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남은 자 (열왕기상 19:18)

ree610 2023. 9. 10. 19:08

 

연세대학교 2023년 2학기 개강을 맞이하면서 ‘남은 자’를 주제로 채플에서 강연했습니다. 시대착오적인 정권으로 인해서 하수상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남은 자로 살아야만 그나마 희망을 향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A4 용지 다섯 쪽 분량입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인내하며 읽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남은 자 (열왕기상 19:18)

폭염과 폭우로 이어진 여름의 힘겨움을 이겨내고, 2023학년도 2학기 개강 채플에 참석한 건강한 모습의 학우들을 만나니 기쁘고 감사합니다. 그러나 힘겨운 과정에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분들과 그들의 유가족, 여러 유형의 재난을 당한 주민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위로가 그들 모두에게 넘쳐나기를 기원합니다. 개강을 맞이한 우리 학우들은 희망과 열정과 보람으로 가득한 새 학기를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남은 자’에 대한 이야기가 연연히 이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초창기 인류가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기 멋대로 죄 가운데서 살 때, 의롭게 살던 ‘노아’라는 ‘남은 자’가 있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거주민들이 낯선 나그네를 위협하고 해코지할 때,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처럼 나그네를 환대하던 ‘남은 자’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남북분단 시절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의 주민들이 각각 강대국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패망하고 포로로 잡혀갔을 때, 그때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잃지 않고 해방을 소망했던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열왕기상 19장 18절 말씀에도 칠천 명의 ‘남은 자’들이 등장합니다. 예언자 엘리야가 악한 왕 아합과 사악한 왕후 이세벨을 상대로 대결하다가 죽임의 위협으로 인해서 절망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방신(異邦神)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입을 맞추지 않은 칠천 명을 남겨놓겠다는 약속을 통해서 희망을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에릭 프롬’이라는 사회학자가 쓴 저서 가운데 [혁명적 인간상]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소유냐 존재냐]라는 그의 책이 우리에게는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혁명적 인간상]이라는 책에는 네 가지 유형의 인간이 등장합니다. 첫째는 권위주의적인 인간입니다.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는 비굴할 정도로 최대한 복종하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는 자기가 복종하는 이상으로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둘째는 반항적인 인간입니다. 강한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은 복종을 통해서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을 기대하기 때문인데, 복종해도 돌아오는 아무런 대가나 보상이 없으면, 복종하려 했던 상대에게 오히려 반항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셋째는 광신적인 인간입니다. 자기 입장이나 자기 신앙의 옳고 그름에 상관하지 않고, 자신이 주장하는 입장이고, 자신이 선택한 신앙이라는 점에서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이비 이단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넷째는 혁명적인 인간입니다. 진실이 무엇인지, 참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를 묻고, 진실과 참과 진리에 일치한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예’라고 응답하고, 일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아니오’라고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급진적’(radical)이라는 단어와 연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급진적 혁명’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급진적’(radical)이라는 단어는 ‘뿌리’(radix)라는 어원에서 비롯된 것인데, 혁명이란 것이 진실과 참과 진리의 뿌리 위에서 철저히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강연 제목의 ‘남은 자’가 혁명적인 인간의 유형에 속한 사람이라 전제하고, 남은 자의 특징을 몇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남은 자’는 다수의 사람이 작은 것을 크다고 말할 때 사실 그대로 작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사람들의 심리를 연구하기 위해서 대본을 만듭니다. 역할을 맡은 사람들에게 미리 언질을 주고 작은 것을 크다고 말하도록 약속합니다. 피실험자는 대본대로 약속한 사람들의 판단을 사전에 듣고 실험에 참가하는 데, 이때 피실험자는 어느 것이 크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작은 것이 분명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거짓 판단에 의지해서 다수의 피실험자가 작은 것을 크다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수이지만 작은 것을 작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는 이들을 ‘남은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남은 자’는 전문가의 무의미한 처방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환자들에게 있어서 의사의 처방은 거의 절대적입니다. 낫고자 하는 환자의 입장으로 의사가 하는 말은 질병에서 나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사가 치료와는 전혀 무관한 처방을 환자에게 했을 때, 다수의 환자는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라는 단순한 믿음 아래 그저 순응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의사의 권위 앞에 주눅이 들지 않고, 왜 그러한 처방을 한 것인지 질문한 후에 납득할 수 없으면 이행하지 않는 소수의 환자가 있다고 합니다. 바로 이들이 ‘남은 자’입니다.

‘남은 자’는 권력자의 부당한 명령과 결정에 ‘왜’라고 물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정치권력을 쥔 자들의 힘은 정말로 대단합니다. 정치권력자는 자신의 권력을 방해하는 특정인과 집단에 대해서 언제라도 만신창이(滿身瘡痍)로 만들 수 있는 힘을 지녔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던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경찰들은 지나가는 대학생들과 시민들을 붙잡고서 가방을 열어 불시 검문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시 경찰이 개인의 가방을 임의로 열어젖힐 때, 왜 사적인 내용물을 강제로 열어젖히냐며 저항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냥 당해야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도 저항했던 소수의 ‘남은 자’가 있었기에, 지금 우리는 보다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남은 자’는 누군가가 양자택일을 요구할 때, 제3의 대답을 찾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갈 것이냐, 뒤로 되돌아갈 것이냐 직선적으로 생각할 때, 남은 자는 위를 바라보며 올라가는 새로운 길을 입체적으로 모색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나의 대학생 시절에 존경하는 스승님께서 주신 말씀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얘들아, 누가 너희에게 오른손을 자를까, 왼손을 자를까 질문할 때, 둘 다 안 된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오른손잡이니까 왼손을 자르라고 한다든지, 왼손잡이니까 오른손을 자르라고 한다든지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란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위급한 상황이라도 면밀하게 분석하고 차분하게 숙고하면, 해결할 길이 있습니다. 언제라도 제3의 대안을 찾는 사람은 ‘남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남은 자’는 부산을 떨지만 일하지 않는 사람들과 달리 자기 할 바를 열심히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집단생활을 하는 개미들을 가만히 관찰해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개미가 무리를 지어서 이동하지만, 먹이를 입에 물고서 이동하는 개미는 실제로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먹이를 물고 일하는 소수의 개미가 사실은 다수의 개미를 먹여 살리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 역시 이와 유사합니다. 다수의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몰두하는 경향이 있지만, 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남은 자’가 있기 때문에 그나마 우리 사회가 살만한 사회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사례를 더 추가하려고 합니다. ‘남은 자’는 진리란 것이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진군할 때, 상황을 판단하기 위해서 12명의 사람을 선발해서 정탐하도록 했습니다. 12명의 정탐꾼이 돌아와 보고했습니다. 가나안 땅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하고 살만한 땅이라는 사실에는 모두가 일치했습니다. 그러나 10명의 정탐꾼은 그곳의 거주민들이 거인 족속이라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앞에서 메뚜기에 불과하다고 보고했습니다. 정복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오히려 진멸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다르게 보고했습니다. 설사 가나안 거주민이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센 거인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이스라엘의 밥’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대로 계속 진군했던 이스라엘은 결국 가나안을 정복했습니다. 저는 독일의 히틀러 집권 당시, 다른 모든 독일인이 히틀러를 향해서 ‘하일 히틀러’(Heil, Hitler!) 거수경례하며 소리칠 때, 팔짱을 끼고 있는 한 사람의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사진의 사람은 히틀러가 독일의 구원자라는 사실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만수무강을 기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일 히틀러’에 동참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일컬어 ‘남은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자’와 달리 다수의 보통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다수의 자리에 함께하지 않을 때 불안해합니다. 다수의 사람과 다른 생각을 갖거나 다른 모습을 띠는 것이 자신에게 불이익과 손해를 가져올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담에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어떤 집단에서 너무 두각을 나타내면 미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쉽게 수긍하지 않고, ‘아니라’며 강직함을 드러내면, 다른 사람들에게 공박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색깔 없이 무미건조하게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보통 사람들은 세상의 풍조를 쉽게 따르려고 합니다. 아무리 잘못된 관습이라 할지라도 거스를 생각이 별로 없습니다. 모두가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食人) 사회에서 그것이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임을 알지만, 지금까지 그래왔으니 그리 살면 된다고 생각하며 따르는 것입니다. 모두가 인종을 차별하며 사는 사회에서 그 차별이 자신에게 이익을 주기 때문에 옳지 않음을 알면서도 따르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로마서 12:2)라고 당부했습니다.

다수의 보통 사람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우선으로 삼으며 남은 자들의 삶을 자기만 손해를 보는 어리석은 삶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들에게 ‘남은 자’는 그들의 허위를 드러내는 사회적인 경종(警鐘)이자, 그들의 양심이 무뎌졌음을 일깨우는 사회적인 양심(良心)으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남은 자’가 존재하는 한, 그들은 불편하고,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해결하는 길은 ‘남은 자’들의 삶을 어리석다고 비난하며 남은 자들을 자기들처럼 살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남은 자들을 어리석다고 말해야 자신들의 수치스러운 삶을 지혜로운 것으로 미화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 역사는 시류를 따르는 다수의 보통 사람이 아니라 혁명적 인간이었던 소수의 ‘남은 자’들에 의해서 진전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1780년 21살에 영국의 하원의원이 된 부호 출신의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는 영국이 노예무역으로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하고 있던 당시 노예무역 폐지법을 제정하는 데 앞장섰고, 노예제도를 폐지하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정치 인생 전체를 보면, 이 둘을 이루기 위해서 정치생명을 온전히 걸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노력이 결실로 쉽게 맺어졌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1792년 점진적인 노예무역 폐지안으로 동료 의원들을 설득했고, 1807년 2월이 되어서야 노예무역 자체를 전면적으로 폐지하는 법안을 진두지휘했습니다. 평생 노력했던 노예제 폐지법안은 1833년 그가 죽기 며칠 전에 통과되었고, 이듬해에 대영제국 전체에서 노예제들 완전히 폐지할 수 있었습니다. 동료 의원들이 노예무역의 이득과 혜택을 보고 있을 때, ‘남은 자’ 윌버포스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엄한 인간을 먼저 보았기 때문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독일 루터교회의 목사이자 촉망받는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1927년 21살에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교수자격 논문을 쓴 후 1931년 대학에서 교목과 교수로서 사역했습니다. 그는 안락하게 살면서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즐길 수 있었지만, 히틀러 정권의 횡포와 억압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는 히틀러 정권을 반대하고 저항했다는 이유로 목사로서 설교하는 것과 교수로서 강의하는 것을 금지당했습니다. 그러나 굴하지 않았던 그는 1943년 히틀러를 암살하는 음모에 가담했습니다. 결국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1945년 4월 9일 독일의 패망을 한 달 앞둔 시점에 교수형으로 죽었습니다.
우리는 ‘남은 자’ 본회퍼의 고민과 결단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친 운전자가 폭주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해치고 있을 때, 폭주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부득불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친 사람이 모는 차에 희생되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만이 목사로서 나의 과제는 아닙니다. 미친 사람의 운전을 중단시키는 것 역시 나의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미국 침례교의 목사이자 흑인 민권운동가였습니다. 그는 흑인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서 몽고메리에서 버스 타기 거부 운동을 주도했고, 그 일로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흑인도 백인처럼 동등한 시민권과 인권을 누리도록 비폭력 평화운동을 전개하던 중에 인종차별주의자에 의해서 암살당했습니다. 우리는 ‘남은 자’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꿈을 기억하면서, 우리 또한 고상하고 성숙한 꿈을 꾸어야 할 것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살아가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옛 노예의 후손들과 옛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불의와 억압의 열기에 신음하는 저 ‘미시시피주’마저도, 자유와 평등의 오아시스로 변할 것이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 아이가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전태일 열사는 노동운동의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에서 노동운동을 개척한 노동자였습니다. 그는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재단사로서 근로기준법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극한 저임금을 받으며 착취당해야 했던 동료 노동자들의 법적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 노력을 다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한자가 섞인 근로기준법을 읽는 것이 어려워서 대학생 친구가 있기를 간절히 소원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근로기준법이 보장하는 노동 3권, 단결권과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이 노동자들에게 허울 좋은 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현장에서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드디어 그는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소리를 외치며, 법전과 함께 자기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분신했습니다. 그는 그날 밤 10시경에 죽음을 맞이했는데, 그때 나이가 22살이었습니다.
전태일 열사, 그는 인간을 기계처럼 취급하는 기업주들과 이를 방관하는 공무원들, 비인간적인 상황에 침묵하던 언론계를 향해서 ‘이러면 안 되는 것이 아니오’라고 외쳤던 노동자로서, 노동 현장은 물론이고 지식인 사회에까지 경종을 울렸던 진정한 ‘남은 자’였습니다.

저는 최근에 ‘유퀴즈’ 201화 [사건을 막는 발명가 경찰 유창훈 경정] 편을 시청하면서, 이분도 ‘남은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1989년 순경으로 경찰의 길에 들어섰고, 지난 34년 동안 경찰에 봉직하면서 꼭 필요한 몇 가지 발명과 제안을 했던 분입니다. 그는 횡단보도 신호등 옆에 ‘장수의자’를 부착하는 발명을 했습니다. 노인들이 횡단보도 대기 시에 쉬었다 감으로써 교통사고를 줄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특허권을 양보하고 180만 원의 사비를 들여서 ‘장수의자’ 60개를 주문 제작하여 2019년 4월 관내에 설치했는데, 그 후 70여 개 지방자치단체가 2,500개 이상 ‘장수의자’를 제작해서 설치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보행자들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고 횡단보도의 신호등 정보를 인지하지 못하다가 갑자기 건너려고 하다 보면 사고를 당할 수 있음을 착안하여, 횡단보도 바닥에 LED 신호등 설치를 제안했다고 합니다. 그는 사고 후의 처리보다는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그는 드론이 생소했던 시절, 인명구조 활동 때 헬기가 접근하기 어려운 현장에서 실종자를 수월하게 찾을 수 있도록 드론 사용의 도입을 제안했고, 도시가스 배관에 특수형광물질의 도색을 제안해서 무단침입하는 범죄자들의 위협을 예방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그는 다른 경찰들이 그냥 지나치고 있을 때, 시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을 찾아서 구체적으로 실천했던 ‘남은 자’의 전형이었습니다.
우리가 유창훈 경장님의 사례를 보면, 우리 중 누구라도 책임의식을 지니고, 관심과 열정을 발휘하면, 생활 속에서 남은 자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사랑하는 학우 여러분, 우리가 관심을 갖고 역사와 사회 주변을 돌아보면, ‘남은 자’들이 적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남은 자’만이 우리 역사와 우리 사회의 희망일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역사의 발전을 이끄는 남은 자의 비전과 열정과 실력을 갖추도록 노력하며 준비합시다. 누가 무어라고 해도 남은 자로서 자신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갑시다. 우리 말고도 남은 자들이 도처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음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우리 남은 자들이 함께 연대하기만 하면 부정부패와 불의로 가득한 세상이라도 건강하게 바꿀 수 있음을 절대로 명심합시다.

사랑하는 학우 여러분, 죽은 물고기는 물의 흐름대로 그저 흘러갈 뿐입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물고기는 언제라도 물의 흐름을 역류하며 생동감 있게 헤엄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살아있는 물고기처럼 진실 위에 굳건히 서서 진리를 추구하며 참된 남은 자로서 역사와 사회에 희망을 주는 인물들로 우뚝 설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여러분, 경청해주셔서 고맙습니다.

ㅡ 정종훈 목사 (연세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