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민 지식인과 동학
- 백승종 -
올해는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 선생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자연히 여기저기서 동학에 관해 많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바보새 함석헌(咸錫憲, 1901-1989) 선생으로 말하면, 평소에 동학을 따로 힘주어 말씀한 적은 없었으나 실지로는 누구보다도 동학의 정신적 유산을 소중하게 여기셨다고 생각합니다. ‘씨ᄋᆞᆯ’ 사상이야말로 최제우와 그 뒤를 이어 동학을 이끈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 선생의 가르침과 혼연일체가 아닌가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저의 억지 주장이 아닙니다. 동학의 큰 스승님들과 마찬가지로 함 선생님은 진정한 “평민지식인”이셨어요. 그리고 그분들은 세상의 모든 평민이 스스로 깨우쳐, 관계의 본질적인 전환을 하게 되기를 꿈꾸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함 선생님이야말로 실은 동학혁명의 진정한 계승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오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귀중한 지면을 빌려, 두 가지 이야기를 간단히 해보고 싶습니다. 하나는 바로 ‘평민지식인’이란 누구이고, 우리 역사 속에서 어떻게 자라왔는지를 간단히 살펴보는 것입니다. 수운과 해월 및 바보새의 역사적 뿌리를 더듬는 작업이라고 보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스승님들 특히 동학의 큰 물길을 튼 수운과 해월이 추구한 ‘자주적 근대화’의 본질을 검토할까 합니다. 읽어보시면 알게 되시겠습니다마는 바보새 함 선생님도 실은 군국주의자와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싸우실 때 동학의 스승들과 일맥상통하는 근대화를 꿈꾸셨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평민지식인의 소원
조선 후기가 되자 기득권층인 양반이 아니라 “평민지식인”이 역사적으로 훨씬 더 의미심장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이루고자 하였더란 말씀입니다. 양반들이야 자기네의 특권을 보장하는 조선이란 왕조가 망하기를 바랐을 턱이 없지요. 그들은 백성이야 어찌 되든지 자기가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소망이었지요. 그들의 불만이란 고작해야 반대 당파를 조정에서 쫓아내고 싶은데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정도였지요. 나라가 망하는 것을 바랐을 리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평민지식인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양반들이 이끌어온 조선이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사라지기를 염원했습니다.
역사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만 설명을 붙여보겠습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본래 두 가지 상반된 성격을 가집니다. 한편으로 훌륭한 지식은 사방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고, 무수히 복사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고급 지식은 소수의 특권층이 영원히 독점하려는 경향도 있는 법입니다. 의사와 법률가가 사회적으로 좋은 대접을 받는 이유도 아마 그런 것이겠지요. 인간의 질병과 사회의 법률에 관한 지식을 소수에 불과한 전문가들이 독점하고 있어요. 그들은 세상의 대접을 받기 위해 영원히 독점 체제를 유지하려 발버둥을 칠 것입니다.
그런데 17세기부터 한국사회에서는 지식의 독점현상이 깨지기 시작했어요. 물론 이 땅에서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 무렵, 북반구 사회의 보편적인 현상이었어요.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나 독일 등의 나라에서도, 일본, 중국과 베트남 등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어요. 참 재밌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라마다 그 역사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었습니다만, 큰 틀에서 보면 적잖은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역사적 보편성이라고 해둘게요.
물론 우연한 결과는 아니었어요. 그들 국가는 사회·경제·문화적 조건에 근본적인 유사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17세기 이후 북반구의 여러 지역에서 인간의 생존 조건이 많이 개선되었던 것입니다. 먹고사는 문제로부터 어느 정도는 자유로워진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러자 고급문화를 향유(享有)하는 계층이 확대되었어요. 문화적 인프라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증대하고, 그에 부응하여 지식의 공유 현상이 전례 없이 활발해졌습니다.
이 좁은 지면에서 다른 나라에 관한 이야기는 꺼낼 여유가 없어요. 여기서는 그 당시 우리 사회의 특별한 상황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때 북반구에 있던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경제가 유례없이 발전하였고 생산성도 개선되었어요. 학교에서는 그때 우리나라의 경제가 매우 발전했고, 그 결과 서민 문화가 일어났다는 식으로 가르치지요.
그렇게 한 마디로 간단히 볼 수는 없어요. 이 문제는 대단히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함부로 재단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앞으로도 진지한 토론이 필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싶어집니다. 조선 후기에 우리 사회에서는 부의 편중이 심해져, 결과적으로는 평민들에게까지 지식이 보급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가난한 양반이 많이 생겼고 그 때문에 지식의 보급이 활발해졌다는 것입니다. 나라 안에 가난해진 양반이 늘어나자, 그들 가운데는 생계수단을 확보하기 위해 누구에게든지 자신의 지식을 팔려고 나서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가난한 양반으로서는 자기가 가진 재산이라면 지식밖에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 지식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대가로 그들은 돈을 받아 먹고살았다는 거죠. 요샛말로, 떠돌이 지식인이 많아졌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요즘도 대학에 정식으로 취직하기가 어려워, 대중 강의를 기꺼이 맡는 지식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물론 저도 그런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가난한 양반지식인들로부터 지식을 습득하는 평민들이 점차 많아졌습니다. 게다가 유교 경전에는 식자는 누구에게든 자신의 지식을 전해주라고 되어있거든요. 까마득한 옛날 일이지만, 공자 역시 제자를 받을 때 신분을 돌아보지 않았어요. 배우고자 하는 사람의 성의만 문제 삼았거든요. 수업료로 말린 고기 몇 덩이만 가져와도 공자는 기꺼이 지식을 전해주었다고 『논어』에 기록되어 있거든요. 그러므로 가난한 조선의 양반지식인들이 평민에게 대가를 받고 글을 가르치는 것은, 원칙적으로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에는 시간이 흐를수록 평민 가운데서도 똑똑한 사람은 점점 더 훌륭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들이 바로 ‘평민지식인’입니다. 물론 그 당시는 이런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어요. 평민지식인이란 표현은 제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사실 15세기나 16세기에는 그런 표현에 알맞은 사람들이 없었지요. 가난한 양반이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만큼 많지 않았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는 인구가 차츰 증가하고, 양반 가운데서도 벼슬에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져서 새로운 사회 현상이 일어난 거지요.
평민지식인의 활약이 역사기록에 자주 나타난 것은 18세기였습니다. 그 시기에는 마을의 훈장 중에서도 평민 출신이 많았어요. 글을 배웠다고 해서 바로 양반이 되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지식이 있어도 늘 평민이었던 게지요. 한문에 능통한 평민지식인들이 유달리 많았던 지역도 있었습니다. 평안도와 황해도가 유별났어요. 여기에 함경도 출신의 평민지식인도 적지 않은 편이었어요. 그들처럼 북쪽에 거주하는 백성은 중앙으로부터 부당한 정치적 차별까지 받았어요. 말하자면 지역 차별의 대상이었지요. 다시 생각해도, 언제쯤이면 이렇게 고약한 지역 차별의 구도가 한국사회에서 사라질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심정입니다만, 차별받는 지역의 평민지식인은 더더욱 조선왕조가 빨리 멸망하기를 소원했습니다. 이건 우리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점이 아닐까 합니다.
조선 후기에 북쪽 출신의 평민지식인들이 『정감록』과 같은 정치적 예언서를 애호한 것은 이해하기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익명의 예언서를 만들었고, 즐겨 읽었으며, 그에 관하여 여러 가지 괴이한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자기들끼리 서로 돌려보기도 하고, 그런 예언서를 지참하고 멀리 여행을 떠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왕조의 멸망을 확신하는 정치적 예언서가 널리 퍼졌습니다. 이것은 제가 연구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조선의 멸망을 기정사실로 여기는 정치적 예언서가 전국에 널리 전파된 배경에는 비정규직 문제가 결부되어 있었어요. 18세기 한국사회에도 오늘날처럼 비정규직이 많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회원국 가운데서도 비정규직의 비율이 가장 높습니다. 그런데 비정규직이 많으면 사람들은 불안을 느낍니다. ‘내가 여기서 언제까지 일할지 몰라. 그다음은 어디로 가게 될지 알 수도 없어’ 하는 심정이 됩니다. 조선 후기 서당 훈장님들이 바로 그런 비정규직이었어요. 훈장님들은 요즘의 연금 같은 것도, 실직수당 같은 것도 없었단 말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서당이라고 하는 것은, 교육기관이기는 하지만 국가에서 운영비를 보조해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마을의 형편이 괜찮으면 잘 가르치는 훈장님을 모셔다가 몇 달 운영해보고, 사정이 나빠지면 언제라도 폐지되었어요. 훈장님의 인기가 좋으면 한 해 더 머무시라고 요청하기도 했지만 아무런 임기 보장이 없었습니다.
그처럼 불안정한 훈장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 가운데는 서북 출신의 평민지식인이 적지 않았어요. 중앙으로부터 정치, 사회적 차별을 많이 받았던 서북 출신은 어떻게 해서든지 과거시험에 합격해, 출세할 꿈을 키웠지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의과대학이나 법학전문대학원을 가서 출세를 보장받으려 했던 것이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았어요. 어렵사리 과거시험에 합격해도 좋은 벼슬을 얻지 못했어요. 그래서 불만이 커진 많은 서북의 평민지식인이 일자리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오기도 했더란 말씀이지요. 날씨도 따뜻하고, 기회도 많아 보이는 남쪽으로 여기저기 떠돌며 훈장을 했어요. 그러나 훈장만 해서는 생계가 해결되기 어려워, 풍수지리에 관한 지식을 제공하는 지관(地官) 노릇도 하고, 의술을 베풀어 탕약 등의 약재를 구해주는 역할도 기꺼이 했답니다.
서북 출신의 평민지식인은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신뢰할 친구가 생기면 자신이 간직해온 비장의 정치적 예언서를 보여주기도 했고, 마음이 잘 맞으면 왕조의 전복을 꿈꾸며 함께 비밀조직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주목하는 조선 후기 서북 출신의 평민지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역할이 점점이 전국 각지에 이어지자 다양한 비밀결사가 등장했어요. 그 구성원이 늘어나고 조직도 커졌습니다.
18세기 후반이 되자 전국에 퍼진 비밀결사는 서북 사람들만의 조직이 아니었어요. 모든 평민지식인의 비밀결사로 확대되었다고 해야 맞지요. 요컨대 그 당시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깊이 통감하는 각지의 평민지식인들이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비밀조직에 가입했습니다.
그들이 활발하게 움직이자 크고 작은 사건들이 툭툭 터졌어요. 특히 정조 때 그런 역모 사건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정조 임금이라면 보통은 좋은 임금으로만 알죠. 학교에서 다들 그렇게 가르치니까요. 정조가 학식도 훌륭하고 백성을 많이 사랑한 임금이었던 것은 물론 사실이었지요. 그러나 그가 왕위에 있던 시대는 잘 다스려지지도 않았고, 세상이 평화롭다고 할 수도 없었어요. 그때 천주교 신앙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고, 왕은 은밀한 방법으로 신자들을 탄압했어요. 게다가 그때는 정치적 예언서를 토대로 삼아 반란을 꾀하는 평민지식인들이 곳곳에서 소요를 일으켰더란 말입니다. 정조 때의 사회상이 궁금한 분은 제 책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푸른역사, 2011, 제52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자주적 근대화의 기치
19세기 후반에 동학이 등장한 배경에는 바로 평민지식인들의 비밀결사 운동이 있었어요. 수운 최제우는 그 자신이 한 사람의 평민지식인으로서 비밀결사 운동의 전통 위에 동학이라고 하는 신종교를 만들었습니다. 그 제자 최시형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조직의 외연을 더욱 확대하고, 가르침을 심화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894년 갑오년에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관계의 본질적 전환을 추구했어요. 옛날과는 다른 방법으로 운영되는 새 세상을 건설하고자 노력했어요. “후천개벽(後天開闢)”을 염원하였던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의 성격을 우리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자주적 근대화’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막상 ‘근대화’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근대화/유럽화와는 성격이 매우 다른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근대화라고 할 때 사람들은 두 가지를 염두에 두기 마련이지요. 산업혁명을 염두에 두고서 유럽식의 산업화, 곧 기계에 의한 공장제도를 떠올리기 일쑤예요. 또는 프랑스대혁명에 뿌리를 둔 정당제 민주주의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동학의 ‘자주적 근대화’와는 거리가 아주 멀지요.
민주주의만 해도 그래요. 근대 유럽에서 발달한 시민사회의 핵심가치가 그것인데, 얼핏 보면 동학이 추구한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란 노선과 유사하지요.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큰 차이가 있어요. 동학은 사람들끼리만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말이죠. 평민지식인이 만든 동학에서는, 모든 존재의 상호관계에 질적 전환이 일어나기를 촉구했어요. 특히 인간사회에서는 ‘해원상생(解冤相生)’을 추구했어요. 차별과 소외에서 비롯된 일체의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자는 것이었으니까요.
최제우 등은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걸림돌이 ‘결원 (結怨) ’ 곧 한과 원한이 쌓여 있다는 점에서 찾았어요. 서로가 서로에게 용서하지 못할 원수가 되어갔다는 것입니다. 차별이 심했기 때문이에요.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독점현상이 지나치게 심하였다는 비판이었지요. 공유와 공존보다는 독점과 착취가 지배적 흐름이었다는 반성이었어요. 소유와 지배, 강압이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는 냉철한 분석이었어요.
이런 문제를 해소하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회적 긴장과 대립을 해소하고, 경제적 양극화 문제를 풀어야 하였어요. 문화적 헤게모니도 특권층의 전유물로 인식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의 평민지식인들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해원상생’이라는 표현에 담았습니다. 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의 근대화였던 것입니다.
근대화라고 하는 것은 대형공장이 여기저기에 우뚝 선 산업화일 리도 없고요, 허울뿐인 시민사회로의 전환도 아닙니다. 함석헌 선생의 지론대로 세상의 진정한 주인인 씨ᄋᆞᆯ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지요. 그래야 질곡을 벗어나 “관계의 질적 전환”이 옵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모두가 진정한 의미에서 하늘이 되어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이지요. 그 상태를 수운과 해월은 ‘개벽(開闢)’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크게 다시 열린 세상에서는 ‘유무상자(有無相資)’가 저절로 이뤄집니다. 있고 없고의 차이는 남아도 차별의 그림자는 완전히 지워지는 것입니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 때 전봉준을 비롯한 평민지식인들은 ‘유무상자’의 정신을 강조하였습니다.
그것이 곧 ‘해원상생’의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동학의 언어로 말하면, 우리가 모두 하늘이요, 우리는 하늘이면서도 또 다른 하늘을 날마다 먹고 사는 것입니다. 공기도 하늘이요, 물 한 방울, 먼지 하나도 모두 하늘입니다. 그런 점에서, 낱알 하나에도 우주가 들어있다고 설파한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말씀은 정곡을 찌른 것이지요. 그것은 곧 동학사상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모든 생명체와 우주 만물을 한없이 소중하게 여긴 바보새 함석헌 선생도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동학의 큰 스승님들도 그러하였고, 함석헌과 장일순 등 현대 한국의 위대한 사상가들도 따지고 보면 모두 평민지식인이었습니다. 그들이 추구한 새로운 세상이란 것은, 제 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자주적 근대화’이기도 하고, 모든 관계가 질적으로 전환한 상태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우리의 평민지식인들이 소망한 것은, 어느 날 아침에 눈 뜨고 일어났더니 기적처럼 황금이 사방에 널려 있고, 요리를 안 해도 음식이 넘쳐나는 만화 같은 풍경이 연출되는 세상은 아니었어요. 그 대신에 우주 자연을 자신의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인간으로 가득한 세상이 오기를 바랐지요. 잠에서 깨어난 개인이 지혜를 모아 만든 새 세상이 되기를 염원한 것입니다. 평화와 정의가 넘치는 세상, 소박함으로 가득한 풍요로운 세상을 우리는 언제쯤이나 실현할 수 있을지요. 이제 모든 것이 우리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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