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심문]
‘유도신문’과 ‘유도심문’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 표현일까?
학생들에게 ‘신문(訊問)’과 ‘심문(審問)’의 차이를 아느냐고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한 채 한동안 민망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이 어색한 적막을 깨트리고 한 학생이 기막힌 대답을 하였다. “신문은 News paper이고 심문은 무엇을 묻는 말입니다.”
‘신문(訊問)’을 ‘신문(新聞)’으로 오해한 것이다. ‘신문’과 ‘심문’의 차이를 이해하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신문’과 ‘심문’의 결정적 차이는 주체의 대상이다. 신문의 ‘신(訊)’은 ‘물을 신’이다. ‘신문’은 사건의 실체나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신문하는 자에 의해 통제되는 조건에서 행해지는 직접적인 질문의 방법으로서 검찰이나 경찰 등의 수사기관이 범죄를 밝히기 위해 캐어묻는 질문이다.
그러므로 ‘피의자 신문’이나 ‘참고인 신문’ ‘유도신문’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심문의 ‘심(審)’은 ‘살필 심’이다. ‘심문’은 당사자에게 진술할 기회를 주고 ‘심사’를 한다는 의미로서 행위의 주체가 법원이나 판사들이다. 구속의 적법 여부를 결정하는 ‘구속 적부심(拘束適否審)’은 판사의 ‘심문’을 통해 이루어지는 절차이다. 그러므로 신문의 경우는 주체가 수사기관이고 심문의 경우는 법원이며, 형식에 있어서 신문은 문답식이며 심문은 진술이다.
또한 내용에 있어서 신문이 수사를 위한 것이라면 심문은 권리나 기회의 부여에 있다.
한자를 배우지 않는 세대이다 보니 구어체의 회화는 가능하여도 문어체의 문장 독해와 문리에는 문해력이 턱없이 부족하여 한자를 사용하지 않고는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가 매우 어렵다.
어느 날 파주시의 적성으로 도반들과 함께 답사를 나간 적이 있다. 운행 도중에 ‘어유지리’라는 한글 이정표를 보고 내가 이곳은 예전에 큰 연못이나 호수가 있는 동네였을 것이라고 말하였더니, 일행이 그렇게 추정하는 근거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어유지리’의 어는, 물고기 ‘어(魚)’ 자일 것이고 유는 놀다라는 뜻의 ‘유(遊)’ 자일 것이며 지는 연못 ‘지(池)’ 자일 것이니 물고기가 노니는 큰 연못이 있던 마을이 아니겠냐고 추정하였던 것인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내 말이 옳았다.
일제에 의해 지명 표기가 잘못된 것이 도처에 산재해 있지만, 대개는 그 의미조차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개성(開城)으로 가기 전 마지막 역이 ‘도라산역’이다. 남북이 화해 무드일 때는 종종 TV에서 남한의 마지막 종착지인 도라산역의 간판이 비치곤 하였는데, 이때 간판의 한자 표기가 도라산역(都羅山驛)으로 쓰여있었다. 그러나 도라산역의 ‘도(都)’ 자는 도읍 도자가 아닌 볼 ‘도(覩)’ 자의 오기이다.
이 지명이 생기게 된 배경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투항하면서 개성에 입성하기 전, 이 산에서 마지막으로 ‘신라를 향해 돌아보았다’라는 일화가 후대에 전해지면서 ‘도라산(覩羅山)’ 또는 ‘도라산(睹羅山)’이라고 불렀던 것인데, 일제에 의한 지적 사업의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경기도 광명에는 ‘철산동(鐵山洞)’ 이라는 동네가 있는데, 이 지명에도 웃지 못할 일화가 있다. 철산이라는 지명처럼 이곳엔 무슨 광산이 있는 동네가 아니다.
원래의 한글 지명은 소의 꼴을 먹이기 좋은 고을이라는 ‘쇠메골’이었다. ‘소고기’를 ‘쇠고기’로 발음하였던 과거 우리의 관습대로 한자로 표기하자면 ‘우산리(牛山里)’가 되어야 하는데 ‘쇠’를 ‘소(牛)’가 아니 ‘쇠(鐵)’로 오해하여 빚어진 촌극이다.
‘인자무적(仁者無敵)’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십중팔구는 ‘인한 자에게는 적이 없다’라고 대답한다. 대개의 사람이 ‘착하고 어진 자에게는 적이 없다’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여기에서의 ‘적(敵’)은 ‘enemy’의 뜻이 아니라 ‘match’의 뜻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인(仁)’에는 필적할 만한 것이 없다”라는 뜻으로 인(仁)의 가치가 가장 위대한 덕성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소동파의 문하에 6명의 철인이 있었는데 이를 ‘소문육군자(蘇門六君子)’라 하였다. 이 가운데 이방숙(李方叔)을 일러 ‘만인적(萬人敵)’이라 하였다. 만인적이란 만인의 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만인을 필적할 만한 사람 곧 혼자서 많은 적군과 대항할 만한 지혜와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군대에서 조기 전역하는 일을 ‘의가사제대’라 하는데 이때 ‘의가’를 ‘의가(醫暇)’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병의 치료를 목적으로 전역을 하는 경우는 ‘의병 제대(依病除隊)’라 하고, 개인의 가정 사정으로 인하여 전역하는 경우는 ‘의가사 제대(依家事除隊)’이다.
이 밖에도 ‘폐소공포증(閉所恐怖症)’을 폐쇄공포증(閉鎖恐怖症)으로 잘못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폐소공포증은 창문이 작거나 없는 밀실에서 느끼는 공포의 증상으로 밀실 공포를 말한다. ‘폐쇄(閉鎖)’는 어떤 곳을 닫아버린다는 뜻이고, ‘폐소(閉所)’는 닫힌 장소 자체를 뜻한다. 그러므로 ‘폐소공포증(閉所恐怖症)’이라야 옳다.
또 뇌졸증(腦卒症)이 아니라 ‘뇌졸중(腦卒中)’이라야 맞다. 뇌의 갑작스러운 혈액순환 장애로 말미암은 증상으로서 뇌가 졸도하여 중풍을 일으킨다는 의미이다.
염치 불구나 체면 불구는 모두 잘못된 표현이다.
‘염치 불고’ ‘체면 불고’가 옳은 표현이다. ‘불구(不拘)’는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뜻이고 ‘불고(不顧)’는 돌아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염치를 돌아보지 않고, 체면을 돌아보지 않고라고 할 때는 ‘불고(不顧)’가 옳은 표현이다.
간혹 ‘내일 산수갑산을 가더라도’라고 하는 표현을 보게 되는데 이는 ‘삼수갑산(三水甲山)’의 오기이다.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은 함경도에 있는 오지이다. 매우 혹독한 지역의 유배지로서 아주 힘든 상황을 가정할 때 쓰게 되는 표현이다.
누군가 ‘심심한 사과를 표한다’라고 하니 요즘 학생들은 무슨 사과를 그따위로 하느냐며, 조소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었다. 한자를 배우지 않은 학생 입장에서는 ‘심심하다’라고 하는 말이 하는 일이 없어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는 의미로 느꼈을 것이니, 진정성 있는 사죄의 표현으로 느꼈을 리가 만무하다. 그러나 한자어의 심심(甚深)이란 앞의 ‘심(甚)’은 ‘매우’, ‘몹시’라는 부사이고 뒤의 ‘심(深)’은 ‘깊다’라는 형용사이다. 마음의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하다는 의미이다.
한자도 역사도 배우지 않는 시대에
누구를 탓할 것이 있겠는가?
- 霞田 박황희 교수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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