 이불을 만들어 잠자기 때문이다’

ㅡ 지승룡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