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카소의 고향, 말라가
일정에 약간 변화를 주어 지중해의 발코니라 불리는 네르하의 바다 풍경을 포기하더라도 말라가에서 피카소를 충분히 누리기로 했다. 그래서 1인당 10유로씩 갹출해서 피카소 뮤지엄을 추가로 온라인 예약해 그의 생가 탐방에 연이어 그의 230여점 작품이 전시된 그곳으로 직행해 그의 작품세계에 다들 푹 빠져들었다.
피카소가 스페인을 먹여살린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가 남긴 3만 5천여 점의 방대한 작품은 수조 원의 금전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전 세계에 유명 갤러리나 박물관 치고 그의 작품 한두 점 소장하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이다.
피카소는 한국과도 각별한 인연이 있는데 그의 반전 3부작으로 '게르니카', '시체 구덩이'와 함께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한국에서의 대학살'이란 그림이 꼽히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서 총을 든 군인이 미군이고 살육피해자가 한국의 민간인이란 해석으로 이 작품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특히 피카소가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한 전력으로 그는 한때 CIA와 FBI에 의해 미국 내 작품 거래 일체에 관한 조사 명목으로 정치적 탄압을 받았고, 한국에서도 피카소란 이름을 붙여 생산한 학용품 회사 대표가 반공법 위반으로 법적 제재 대상이 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말라가의 두 피카소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몇 가지 단편적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어려서 미술학교를 다니다 도중에 때려치웠지만 누드 데생은 꾸준히 했다는 것, 그의 초기 그림에 대해 전문화가인 부친은 매번 못마땅히 여겼지만 모친은 내내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는 것, 그가 로마, 나폴리 등지로 가족여행을 다녀오면서 고대 신화적 인물이나 반인반수 동물의 이미지에 필이 꽂혀 한동안 이런 계통의 작품을 낳았다는 것, 그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고 여성과 동물을 좋아했다는 것, 특히 그가 사랑한 여인을 모델 삼아 여성 흉부나 머리통 그림을 많이 그렸다는 것, 단순히 회화 영역에 국한하지 않고 세라믹 그림, 조각 등의 작품 생산 작업에도 왕성하여 미술의 장르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갔다는 것,
그가 평생 딱 한 편의 시를 써서 남겼다는 것, 어린이의 유아적 회화 이미지에서도 영감을 받아 작품 제작에 활용했다는 것, 그가 특정 정치이념에 예속되지 않았지만 인간의 자유와 평화를 옹호하며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는 일관된 기조로 냉전체제에 꾸준히 저항해왔다는 것, 그가 사랑하여 동거하거나 결혼한 6명의 여인들은 그에게 탐미적인 뮤즈로 적잖은 영감을 주었지만 그 여인들은 그의 사랑을 독점하길 갈구하며 고통스러워하였고 또 일부는 미쳐갔다는 것 등이다.
긴 하루의 여정을 접고 저녁식사 자리에서 주변 사람들은 피카소의 작품을 감상한 각자의 소회를 남겼다. 내 룸메이트는 피카소가 자신을 신에 빗댈 만큼 거만한 사람이었고 반 고흐가 고통 속에서도 밝은 색채를 지향한 반면 피카소의 작품은 어둡고 복잡하며 혼란스런 내면을 반영하는 것 같다고 했다. 특히 그가 큰 글씨로 싸인하던 버릇이 그의 거만한 심리를 암시하며 싸인 글씨 크기가 예술가적 성공의 크기에 비례한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했다.
옆자리에 앉은 유명 시인의 아내 김명순 씨는 황소 연작 9점을 보면서 자유분방한 시인 남편을 견디며 살아온 자신의 삶이 그 작품 속에 요약되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며 충일한 예술적 감동을 고백했고, 피카소의 거만한 심리와 어지러운 여성 편력은 일종의 탐미주의적 모험의 일환으로 외부에서 주어진 틀을 깨고 탈주하려는 예술가적 에너지의 원천 아니었겠냐고 관대한 입장을 피력했다. 나도 그런 거만함과 방만함의 모험어린 열정이 없었더라면 그는 아버지가 요구한 범생이 예술가의 울타리 안에 갇혀 깨작거리다 인생 종 쳤을 거라고 한 마디 거들었다.
한 평범한 인생도 그렇거니와 불세출의 예술혼을 불태우며 90여 평생을 살다간 피카소 같은 사람을 하나의 단선적 관점에 가두고 이러쿵 저러쿵 품평하는 건 예의가 아닐 듯싶다. 말라가에 살다보면 다들 빼빼 말라갈 수밖에 없다는 현지 가이드의 농담 속에 피카소의 그림도 오래된 농담처럼 그 여운이 길게 늘어졌다.
ㅡ 차정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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