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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에 ‘분노’하며, 그 분노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목표 (올림픽 금메달)를 정하고 그 꿈을 이루기까지의 원동력은..

ree610 2024. 8. 7. 18:02

< 나는 무엇에 ‘분노’하며, 그 분노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1. “목표 (올림픽 금메달)를 정하고 그 꿈을 이루기까지의 원동력은 분노였습니다.”

2024 파리 올림픽 배드민턴 여자 단식 결승전에서 우승하여 금메달을 딴 안세영이 한 이 말이 신문과 SNS 도처에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안세영이 7년 동안 품고 있었다는 그 ‘분노’는 무엇인가. 물론 인간의 감정은 정물화가 아닌 추상화 같은 것이다. 그래서 제목을 “분노”라고 붙였다고 해서 그 분노의 정체와 기능이 사람마다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더욱 우리의 사유가 요청된다.

2. 흑인 여성으로서 작가, 철학자, 시인, 사회운동가 등으로 불리던 오드리 로드 (Audre Lode: 1934~1992)는 “분노의 사용 (The Uses of Anger)”이라는 강연에서 자신은 일생 ‘분노’를 품고 살아왔다고 말한다. 배제에 대한 분노, 당연하게 누리는 특권에 대한 분노, 인종적 왜곡에 대한 분노, 차별에 대한 침묵을 향한 분노, 특정한 그룹의 사람들을 고정관념화하는 것에 대한 분노, 배반에 대한 분노 등을 늘 가지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에게 그가 품고 살았던  ‘분노’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변혁에의 열정’을 가지고 글을 쓰고, 가르치고, 강연하고, 사회 운동을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3.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분노하는가 안 하는가?’가 아니다. 우리가 성찰해야 할 물음은 내게 분노가 있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에 분노하는가,’ 그리고 나는 그’ 분노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나의 ‘분노의 대상’ 그리고 그 ‘분노의 사용과 기능’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4. ‘세 가지 분노’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첫째, 본능적 분노, 둘째, 파괴적 분노, 셋째, 성찰적 분노다. 인간이나 동물은 모두 자신에게 위험이 가해졌을 때 본능적으로 분노한다. 그런데 인간만이 파괴적 분노와 성찰적 분노를 경험한다. 파괴적 분노는 그 분노의 대상이 무엇이든, 자신에게나 타자에게 파괴적으로 작동한다. 냉소주의로 점철되고, 크고 작은 물리적 또는 감정적 폭력을 자신에게나 타자에게 행사한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분노다.

5. 중요한 분노는 바로 ‘성찰적 분노’다. 자신에게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사회에서 벌어지는 부당한 일이 무엇(what)이며, 그런 일이 왜 (why) 일어나며, 그 부당함이 개혁되기 위해서 무엇이 어떻게 (how)변화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을 하며 품게 되는 ‘분노’다. 그 성찰적 분노는 개인적 안녕만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집단, 사회, 세계에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안녕’과도 연결되는 분노다.

6. 나는 한 올림픽 금메달 선수가 품고 있었다는 그 분노가 ‘성찰적 분노’로 성숙하고 확장되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열정을 다지면서 동시에 자기 변혁과 자신이 속한 집단과 사회에 작은 변화의 씨앗을 뿌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게 된다. 물론 ‘어떻게’는 매번 각자가 창출하고 실천해야 할 과제다.

다시 생각해 본다:
나는 무엇에 분노하며, 그 분노가 나의 삶에 어떻게 기능하는가.

- 강남순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