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정과/설교 자료

8월 4일(오순절 후 11째) 주일 설교 자료

ree610 2024. 7. 30. 12:55

8월 4일(오순절 후 11째) 주일 설교 자료

글쓴이 : 조헌정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였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겸하였다. 그러나 교단별로 창조절 적용 구간이 다르기에 성령강림절 기간을 12주로 하고 그 이후부터 창조절로 부른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부활은 깨어진 세계를 지금껏 해석하고 움직여 온 거짓 이론과 폭력적 권위에 대한 ‘하느님의 반역’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존재이기에, “부활은 우리 모두를 반역자로 만든다”. 부활과 함께 새로이 창조된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고통당하는 자에게 값싼 위로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빈 무덤이라는 부조리를 증언함으로써 현실의 부조리를 부숴내는 것이다.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주일 본문]
  출 16:2-4, 9-15; 시 78:23-29; 엡 4:1-16; 요 6:24-35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출애굽기 16:2-4, 9-15}

2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다.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항의하였다.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 거기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던 그 때에, 누가 우리를 주의 손에 넘겨주어서 죽게 했더라면 더 좋을 뻔 하였다. 그런데 너희들은 지금,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와서, 이 모든 회중을 다 굶어 죽게 하고 있다."
4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하늘에서, 너희가 먹을 것을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백성이 날마다 나가서, 그날그날 먹을 만큼 거두어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그들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하여 보겠다.
9 모세가 아론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이 원망하는 소리를 들으셨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주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오라고 일러주십시오.”
10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할 때에,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주님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났다.
11.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12 나는 이스라엘 자손이 원망하는 소리를 들었다. 너는 그들에게 ‘너희가 저녁이 되면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빵을 배불리 먹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에 너희는 나 주가 너희의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하고 말하여라.“
13 그날 저녁에 메추라기가 날아와서 진 친 곳을 뒤덮었고, 다음날 아침에는 진 친 곳 둘레에 안개가 자욱하였다.
14 안개가 걷히고 나니, 이럴 수가, 광야 지면에, 마치 땅 위의 서리처럼 보이는, 가는 싸라기 같은 것이 덮여 있는 것이 아닌가!
15. 이스라엘 자손이 그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서로 “이게 무엇이냐?” 하고 물었다,

[신학적 관점]

백성들의 주요 관심은 먹는 것에 있었다. 애굽은 노예생활을 했던 억압의 장소로서 기억되는 곳이 아닌, 고기를 먹었던 장소로서 기억되고 있다. 곧 광야 40년 이전의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고발하고 있다.

만나와 메추라기의 목적은 먹을 것의 해결이 아닌, 먹을 것이 “비처럼” 풍성한 상황에서 “그날그날 먹을 것만 거두어들이라”고 하는 YHWH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4절)를 판단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였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곧 만나와 메추라기는 손가락이고 달은 모세를 통해 주어질 토라(Torah, 율법)라는 것이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공짜로 주었다는 곧 돌봄에 그 중심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거둔 사람도 있고, 적게 거두는 사람도 있었으나, 오멜로 되어 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그들은 제각기 먹을 만큼씩 거두어들인 것이다.”(17-18절) 곧 약자 보호에 기반한 나눔과 평등 정신이 토라의 핵심임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에 출애굽 해방의 목적과 선민(選民) 백성으로서의 책임이 있다.

[목회적 관점]

교회 안에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다. 성령강림 직후의 초대공동체는 가진 것을 모두 내어놓고 이를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나눔공동체였고, 이후 이방인 과부들이 차별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방인 가운데서 일곱 집사를 뽑았다. 집사의 주된 역할은 약자 돌봄이었다. 주기도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다. ‘오늘 나에게’가 아닌 ‘오늘 우리에게’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하루의 양식을 갖지 못한 이웃이 누구인지를 항상 물어야 한다.

[주석적 관점]

만나(manna)는 히브리어로 ‘이게 무엇이냐?’이다.
오멜은 2.2kg의 부피이고 성인 하루치의 양이다.

[설교적 관점]

만나와 메추라기는 몇 가지의 신앙적인 의미가 있다. 첫째는 물론 하느님의 돌보심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돌보심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인가 아니면 부분적인 신뢰인가이다. 전폭적인 신뢰란 내일도 분명히 오늘과 같이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릴 것이라는 것을 믿고 오늘 먹을 분량만 거두어들이는 행위를 말한다.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일을 걱정하여 내일 먹을 분량까지 거두어들였다. 그러나 이 남은 분량은 다음 날 아침에는 모두 썩었다. 두 번째 만나와 메추라기 가르침의 의미는 재산 축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땅에 쌓아두면 좀이 슬고 썩으니 하늘 곳간(이웃나눔)에 쌓아두라는 말씀이다. 다음은 오멜의 가르침이다. 젊고 힘이 있는 사람들은 많이 거둘 수가 있고, 힘이 없고 연약한 사람들은 적게 거둘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서 오멜로 달아보니 모두가 다 필요한 만큼씩만 거두어들였다는 가르침이다. 여기서 오멜은 일정 크기로 만들어진 됫박 곧 절대 기준이 아닌 사람의 신체 구조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는 상대적 잣대, 곧 하느님의 잣대를 말한다.

끝으로 광야 이스라엘공동체는 오늘날 구체적으로 어떤 공동체인가? 하나의 교회라는 건물 안에 소속된 교인들을 두고 하는 말인가? 아니면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이웃까지를 포함하는 말인가? 아니면 하나의 민족공동체 혹은 한 국가를 두고 하는 말인가? 아니면 세계에 흩어진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두고 하는가? 아니면 전 인류공동체를 두고 하는 말인가? 이는 개인 신앙의 크기(오멜)에 달려 있다.

{시편 78:23-29}

23 그러나 당신은 하늘의 구름에게 명령하시어 하늘의 문들을 열게 하시고
24 그들이 먹을 만나를 비처럼 내리시고 하늘의 양식을 그들에게 내리시어
25 천사들의 양식을 사람들에게 먹이셨으니 그들이 배불리 먹을 식량을 내려 주셨다.
26 하늘에 동쪽 바람 일으키시고 당신 힘으로 남쪽 바람을 불러오시어
27 먼지처럼 고기를 몰아오시고 바다의 모래처럼 날짐승을 쏟아 주셨으니
28 그들의 진지 가운데 그것들이 떨어지고 그들이 사는 천막 둘레에 두루 떨어져
29 배곯았던 그들인지라 마음껏 먹고 실컷 마셨다.

{에베소서 4:1-16}

1 그러므로 주님의 일로 갇힌 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주셨으니, 그 불러 주신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언제나 겸손함과 온유함을 지니십시오.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면서, 오래 참으십시오.
3 여러분은,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4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한 희망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과 같이,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5 주님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유의 아버지이시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십니다.
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선물의 분량을 따라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8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시기를 “그분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셔서, 포로를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셨다” 합니다.
9. 그런데 그분이 올라가셨다고 하는 것은 먼저 그분이 땅의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10 내려오셨던 그분은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려고, 하늘의 가장 높은 데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이십니다.
11 그분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12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3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14 우리는 더 이상 더 어린아이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15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합니다.
16.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몸에 갖추어져 있는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합니다. 각 지체가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

[신학적 관점]

신학적으로 성도와 교회에 대한 정의를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느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 곧 성도(聖徒)를 말하는데, 이는 개인으로 말하면 첫째는 겸손과 온유의 삶, 둘째는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면서 오래 참는 삶, 셋째는 평화의 띠로 하나가 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하고, 교회공동체로 말하면 몸의 지체가 다르기에 하는 일은 다르지만 결국 하나 되어 몸을 자라나게 하듯이 서로 다른 직분을 통해 공동체가 자라나도록 활동하는 사람을 말한다. 곧 성도는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공동체의 한 지체임을 깨닫는 사람이다.

[목회적 관점]

오늘 우리 교회가 품고 있는 ‘한 희망’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4절)?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라는 몸의 구조 속에서 교인 각자는 자신을 어떤 지체로 인식하고 있는지 혹은 어떤 지체가 되기를 원하는지 물어보자.

[주석적 관점]

목사와 교사는 서로 떨어진 직분이 아닌 하나의 정관사로 묶인 하나의 직분이다.

바울 시대에 로마제국은 시민들의 모임을 ‘에클레시아(ecclesia)’라고 불렀다. 바울은 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고쳐 부르고 있다. 예수는 로마제국의 극형인 십자가에 처형당한 죄인이었다. 그러기에 로마인들이 예수공동체를 이해하기를 황제가 아닌 죄인을 우두머리로 한 위험한 단체로 인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설교적 관점]

많은 신자들은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14절)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혹은 받았다면 그 증거가 무엇인지를 반문하곤 한다. 그런데 이는 하느님의 영역에 속하기에 인간은 결코 그 가부를 단정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 물음은 일단 접고 대신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믿고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부모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은 자녀됨의 도리가 아니다. 그리고 신앙이 하느님의 나라를 향한 순례의 여정이듯이 구원 또한 완결로서의 됨(being)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서의 되어감(becoming)의 여정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고전 10:12) 라고 하는 바울의 경고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요한복음 6:24-35}

24 무리는 거기에 예수도 없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배를 나누어 타고, 예수를 찾아 가버나움으로 갔다.
25 그들이 바다 건너편에서 예수를 만나서 말하였다. "선생님, 언제 여기에 오셨습니까?"
26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아온 것은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27 너희는 썩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여라. 그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자를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28 그들이 예수께 물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
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30 그들은 다시 물었다. "우리에게 무슨 표적을 행하셔서, 우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선생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31 '그가 하늘로부터 빵을 내려서, 그들에게 먹게 하셨다' 한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3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빵을 내려 주신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부터 참된 빵을 너희에게 내려 주시는 분은 나의 아버지시다.
33 하나님의 빵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인데,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34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 빵을 늘 우리에게 주십시오."
3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신학적 관점]

마가, 마태, 누가의 주된 관심사는 하느님의 나라였다면, 요한의 주된 관심사는 하느님의 아들 로서의 예수그리스도였다. 오천 명 급식 이야기의 핵심은 모두가 배불리 먹었다는 기적 사건이 아닌 이는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가리키는 표적 사건임을 말하고, 급식 사건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곧 생명이다. 그런데 그 생명의 근원은 창조주 하느님인데, 그 하느님은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고, 그분이 곧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이 주장이 신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당시 YHWH 하느님은 예루살렘 성전 깊숙한 장소인 지성소에 거하기에 직접 만남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간접 만남만 가능했는데, 그것도 일 년에 한 번 욤키퍼 절기에 뽑힌 한 명 대제사장의 중개를 통해서만 가능하였다. 신이 인간의 몸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그리스로마종교에서는 가능했지만, 히브리종교에서는 가능한 방식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리스로마종교에서 신의 현현은 모두 초인간 영웅으로 그려지는 데 반해 제2성서 저자들의 주장은 갈릴리의 청년 예수가 신의 현현이었고 그는 영웅이 아닌 로마제국에 의한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한 죄인 중의 죄인이었다는 것이다. 중개신앙을 깨는 것만도 혁명적인 방식이었는데, 여기에 더해 역사의 주변부에 있는 유대 땅 갈릴리에서 이름 없는 민중의 아들이 하느님의 아들 메시야가 된다는 것은 당시 시대적 사고를 완전히 뒤집어엎는 매우 혁명적인 주장이었으며 새로운 세계를 여는 개벽(開闢) 사상이었다.

[목회적 관점]

왜 교회에 출석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교인들은 무어라고 답할까? 혹 빵의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로 보는 것은 아닌가(34절)? 목회자들은 무어라고 가르쳐야 하는가?

[주석적 관점]

‘생명의 빵’이란 번역보다는 ‘생명의 떡’이 우리에게는 더 바람직한 번역이 아닐까?

[설교적 관점]

“세상에 생명을 준다”(33절)을 준다는 뜻은 무엇인가? 생명은 먼저 살아 있음 곧 활기(活氣)가 있다. 당시의 세상은 로마제국이다. 따라서 로마제국은 활기가 없는, 죽어 있음을 전제한다. 이 죽음은 폭력에 의한 로마 귀족들의 지배를 전제한다. 로마제국의 빵은 약소민족에 대한 억압과 착취에서 나온다. 예수그리스도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새로운 세상을 불러오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하느님 자신으로 얘기된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에서의 에고 에이미는 곧 YHWH 스스로를 말한다. 여기서 예수그리스도에게로 가면 더 이상 주리지 않고, 더 이상 목마르지 않는다는 말은 영적인 빵과 물의 자체 생산이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중개 신앙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민중 주체적 신앙을 의미한다. “그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하여금 ‘내가 곧 나(에고 에이미)’임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13:19) 여기서 앞의 ‘내’와 뒤의 ‘나’는 같은 주체(예수)일까? 아니면 융의 표현을 빌린다면 앞의 ‘내’는 작은 자아(self)이고 뒤의 ‘나’는 큰 자아(the Self)일까? 필자는 ‘에고 에이미’를 ‘내가 곧 나’가 아닌 ‘네가 곧 나’라고 번역하는 것이 저자 요한의 뜻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ㅎㆍㄴ’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