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시 1429

사랑한다 말 못하고 가을비가 내린다고 말했습니다 -나태주- 사랑한다는 말은 접어두고서 꽃이 예쁘다느니 하늘이 파랗다느니 그리고...

[사랑한다 말 못하고 가을비가 내린다고 말했습니다] -나태주- 사랑한다는 말은 접어두고서 꽃이 예쁘다느니 하늘이 파랗다느니 그리고 오늘은 가을비가 내린다고 말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접어두고서 이 가을에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역에 나가 기차라도 타야 할까 보다고 말을 했지요 사랑한다는 말은 접어 두고서 기차를 타고 무작정 떠나온 길 작은 간이역에 내려 강을 찾았다고 그렇게 짧은 안부를 보내주었지요 사랑한다는 말은 접어둔 채로 그렇게 떠나온 도시에서 이 강물이 그렇게나 그립더니만 가을이라 쓸쓸한 노을빛 강가에 서고 보니 그리운 것은 다른 어느 것이 아닌 사람이더라고 그렇게 당신의 그리움을 전해왔습니다 끝내 사랑한다는 말은 접어두고서 그 강가 갈대숲에 앉아 하염없이 흐르는 강물만 바라보았노라고 말을 했지요..

모리아/시 2024.08.23

기다리는 사람 -오은-     골목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골목에도 있고 큰길에도 있고 마트에도 있고 시장에도 있다..

[기다리는 사람]-오은-   골목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골목에도 있고 큰길에도 있고 마트에도 있고 시장에도 있다. 학교 정문에도 있다. 아들이 엄마를 삼십 분째 기다린다. 남자가 남자를 삼십 일째 기다린다.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삼십 년째 기다린다. 몸이 몸을 기다린다. 마음이 마음을 기다린다. 언제나 기다린다. 어디서나 기다린다. 도처에 기다림이 있다.     이번 달 생활비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희망을 기다리는 사람, 성공을 기다리는 사람, 경쟁자가 실패하기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어제의 영광을 다시 기다리는 사람, 내일의 행복을 처음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기다림을 반복하는 사람과 기다림을 번복하는 사람이 있다. 골목을 서성이다 휴대 전화를 여는 손이 있다. ..

모리아/시 2024.08.22

봄, 여름, 가을, 겨울 -이경임- 새가 날아갈 때 당신의 숲이 흔들린다 노래하듯이 새를 기다리며 봄이 지나가고 벌서듯이 새를 기다리며..

[봄, 여름, 가을, 겨울] -이경임- 새가 날아갈 때 당신의 숲이 흔들린다 노래하듯이 새를 기다리며 봄이 지나가고 벌서듯이 새를 기다리며 여름이 지나가고 새가 오지 않자 새를 잊은 척 기다리며 가을이 지나가고 그래도 새가 오지 않자 기도하듯이 새를 기다리며 겨울이 지나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무수히 지나가고 영영 새가 오지 않을 것 같자 당신은 얼음 알갱이들을 달고 이따금씩 빛난다 겨울 저녁이었고 당신의 숲은 은밀하게 비워지고 있었다

모리아/시 2024.08.21

내 친구는 -윤보영- 가까이 와 있어도 부담줄까 봐 선뜻 연락할 수 없는 사람 주머니에서 꺼냈다 넣었다..

[내 친구는] -윤보영- 가까이 와 있어도 부담줄까 봐 선뜻 연락할 수 없는 사람 주머니에서 꺼냈다 넣었다 휴대 전화기만 귀찮게 만드는 사람 산이 좋아 산에 와 있어도 물이 좋아 계곡물을 보고 있다가도 마음속에 담아 둔 모습 꺼내 보게 하는 사람 안부 문자 보내놓고 바쁘면 답 안 해도 된다고 적어놓고 바쁜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휴대전화기만 보게 하는 사람 바쁜 일 때문에 시간이 훨씬 지나 식당에 와서도 "식사는 했을까?" 시장기보다 안부가 궁금하게 하는 사람 차 한 잔 같이 하고 싶은 사람 만났던 날과 다시 만날 날을 생각하다 가끔 지하철역을 지나치게 하는 사람 되돌아 와도 기분 좋고 발걸음이 가볍게 해주는 사람 봄, 여름, 가을, 겨울 구분 없이 내 안에 활짝 꽃이 피게 해주는 사람 함께 그 꽃을 보고..

모리아/시 2024.08.20

가을이 오면 그대에게 가렵니다 -정일근- 가을이 오면 기차를 타고 그대에게 가렵니다 낡고 오래된 기차를 타고 천천히,

[가을이 오면 그대에게 가렵니다] -정일근- 가을이 오면 기차를 타고 그대에게 가렵니다 낡고 오래된 기차를 타고 천천히, 그러나 잎 속에 스미는 가을의 향기처럼 연연하게그대에게 가렵니다 차창으로 무심한 세상은 다가왔다 사라지고 그 간이역에 누구 한 사람 나와 기다려 주지 않는다 해도 기차표 손에 꼭 잡고 그대에게 가렵니다 그대가 기다리는 간이역 이미 지나쳤는지 몰라도 그대 이미 저를 잊어버렸는지 몰라도 덜컹거리는 완행기차를 타고 그대에게 가렵니다 가을이 나뭇잎 하나 하나를 모두 물들이는 무게와 속도로 그대에게 가렵니다

모리아/시 2024.08.19

바보, 꽃잎에 물들다 -김시천- 그냥 물들면 되는 것을 그냥 살포시 안기면 되는 것을 저절로 물이 들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것을

[바보, 꽃잎에 물들다] -김시천- 그냥 물들면 되는 것을 그냥 살포시 안기면 되는 것을 저절로 물이 들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것을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말로만 요란하였구나 그만, 바보짓을 하였구나 그냥 물들면 되는 것을 노을이 하늘에 물드는 것처럼 꽃에 꽃물이 드는 것처럼 그냥 꽃잎에 기대어 가만히 가만히 물들면 되는 것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고 그냥 당신에게 물들면 되는 것을

모리아/시 2024.08.18

아름다운 사람에게 -김경훈- 흔들리는 바람이 아침 풀잎에 내려 앉은 날 그대여 보고 싶다 말하지 않는다 해서 노여워 마십시오..

[아름다운 사람에게] -김경훈- 흔들리는 바람이 아침 풀잎에 내려 앉은 날 그대여 보고 싶다 말하지 않는다 해서 노여워 마십시오 신새벽 맑은 햇살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도 우리들 가슴을 흔들어 준답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들이 아침 창가로 다가와 앉는 날 말없이 바라보는 미소로도 이미 우리는 아름다운 만남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이여 사랑한다 말하지 않아도 노여워 하지 마십시오 발없는 그리움들이 노래하는 새의 날개를 달고 오늘도 그대 곁으로 다가 갑니다 그래도 때로는 속삭이는 바람의 웃음으로 보고 싶다 사랑한다 말하고 싶은 마음을 그대는 알고 계시나요

모리아/시 2024.08.17

간절기 -박완호- 환절기를 보내고 나면 또 다른 환절기가 찾아왔다. 사랑 뒤에 사랑이, 이별 뒤에 이별이. 환절기에서 환절기로 가는..

[간절기] -박완호- 환절기를 보내고 나면 또 다른 환절기가 찾아왔다. 사랑 뒤에 사랑이, 이별 뒤에 이별이. 환절기에서 환절기로 가는 어디쯤에서 삶은 마지막 꽃잎을 떨구려는 건지. 죽음 너머 또 다른 죽음이 기다린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다. 죽음은 늘 다른 누군가의 것이어서, 나는 내내 아파하기만 했을 뿐. 환절기와 환절기 사이, 좁고 어두운 바닥에 뿌리를 감추고 찰나에 지나지 않을 한 번뿐인 생을 영원처럼 누리려는 참이었다. 또 하나의 환절기가 지척에 다다르고 있었다.

모리아/시 2024.08.16

행복 -이남일- 불행이 없다면 어찌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행복을 위하여 나는 불행과 싸운다 불행을 딛고 서는 순간 행복은 생겨나고..

[행복] -이남일- 불행이 없다면 어찌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행복을 위하여 나는 불행과 싸운다 불행을 딛고 서는 순간 행복은 생겨나고 행복을 향한 눈물은 기쁨이 된다 행복이여, 고난을 이기는 짧지만 행복한 노래여, 한 자리에 머무는 행복은 꽃처럼 시들지만 불행을 돌아볼 때마다 그대는 새로이 돋아난다 산 정상에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것도 오르고 싶은 또 하나 산이 있기 때문이다 행복은 얻는 것이 아니라 늘 다가 가는 것, 행복을 향해 다가갈 때 기쁨은 이어지고 기쁨으로 가득한 세상은 행복하다

모리아/시 2024.08.15

나팔꽃 -이해인- 햇살에 눈뜨는 나팔꽃처럼 나에 생애는 당신을 향해 열린아침입니다..

[나팔꽃] -이해인- 햇살에 눈뜨는 나팔꽃처럼 나에 생애는 당신을 향해 열린아침입니다 신선한 뜨락에 피워 올린 한 송이 소망 끝에 내 안에서 종을 치는 하나의 큰 이름은 언제나 당신입니다 순명(順命)보다 원망을 드린 부끄러운 세월앞에 해를 안고 익은 사랑 때가되면 추억도 버리고 떠날 나는 한 송이 나팔꽃입니다

모리아/시 2024.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