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동학농민혁명대상 수상 소감] 글쓴이: 이만열(전 국사편찬위원장, 숙명여대 명예교수)

ree610 2024. 5. 12. 13:08

[20240511 동학농민혁명대상 수상 소감]

글쓴이:  이만열(전 국사편찬위원장, 숙명여대 명예교수)

동학농민혁명 대상을 수상하게 되어 송구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매우 기쁩니다. 어느 상보다도 보람되고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상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이라는 가슴 뛰게 하는 역사적 이름으로 주는 상이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제게 상을 결정해 주신 심사위원회와 정읍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상은 제 1회에 김대중 대통령께 수여된 이래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연구와 그 기림에 힘쓴 많은 선배들께 수여되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때 해직교수로서 고난을 같이 겪은 송기숙 교수께서 수상한 바 있어서 더욱 감회가 깊습니다.

이 고장에서 130년 전, 人乃天 天心卽人心 사상을 기반으로 부패한 조선 봉건 사회를 혁파하고 民草 중심의 새로운 大同社會를 일으키겠다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 동학농민혁명은 국내의 봉건부패세력을 혁파할 뿐아니라 이들과 끈끈하게 연계되어 있던 외세에 대한 전면적인 투쟁이기도 했습니다. 1차 봉기에서 반봉건을 내세웠던 혁명세력은 일본이 경복궁을 점거하고 국권에 危害를 가하려고 할 때 反外勢, 斥洋斥倭의 기치를 과감하게 내세우게 되었습니다. 호남지역 뿐아니라 전국적인 호응을 얻었고 南接 뿐만 아니라 北接도 연합하게 되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그 뒤 3.1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고, 해방 후에는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으로 계승, 한국의 자주독립과 민주정의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해방 후 제 역사적 위치를 쉽게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 군사정권과 전두환 파쇼정권이, 자기들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지고, 접근해 왔습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 동학농민혁명은 正名을 갖기 시작했고 1980년대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쳐 1990년대에 들어서서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가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전문연구자 향토사학자들이 농민혁명참여자들의 후손을 찾기 시작했고,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에는 그 유족회가 결성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후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2004년에 ‘동학특별법’이 제정된 것은, 제게 이 자리에 서게 된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저는 2004년에 제정된「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에 따라 발족된 국무총리 산하 기구인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그 유족의 결정 및 등록에 관한 사항 등의 업무를 관장하는 ‘결정 및 등록심사분과위원회’ 위원장을 5년간(2005~2010) 맡았습니다. 물론 그 때 제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직책을 맡아 있었기 때문에 주어진 행운이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지금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 수고하시는 이병규 박사 등 여러 학인들의 도움을 받아 신청 유족 10,567분을 결정․등록하고, 동학농민혁명 관련 자료를 꼼꼼히 살펴 당시 유족신청을 하지 않았던 3,146분에게도 참여자로 발굴해 냄으로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그 유족에 대해 실질적인 명예회복의 기회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5년 동안 동역했던 위원들과 도와주셨던 학인들께 감사드립니다.

세계에는 인류가 함께 기억하고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에 해당하는 많은 기록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18종의 고문서와 근현대 기록물들이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2015년부터 <동학농민혁명기록물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위원회>를 따로 조직하고 8년간(2015~2023) 그 책임을 부족한 제게 맡겨주셨습니다. 등재 추진 과정에서 여러 애로가 있었습니다. 특기할 것은 일본이 자국 기록물에 포함되는 조선공사관기록을 빼달라는 부당한 요청도 난관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을 극복해가면서 여러 추진위원들의 지혜와 인내, 국내외 관계당국의 협조로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을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에 등재(2023.5.24.)하여 세계가 기억하고 보존해야할 인류의 유산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정읍시를 비롯한 동학농민혁명의 횃불을 올린 지역민들의 성원과 구천의 영령들께서 음우하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고 감사드립니다.

제 수상소감을 끝내면서 특별히 念願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점을 공유하여 우리 세대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선진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선진들이 아직도 항일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을 반봉건․반외세로 규정하는데 그 외세는 바로 일본을 가리킵니다. 동학농민혁명 제 1차 봉기는 분명히 국내봉건부패세력에 대한 반봉건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 해 4월에 전주성을 점령하고 5월 전주화약으로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물러나고 집강소가 설치, 일종의 자치를 수행합니다. 이 때 봉건정부는 袁世凱를 통해 淸에 군사 파견을 요청했고, 天津條約에 의해 일본도 군대를 한국에 파견합니다. 6월 21일 일본군은 경복궁을 침입, 대원군 정권을 수립하고 청일전쟁을 일으켰습니다. 朝日攻守同盟이 강제로 체결되었고 8월에는 평양 전투에서 淸軍이 대패했습니다. 그러자 동학농민군은 9월에 일본군 축출을 목적으로 재봉기했습니다. 동학농민군 2차 봉기는 일본을 물리친다는 斥倭의 기치하에 이뤄졌습니다. 일본군 타도를 목적으로 재봉기, 북상한 동학농민군은 10월 말 11월 초 公州 접전에서 대패했습니다.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는 일본군의 국권침탈에 저항해 국권을 수호하려는 항일독립전쟁의 성격을 띄고 있었습니다. 제 2차 봉기가 항일전쟁이긴 했지만 아직껏 항일독립운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독립유공자공적심위원회에서는 동학농민군의 제 2차 봉기에 앞서 8월에 일어난 항일의병운동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동학농민군의 항일전쟁에 앞서 일어난 항일의병이 국가를 수호하려 했다 하여 독립유공자로 서훈해야 한다면, 같은 봉건국가를 개혁하고 또 일제로부터 나라를 보호해야 한다고 기치를 든 동학농민혁명군의 지도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은 1894년 일본의 경복궁 유린에 대항하여 봉기한 제2차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을 '항일운동'으로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제2차 동학농민혁명전쟁이 항일독립운동의 시작입니다. '독립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도 이에 맞추어 개정, 2차 동학농민혁명의 주역인 전봉준 장군과 최시형 선생을 먼저 독립유공자로 서훈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동학농민혁명 제 130주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자리에서 정읍시민의 뒤한 뜻을 담아 부족한 제게 대상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이 영예를 고이 간직토록 하겠습니다. 상금으로 주신 정읍시민의 정성이 담긴 이 거금은,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바로 연구하고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그 후손을 한 사람이라도 더 발굴하는 일에 더 값있게 사용되도록 동학농민혁명재단에 기증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동학농민혁명 제 130주년이 되는 2024년 5월 11일, 이만열 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