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약속이 나를 지켰다 [그 약속이 나를 지켰다] - 박노해 - 널 지켜줄게 그 말 한 마디 지키느라 크게 다치고 말았다 비틀거리며 걸어온 내 인생 세월이 흐르고서 나는 안다 젊은 날의 무모한 약속, 그 순정한 사랑의 언약이 날 지켜주었음을 나는 끝내 너를 지켜주지도 못하고 깨어지고 쓰러지고 패배한 이 치명상의 사랑밖에 없는데 어둠 속을 홀로 걸을 때나 시련의 계절을 지날 때도 널 지켜줄게 붉은 목숨 바친 그 푸른 약속이 날 지켜주었음을 모리아/삶 2022.07.31
산다는 것 [산다는 것] - 나명욱 - 지울 수 없는 것들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피할 수 없는 것들이라면 즐겨야 한다 눈을 부릅뜨고라도 이 현실을 마주보아야 하는 악몽같은 어제라도 첩첩산중의 절벽같은 내일이라도 새롭게 다가갈 수 없다면 마지막까지 갈 때까지 가보는 것이다 또 다른 문이 열리고 작은 빛이 비출 때까지 산다는 것은 그렇게 너와 내가 싸우며 부딪치며 가는 것이다 내가 선이냐 네가 악이냐 아니면 그 반대냐 끝까지 지켜보며 매일매일 순간순간을 그렇게 고뇌하며 푸른 하늘을 응시하며 가는 것이다 모리아/삶 2022.07.27
삶이 힘들 때는 [삶이 힘들 때는] - 나선주 - 삶이 더는 참지 못하게 힘들 때는 더는 가지 말고 쉬면서 뒤를 돌아 보아주세요 당신을 향해 가장 많이 웃는 행복했던 날을 더듬어 보고 그 행복을 거울삼아 훌훌 털고 일어서 가세요 땀으로 범벅되어 앞이 안 보일 때는 더는 가지 말고 그늘에 앉아 지나온 길을 보아주세요 당신이 가장 게으름 피우고 나태로 얼룩진 아픈 날을 더듬어 보고 그로 하여 나약해졌음을 거울삼아 툭툭 털고 일어서 가세요 삶의 길에 가장 힘들 때는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음을 모를 때입니다 급한 길 한 번쯤은 쉬면서 뒤돌아 보는 것도 잊지 마세요 모리아/삶 2022.07.18
여름밤 [여름밤] - 이준관 - 여름밤은 아름답구나. 여름밤은 뜬눈으로 지새우자. 아들아, 내가 이야기를 하마. 무릎 사이에 얼굴을 꼭 끼고 가까이 오라. 하늘의 저 많은 별들이 우리들을 그냥 잠들도록 놓아주지 않는구나. 나뭇잎에 진 한낮의 태양이 회중전등을 켜고 우리들의 추억을 깜짝깜짝 깨워놓는구나. 아들아, 세상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많은 너는 밤새 물어라. 저 별들이 아름다운 대답이 되어줄 것이다.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 열손가락에 달을 달아주마. 달이 시들면 손가락을 펴서 하늘가에 달을 뿌려라. 여름밤은 아름답구나. 짧은 여름밤이 다 가기 전에(그래, 아름다운 것은 짧은 법!) 뜬눈으로 눈이 빨개지도록 아름다움을 보자. 모리아/삶 2022.07.15
엄마 걱정 엄마 걱정 ㅡ 기 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옹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들리네, 어둠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모리아/삶 2022.07.14
산 아래 식사 산 아래 식사 ㅡ 이 홍섭 산 아래에서 산과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면 낯설고 험한 산길도 누룽지처럼 익어간다 절 밥을 축내던 시절 나는 밥때가 되면 죽어라고 산을 내려와 산을 마주하며 밥을 먹었다 찬물에 밥 말아 먹을지언정 밥은 꼭 세간에서 먹어야 한다고 이 비루먹을 세간에서 *세간-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 * 같이 밥을 먹는 것 같이 밥먹어요 하는 것 만나자는 이야기다. 같이 밥한번 먹어요! 모리아/삶 2022.07.08
몸 몸 ㅡ 이현주 가지가 나무를 떠나서 꽃을 피울 수 있으랴? 나무가 땅을 떠나서 숲을 이룰 수 있으랴? 아아, 네가 네 몸을 떠나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밥 먹고 똥 싸는 네 몸 없이는 정의도 평화도 하느님 나라까지도 없는 것이다. 모리아/삶 2022.07.07
아비 아비 ㅡ 오봉옥 연탄장수 울 아비 국화빵 한 무더기 가슴에 품고 행여 식을까 봐 월산동 까치고개 숨차게 넘었나니 오늘은 내가 삼십 년 전 울 아비 되어 햄버거 하나 달랑 들고도 마음부터 급하구나 허이 그 녀석 잠이나 안 들었는지 모리아/삶 2022.07.05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ㅡ 박용재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저 향기로운 꽃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저 아름다운 목소리의 새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숲을 온통 싱그러움으로 만드는 나무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그 무언가를 사랑한 부피와 넓이와 깊이만큼 산다 그만큼이 인생이다 모리아/삶 2022.06.30
삶 [삶] - 박경리 - 대개 소쩍새는 밤에 울고 뻐꾸기는 낮에 우는 것 같다 풀 뽑는 언덕에 노오란 고들빼기 꽃 파고드는 벌 한 마리 애끓게 우는 소쩍새야 한가롭게 우는 뻐꾸기 모두 한목숨인 것을 미친 듯 꿀 찾는 벌아 간지럼 타는 고들빼기 꽃 모두 한목숨인 것을 달 지고 해 뜨고 비 오고 바람 불고 우리 모두 함께 사는 곳 허허롭지만 따뜻하구나 슬픔도 기쁨도 왜 이리 찬란한가 모리아/삶 2022.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