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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한 정권, 뻔뻔한 성직자

ree610 2024. 1. 11. 08:24

뻔뻔한 정권, 뻔뻔한 성직자

1.
신학교 시절 나의 윤리학 교수님으로부터 한국인의 문화가 체면을 중시하는 특성에서 형성 되었다면, 일본인의 문화는 수치에 있다는 주장을 들은 적이 있다. 한국인은 사람이라면 얼굴값을 해야 한다고 하여, 누군가에 자신이 어떻게 비쳐질 것인지를 먼저 생각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체적인 자기의식보다, 타아, 즉 다른 이의 판단이 더 중시되는 체면문화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인의 삶에는 필요보다 과한 과시 욕망이 동인(動因)으로 작용한다고 했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기 형편보다 더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가진 것이 없어도 명품 옷, 명품 시계, 명품 가방, 명품 지갑, 더 큰 아파트, 더 큰 차를 구입하는 이유다. 교회 집사도 교회에 나올 때 명품가방 하나 들지 않으면 축에 끼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도 있다. 교회도 목사가 존경할 대상인지와 아무런 상관없이 무조건 큰 교회에 나가는 것이 자기 품위와 위상에 맞는다고 여긴다. 그래서인지 대형교회에는 자기 교회를 떠나와 이적되기를 기다리는 기회주의자 장로들이 수두룩하다.  

이런 모양을 보면, 한국인은 다소 무책임하게 과장 하기를 좋아하며, 허세를 부리기 위해 쓸모없이 많은 시간과 재화를 낭비한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헌금자 명단이 적힌 주보가 발행되는 기이한 풍토 역시 이런 체면 문화를 인정 내지는 자극하는 의미를 가진다. 여기에 작동하는 것이 우월감이다. 남이 보기에 내가 더 크고, 높고, 많이 가져야 살맛이 나는 경쟁적 인간론이 여기 담겨있다.

2.
반면, 일본인들은 체면문화보다 수치문화가 깊다고 보고, 그 수치문화의 특성을 사무라이가 주군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자기희생과 헌신과 같은 것을 기준으로 삼고, 이에 못 미치는 행위를 했을 경우 할복 자살도 마다않는 경우를 예로 들었다. 삶을 사랑하는 것과 자결하는 것이 공존하는 사무라이 문화는 일본인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의 논리적 근거는 아마도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아닌가 싶다. 그녀는 1946년 미국과 전쟁을 벌인 일본인에 대한 연구서 <국화와 칼>을 출판 했는데, 여기서 서양인들이 일본인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시각을 수치심(恥, 하지) 개념에서 풀어냈다. 그녀의 주장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은혜(恩, 온)를 입고도 이를 갚지 않는 경우, 의리(義理, 기리)를 지키지 못했을 경우, 그리고 그로 인해 남에게서 조롱을 사는 경우, 수치심을 느끼며, 이 경우 차라리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남이 보는 것을 의식 하기보다 자기 행위에 대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이야기다.

과연 50여 년 전의 이 분석이 오늘까지 유효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체면 문화나, 수치 문화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문화권에 다 있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우리는 대통령 부부를 보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고, 체면이 손상되는 것을 느끼기도 하고, 대통령 부부가 수치심을 모르는 인간형이라는 생각에 상당히 불편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대통령에 대해 지지를 보내는 무리, 체면과 수치심은 아예 없는 인간들 약 30%를 제외하고, 무려 약 70%가 지속적으로 이 정권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체면도 모르고, 수치도 모른다면 그것은 뻔뻔한 것이다. 다른 나라 국민도 그렇겠지만, 한국인은 뻔뻔한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다.

3.
서양과 동양, 혹은 기독교 문화와 아시아 문화, 혹은 기독교와 일본 종교의 특성을 분석하며 새로운 이론을 제시한 경우도 있다. 그 중에 주목할 만한 책은 고야마 고스케가 1985년에 출판한 <후지산과 시내산, Mount Fuji, Mount Sinai>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고야마는 기독교의 초월적 신관과 일본인의 내재 신론적인 일왕숭배를 혼합한 신관을 후지산과 시내산 상징을 들어 비교하고 있다.
기독교적 신관은 그 근본 성격이 초월적이어서 편협한 가치를 초월적 신관 속에 유입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자기 비판적인 성격이 근본에 있다면, 후지산의 신은 종족적 가치, 일왕숭배와 같은 정치적 가치를 그들의 신관에 유입시키는 것을 허락한다.

따라서 후지산의 신은 일본인 특유의 종족적 가치와 이익을 배타적으로 보장하고 감싸는 내재(內在)적 신론을 대표한다. 가족, 자식, 성공, 영생 등을 구하는 구복 종교가 대부분 이런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초월적 신관이 있는 곳에서는 구복적 요구 이전에 신의 정의라는 초월적 가치가 우선한다. 이 가치에서 벗어나 있다는 존재의식이 바로 죄의식이다.
  초월적 신관은 하나님의 정의 앞에서 악의 현상을 드러내고 고발 함으로써 신앙인에게 신의 축복을 누리는 삶보다, 신의 정의에 미흡한 자기 존재의식과 죄의식을 일깨우는 예언자 정신이 나온다. 자기 정화와 자기 비판이라는 제 3의 눈이 열리는 것이다.  나는 이점이 기독교 신앙 특유의 영성이라고 생각한다.

정의에 대한 철저한 질문을 하게 하는 초월적 신관과 정의에 대한 질문보다는 손쉬운 신 앞에서 자신의 욕망을 쉽게 섞어버리는 혼합주의적인 종교가 빚어내는 신관은 역사 과정, 진보와 발전을 불러오는 정화의 과정에서 아주 다른 사회 윤리적 영향을 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초월적 신관과 내재신론이 언제나 서구 기독교적 신관이나 일본적 내재 신론으로 고착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기독교의 초월적 신관이 약해져 내재신론적으로 퇴화할 경우 나치와 결탁한 기독교가 나왔고, 일본의 경우 내재신론에 과도하게 치우쳐 일왕숭배를 비판할 능력을 상실하고 자기 우상화에 빠진 일본은 결국 원자폭탄 세례를 불러오고 말았다. 나는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한 세력의 인종차별적인 악에 대하여 비판적이지만, 이런 악을 초래한 데에는 자화자찬 일색인 일본 종교의 무능이 있었다고 본다.

4.
새해 벽두에 내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취임직후 거들먹거리며 기자회견을 하던 윤석열 대통령이 함량미달 인물이라는 것이 드러나자, 급하게 꼬리를 내리고 숨더니, 2024년 새해가 열리는 마당에서도 아예 기자들 앞에 설 자신감을 잃고 겨우 2분여 되는 대통령실 홍보물로 새해 국정의 방향을 제시하고마는 무성의를 보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가 정신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가늠할 길이 없다. 물가고에 시달리고, 불황의 늪에 빠져들고 있는 국민의 일상생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소리만 주절거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민주적 가치, 공정과 상식은 뒤틀린 지 이미 오래다. 자기비판 능력이나 자기 잘못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다. 그러니 보다 나은 미래가 그려질 리가 만무하다.

무한대의 사회정의에 대한 책임감도 없고, 그렇다고 국민이 대통령으로 뽑아준 은혜에 대한 보은의 염도 없다. 장모는 구속되었고, 부인은 범죄혐의로 10여 개월 만에 특검이 발의되었다. 50억 부정 부패자들을 특검 하겠다는 국민 대의기관 국회의 결의조차 간단히 무시한다.
  이 정도면 오만방자함도 도가 지나쳐, 권력형 부정 부패자의 만행이라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데도 대한민국 종교계는 조용하다.
  전쟁을 독려한 일왕 숭배와 부정부패와 결탁한 1930년 대의 일본 종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도대체 한국 기독교, 한국교회의 목사나 신도들은 하나님의 정의라는 개념이라도 가지고 있는지 묻고 싶다. 기독교 간판을 달고 있으나 꼭 비루한 일왕을 숭배하던 일본 종교인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자기 비판능력을 결여하고, 자기 우상화에 빠졌던 일본사회가 불러들인 것은 전범국이라는 오명과 연합군이 투하한 끔찍한 두 발의 원자폭탄 세례였다. 그런 끔찍한 일을 겪고서도 우둔한 일본인들은 참회나 반성의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바, 죄와 악을 날카롭게 비판하지 못하고 정의의 기준을 묻지 않는 편협한 신관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한국 기독교에서도 초월적 신관념에 이끌리는 모습은 간 곳이 없고, 예언자 정신을 어디다 처박아두고 천박한 윤석열 정권의 수호자 노릇이나 하고 있는 지 알 길이 없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적 신관이 아니라, 내재적 타협과 우상숭배를 허용하던 후지산의 신을 섬기는 자들과 하나도 다름이 없다는 사실증명이 아닌가 싶다.

5.
궁핍한 요구라도 하고 싶다. 한국의 종교가 각자도생이 궁극적 존재이유가 아니라면, 설령 기독교적 죄책감도 약해졌다면, 비종교적인 세계 시민 사회의 일원으로서 체면의 문화, 수치심의 문화라도 간직하고 있어야 인간다운 것이 아닌가? 나아가 진실한 기독교적 신관을 가지고 형성된 기독교회라고 주장하려면, 기독교 목사라면, 혹은 기독교 신자라면 초월적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임재와 현존의식 앞에서 죄책을 느끼며, 자기비판과 회개의 영성이라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대통령 가족부터 부패하여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상하지 않은 곳이 없는 부패한 나라에서 종교의 존재이유가 각자도생이란 말인가?
사는 것이 바빠 자녀조차 가질 여력이 없는 젊은 세대와 방불하게, 종교사업하기에 바빠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할 의지마저 포기하고 망각한 종교가 아닌지 묻게 된다.
후지산의 신은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을 막아낼 능력이 없었다. 한국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들이 과연 이 나라의 평화와 안전을 지켜낼 수 있는 종교로서 초월적 자기 비판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두려운 마음으로 자꾸 묻게 된다.
  배부른 대형교회를 기준삼아 배고픈 교회의 목사나 신자들도 한가지로 초월성을 상실한 한국 기독교, 과연 무엇이 되려고 하는 것인가? 정권도 뻔뻔하고, 목사들도 뻔뻔하다. 수치를 느낄 줄 안다거나 체면치례조차 할 줄도 모르니 하는 말이다.

ㅡ  박충구 박사 (감리교신학대학교 기독교윤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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