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삶 550

흉터의 문장

흉터의 문장 ㅡ 류시화 흉터는 보여 준다 네가 상처보다 더 큰 존재라는 걸 네가 상처를 이겨 냈음을 흉터는 말해 준다 네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그럼에도 네가 살아남았음을 흉터는 물에 지워지지 않는다 네가 한때 상처와 싸웠음을 기억하라고 그러므로 흉터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그러므로 몸의 온전한 부분을 잘 보호하라고 흉터는 어쩌면 네가 무엇을 통과했는지 상기시키기 위해 스스로에게 화상 입힌 불의 흔적 네가 네 몸에 새긴 이야기 완벽한 기쁨으로 나아가기 위한 완벽한 고통 흉터는 작은 닿음에도 전율하고 숨이 멈는다 상처받은 일을 잊지 말라고 영혼을 더 이상 아픔에 내어 주지 말라고 너의 흉터를 내게 보여 달라 나는 내 흉터를 보여 줄 테니 우리는 생각보다 가까우니까

모리아/삶 2022.08.17

또 다른 꿈

길가 창문에서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우리를 불쌍한 듯 내려보지 마라. 우리의 마지막을 네게 허락한 적이 없다. 너처럼 잘난 부모님을 못 만난 탓에, 너처럼 사기와 조작에 능숙한 가족들이 없어 밀리고 밀려, 너희들이 말한 누추한 반지하에 살았다. 평생을 반지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밝은 햇살에 눈을 뜨고 마음 편히 창문을 열고 자고 싶었다. 내 아이만큼은 넓은 창문을 통해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왜 대피를 못 했냐고 우리에게 묻지 마라. 손바닥에 왕자를 썼던 네게 물어라. 왜 대피 시키지 못했는지, 왜 우리가 죽어야 했는지를 말이다. 우르르 몰려와 사진 찍지 마라. 그 퇴근 길에 반지하에 갇힌 우리를 한번이라도 생각했더냐? 이제와 반지하 창문을 내려보는 너의 위선과 천박함이 역겹다. 우린 결국 차디찬 몸..

모리아/삶 2022.08.13

바람에 실어

바람에 실어 ㅡ 박남준 어찌 지내시는가 아침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하늘의 해, 지는 노을 저편으로 수줍게 얼굴 내어미는 아미고운 달, 그곳에도 무사한지 올 장마가 길어 지루할거라느니 유별나게 무더울 거라느니, 그런가 보다, 그런가 보다 흐르는 것은 물만이 아니었는지 초복인가 했더니 어느덧 말복이 찾아들고 입추라니, 가을의 문턱에 들었다니 아, 그런가보다 그런가보다.이곳 모악의 밤도 이제 서늘한 입김을 피워올리니 따뜻한 불기가 간절하구려 보고싶구려 내 날마다의 밤 그리움으로 지핀 등 따뜻한 온돌의 기운 바람에 실어 보내노니 어디 한 번 받아보시려나 서리서리 펼쳐보며 이 몸 생각, 한 점 해 주실런가

모리아/삶 2022.08.11

이런 사람은 되지 마십시요

? 노인이 되어도 이런 사람은 되지 마십시요 1. Nobody to call on and to meet me. "나를 만나러 올 사람도 없고 또 나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외로운 사람입니다. 친한 친구를 적어도 두사람은 만들어 두세요. 2, Nobody to call on by myself.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세상을 좁게 산 사람입니다. 친구를 만나고 싶을 때는 전화를 하든지 찾아가세요. 3. Nothing to do.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는 것은 죽은 송장과 같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만들어서라도 일을 하세요. 4. Nobody to call me, and call to. "나는 아무한테도 전화 할 사람이 없고 전화를 해 올 사람도 없다."는..

모리아/삶 2022.08.10

8월처럼 살고 싶다네

[8월처럼 살고 싶다네] - 고은영 - 친구여, 메마른 인생에 우울한 사랑도 별 의미 없이 스쳐 지나는 길목 화염 같은 더위 속에 약동하는 푸른 생명체들 나는 초록의 숲을 응시한다네 세상은 온통 초록 이름도 없는 모든 것들이 한껏 푸른 수풀을 이루고 환희에 젖어 떨리는 가슴으로 8월의 정수리에 여름은 생명의 파장으로 흘러가고 있다네 무성한 초록의 파고, 백일홍 줄지어 피었다 친구여, 나의 운명이 거지발싸개 같아도 지금은 살고 싶다네 허무를 지향하는 시간도 8월엔 사심 없는 꿈으로 피어 행복하나니 저 하늘과 땡볕에 울어 젖히는 매미 소리와 새들의 지저귐 속에 나의 명패는 8월의 초록에서 한없이 펄럭인다네 사랑이 내게 상처가 되어 견고하게 닫아 간 가슴이 절로 풀리고 8월의 신록에 나는 값없이 누리는 순수와..

모리아/삶 2022.08.02

기린 ㅡ 눈물 나도록 사는 삶

기린 - 눈물 나도록 사는 삶 기린에 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새끼기린은 태어나면서부터 일격을 당합니다. 키가 하늘 높이만큼 큰 엄마기린이 선 채로 새끼를 낳기 때문에, 새끼기린은 수직으로 곧장 떨어져 온몸이 땅 바닥에 내동댕이 쳐집니다. 충격으로 잠시 멍~해져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는 순간, 이번에는 엄마기린이 그 긴 다리로 새끼기린을 세게 걷어찹니다. 새끼기린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났고, 이미 땅바닥에 세게 부딪쳤는데 사정 없이 또 다시 걷어 차다니 도대체 이해될 리가 없습니다. 아픔을 견디며 다시 정신을 차리는 찰라, 엄마기린이 또 다시 새끼기린을 힘껏 걷어 찹니다. 처음보다 더 아프게...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진 새끼기린은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

모리아/삶 2022.07.31

그 약속이 나를 지켰다

[그 약속이 나를 지켰다] - 박노해 - 널 지켜줄게 그 말 한 마디 지키느라 크게 다치고 말았다 비틀거리며 걸어온 내 인생 세월이 흐르고서 나는 안다 젊은 날의 무모한 약속, 그 순정한 사랑의 언약이 날 지켜주었음을 나는 끝내 너를 지켜주지도 못하고 깨어지고 쓰러지고 패배한 이 치명상의 사랑밖에 없는데 어둠 속을 홀로 걸을 때나 시련의 계절을 지날 때도 널 지켜줄게 붉은 목숨 바친 그 푸른 약속이 날 지켜주었음을

모리아/삶 2022.07.31

산다는 것

[산다는 것] - 나명욱 - 지울 수 없는 것들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피할 수 없는 것들이라면 즐겨야 한다 눈을 부릅뜨고라도 이 현실을 마주보아야 하는 악몽같은 어제라도 첩첩산중의 절벽같은 내일이라도 새롭게 다가갈 수 없다면 마지막까지 갈 때까지 가보는 것이다 또 다른 문이 열리고 작은 빛이 비출 때까지 산다는 것은 그렇게 너와 내가 싸우며 부딪치며 가는 것이다 내가 선이냐 네가 악이냐 아니면 그 반대냐 끝까지 지켜보며 매일매일 순간순간을 그렇게 고뇌하며 푸른 하늘을 응시하며 가는 것이다

모리아/삶 2022.07.27

삶이 힘들 때는

[삶이 힘들 때는] - 나선주 - 삶이 더는 참지 못하게 힘들 때는 더는 가지 말고 쉬면서 뒤를 돌아 보아주세요 당신을 향해 가장 많이 웃는 행복했던 날을 더듬어 보고 그 행복을 거울삼아 훌훌 털고 일어서 가세요 땀으로 범벅되어 앞이 안 보일 때는 더는 가지 말고 그늘에 앉아 지나온 길을 보아주세요 당신이 가장 게으름 피우고 나태로 얼룩진 아픈 날을 더듬어 보고 그로 하여 나약해졌음을 거울삼아 툭툭 털고 일어서 가세요 삶의 길에 가장 힘들 때는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음을 모를 때입니다 급한 길 한 번쯤은 쉬면서 뒤돌아 보는 것도 잊지 마세요

모리아/삶 2022.07.18

여름밤

[여름밤] - 이준관 - 여름밤은 아름답구나. 여름밤은 뜬눈으로 지새우자. 아들아, 내가 이야기를 하마. 무릎 사이에 얼굴을 꼭 끼고 가까이 오라. 하늘의 저 많은 별들이 우리들을 그냥 잠들도록 놓아주지 않는구나. 나뭇잎에 진 한낮의 태양이 회중전등을 켜고 우리들의 추억을 깜짝깜짝 깨워놓는구나. 아들아, 세상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많은 너는 밤새 물어라. 저 별들이 아름다운 대답이 되어줄 것이다.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 열손가락에 달을 달아주마. 달이 시들면 손가락을 펴서 하늘가에 달을 뿌려라. 여름밤은 아름답구나. 짧은 여름밤이 다 가기 전에(그래, 아름다운 것은 짧은 법!) 뜬눈으로 눈이 빨개지도록 아름다움을 보자.

모리아/삶 2022.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