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의인인가, 죄인인가 (마 9:9~13)

ree610 2023. 6. 11. 14:18

성령강림절 후 둘째 주일인 오늘(2023. 6. 11),
연세대학교 대학교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의인인가 죄인인가
(창세기 12:1-7, 로마서 4:13-18, 마태복음 9:9-13)

성령강림절 후 둘째 주일예배에 참석하신 연세대학교 대학교회 교우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인도하심이 늘 함께하기를 축원합니다.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교우 여러분을 오랜만에 뵙게 되어 참 기쁘고, 교우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게 되어 참 감사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의(自己義)에 빠져서 살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성경의 바리새파 사람들이 자신들의 부끄러운 삶을 덮어두고, 세리와 창기 등을 향해서 손가락질하며 죄인이라고 비난했던 상황과 비슷해 보입니다. 우리 사회는 진영논리가 매우 강해서 자기와 진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한치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 진영은 언제나 맞고, 상대 진영은 언제나 틀리다는 식입니다. 자기 진영은 최선이고, 상대 진영은 최악이라고 말합니다. 자기 진영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무슨 일이든 정당화하지만, 다른 진영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동일한 내용이라도 비난하며 조금도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진영논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기 진영의 사람들과 대화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입장을 반복하고 강화할 뿐입니다. 다른 진영의 사람들과도 대화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상대의 이야기에는 귀를 막고, 자신들의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하고 있을 뿐입니다. 전형적인 ‘자기의’이자 ‘내로남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서정과의 마태복음서에 등장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은 세리 마태의 집에서 함께 음식을 나누는 다른 세리와 죄인들을 싸잡아서 비난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까지 ‘같은 패거리’로서 보고 죄인으로서 취급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과 어울려서 음식을 드시오?”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같은 부류라는 것입니다. 계급과 수준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세금을 걷는 세리들은 로마제국의 하수인이고, 동족의 등을 처먹는 사기꾼이기에 당연히 죄인들이었고, 이들 세리들과 유유상종하는 부류라면 마찬가지로 죄인들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파 사람들의 태도에는 자신들은 의인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죄가 있더라도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청산할 수가 없고, 그러다 보니 죄 가운데 머물러 자신의 죄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자기의’를 잘 아셨기에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파 사람과 세리, 두 사람의 기도내용을 대비하며 비유로 말씀(누가복음서 18장)하신 적이 있습니다. 비유에 따르면, 바리새파 사람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당당하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십계명과 율법을 따라서 의롭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죄인으로 사는 세리와는 아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성전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당당하게 살기는커녕 부끄럽게 살았으며 죄인 중의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세리는 그저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리겠다며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세희 작가가 쓴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보면, 어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굴뚝 청소를 끝내고 내려온 두 아이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한 아이는 얼굴에 검뎅이가 묻어 더러웠고, 다른 아이는 깨끗하다고 했을 때, 누가 얼굴을 씻겠느냐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의아해하자, 선생님이 스스로 대답합니다. 얼굴이 깨끗한 아이가 더러운 얼굴의 아이를 보고 자신의 얼굴이 더러울 것이라 생각하며 씻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한 후에 선생님은 동일한 질문을 다시 학생들에게 합니다. 그러자 학생들은 쉽게 대답합니다. 얼굴이 깨끗한 아이가 씻을 것이라고. 그러나 이번에는 선생님이 아니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두 아이가 함께 굴뚝 청소를 했다면 둘 다 얼굴에 검뎅이가 묻어야 할 텐데, ‘누구는 검뎅이가 묻어 더럽고, 누구는 검뎅이가 묻지 않아 깨끗하고’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라도 ‘나는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결단코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세상에서 죄와 무관한 채로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3장 10절에서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라며 단호하게 말했던 것입니다.

다시 바리새파 사람들의 비난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어울려서 음식을 드느냐”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비난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건강한 사람은 치료해야 할 것이 없으니 의사가 필요 없음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병든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질병을 치료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서 ‘나는 건강하다, 완벽하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우리 육신은 연약해서 하나를 치료하고 나면 또 다른 치료 거리가 생겨납니다. 잠시 치료하는 것을 멈추는 시간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질병과 함께 평생 살아야 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의사가 필요 없다고 해서 자만할 것도 없고, 지금 의사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해서 절망할 것도 없습니다. 인간의 삶이란 것이 원래부터 ‘그런 것이려니’ 하면서 살면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호세아서 6장 6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희생제물을 잡아서 그럴듯하게 제사하며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자비로 품는 것을 더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과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키며 자기의에 빠져서 사는 것보다는 온 선지자와 율법의 핵심 강령인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을 더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일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써 신앙인의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자기 삶의 자리에서 사랑을 실제로 나누며 생활하는 것을 더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또는 ‘신앙인이다’라는 자의식에 안주해서 사는 삶보다는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며 자비를 실천하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 신앙인다운 삶을 더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예배를 드리는 우리는 희생제물보다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자비를 실천할 것인지, 어떻게 이웃과 사랑을 나누며 살 것인지를 질문하고, 그 질문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똑같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쌍둥이라도 서로 다른 인격체입니다. 형 쌍둥이를 동생이 대체할 수 없고, 동생 쌍둥이를 형이 대체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일반인들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백인이 백색입니다. 모두가 다른 색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는 왜 나와 다른 색이냐 비난하는 데 익숙합니다. 나의 색은 맞고 너의 색은 틀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색과 너의 색이 다름을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서로 색이 다르니 나의 색이 오히려 돋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서로 색이 다르니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두가 같은 색이라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매우 무미건조할 것입니다. 나의 색은 나와 다른 너의 색이 있으니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고, 너의 색은 너와 다른 나의 색이 있으니 존재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가운데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 하나가 되어서 조화로운 삶을 사는 것을 칭찬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잘못 적용하면 폭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부부는 사실상 이심이체로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서로 도우며 사는 관계인데, 일심동체를 주장하다 보면, 힘센 배우자에게 약한 배우자가 종속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쪽은 살고, 다른 쪽은 죽어야 하거나, 한쪽만 드러나도록 다른 쪽은 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리새파 사람들로서의 자기 특징이 있고, 세리들은 세리들로서의 자기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의 삶의 여정과 사는 삶의 자리는 달라도 아주 달랐습니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이든 세리들이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자기중심의 이기심과 탐심으로 가득 차 있는 데다가, 욕망과 욕정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리새파 사람들이든 세리들이든 인간 모두는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절실하게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이 세리들에 대해서 죄인이라고 비난했던 것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스스로를 의인이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해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리들을 죄인이라 비난하는 바리새파 사람들, 너희 자신이 죄인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죄인이라 여기는 세리들은 죄를 청산하고 의롭다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지만, 스스로 의인으로 착각하는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은 영원한 죄인으로 머물 수밖에 없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정과 마태복음서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예수께서 주변의 비난하는 시선과 상관없이 세리 마태에게 친히 다가가시어, “나를 따라오너라.” 말씀하시며 세리 마태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는 누군가에 대한 세상의 평판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흔적만으로 누군가를 예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만나는 사람은 누구라도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지금까지 살아온 누군가의 과거보다는 이제부터 멋지게 살아갈 누군가의 미래가 더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죄를 지어서 질병 가운데 있다고 취급당하던 환자들을 찾아가 치유해주셨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극악한 환경에서 그것을 감수하며 살아야 했던 세리와 창기들을 찾아가 위로해주셨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조차도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시며 새롭게 살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아 고독에 몸부림쳐야 했던 사회적인 약자들을 찾아가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예수 앞에서는 누구라도 있는 모습 그대로, 맨 사람 그 자체로 대접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었고, 이러한 복음을 전하며 실천한 예수를 우리는 복음 자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 말씀하시며 제자로 부르실 때, 세관에 앉아있던 세리 마태는 즉시 응답했습니다. 곧바로 일어나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자신을 죄인으로 취급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친근히 다가오시어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고 초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세리 마태는 이 순간을 놓치면 평생 후회하는 삶을 살 것이라 여겼기에 기꺼이 예수를 따라나섰습니다. 오늘 성서정과 창세기 본문말씀에 나오는 아브라함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75세의 나이가 되었어도 자식 하나 없이 고향 땅에 머물러 살고 있었습니다. 향후 인생에서 달라질 것이 없으니 별 희망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아무런 의미 없이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초청의 말씀을 외면했더라면, 그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족장’으로, ‘믿음의 조상’으로 자리 잡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큰 민족을 이루며 세상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을 누리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약속을 믿음으로 미리 바라보며 가나안 땅을 향해서 담대히 떠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하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열려진 미래를 향해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살았느냐는 것보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 것이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내가 지금까지는 죄인으로 살았다고 할지라도,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신앙하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우리를 찾아오신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그분을 즉시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의 길이 우리의 길이 되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진리가 우리 삶의 기준이 되며, 예수의 십자가 고난이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의 순종이 없거나, 예수를 따르는 신앙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된 신앙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 목사의 말대로,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를 싸구려 은혜로 전락시키는 것이 될 것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연세대학교 대학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자기의를 자랑하며 누군가를 죄인이라 함부로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자비를 아낌없이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자비의 마음을 품고 누구라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죄인인 우리가 의롭다 인정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신 예수처럼 누구라도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친구로서 다가가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 모두 예수의 제자로서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의기소침한 사람들과 세상이 죄인이라 규정한 사회적인 약자들, 그리고 차별당하는 소수자들에게 예수처럼 관심을 주고, 사랑을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따르는 제자로서 살아갈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서 진정한 소망과 참된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어, 세상에 진정한 소망과 참된 기쁨을 주는 신앙인으로 살아가기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ㅡ  정종훈 목사(연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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