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준관 교수님의 입관 예식 말씀.
세 번째 생일 (마태복음 25:20-21)
지난해 8월 5일 연세대학교 동문회관에서 은준관 선생님의 구순을 축하하며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것이 생각납니다. 선생님께서는 비록 휠체어를 타셨지만, 그것 말고는 구순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좋아 보이셨습니다. 얼굴은 젊은 시절 처음 뵐 때 못지않게 정정하셨고, 한국교회 개혁에 대한 열정은 어느 현역 신학자보다도 뜨거우셨습니다. 당신께서 개발하신 TBC 성서연구 보급과 교회학교 새로 세우기 운동 관련해서는 희망으로 가득 차 계셨습니다.
그렇게 뵈었던 선생님께서 3개월이 지나지 않아서 요양원과 중환자실과 자택을 왔다 갔다 하시며 치료받으시던 중 금주 1월 16일 월요일 아침 자택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는 사실이 믿기지를 않습니다.
이날 장녀이신 은원예 집사님으로부터 선생님의 소천 소식을 받고, 세브란스 장례식장 준비를 위해 응급실로 가서 사망진단서를 기다리며 누워계신 선생님의 시신을 뵈었습니다. 선생님의 시신은 주무시는 모습 그대로 온화함과 평화로움 그 자체를 담고 있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은준관 선생님께서 연세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신 것은 1979년 9월 1일이었습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연세대학교에 부임하시며 개설하신 첫 번째 강의를 수강하면서 선생님과의 43년 인연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첫 강의에서 만난 우리 78학번에 대해서 특별한 애정을 가지셨고, 당신의 책을 출판하시면 학부 학생인 우리에게 친히 싸인하신 책을 일일이 나누어주셨습니다. 강의하실 때는 해박한 지식과 함께 하나라도 더 가르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서 매우 성실하게 강의하셨습니다. 세월이 하수상 하던 군사정권 시절이었기에 수시로 휴강이 있었고, 다른 교수님들께서는 강의실에 여유있게 들어오셔서 일찌감치 강의를 끝내시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선생님께서는 많이 다르셨습니다. 그런 선생님이 좋아서 우리 동기는 80년, 81년, 82년 연초마다 화곡동에 있는 선생님 댁을 방문하여 세배를 드렸습니다. 선생님과 사모님께서는 우리가 세배를 드리면 겸연쩍어하시면서 좋아하셨고, 사모님께서는 떡국을 손수 마련하시어 우리의 즐거움을 더해주셨습니다.
저와 선생님의 관계는 다른 동기들보다 더 각별했던 것 같습니다. 학부 졸업논문을 쓰던 시절이었기에 저는 선생님이 좋아서 기독교 교육 분야의 주제로 논문을 쓸 것을 계획했습니다. 이왕 쓸 바에는 정성을 들여 잘 써서 [연세문화상 학술상]에 도전해야겠다고 작정했습니다. 1981년 1학기 중간고사 직후에 선생님의 연구실을 방문하여 논문을 어떻게 써야 좋을지 질문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두터운 만년필 특유의 글씨를 써가시며 참고문헌을 선택하여 독서하는 요령에서 가목차를 결정하고 논문을 쓰는 요령에 이르기까지 자상하게 세세히 지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해 여름 선생님께서는 미국을 방문하셨는데, 저의 논문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구입하신 여러 권의 원서들을 빌려주셨습니다. 저는 그 책들을 제록스 복사해서 읽은 후에 [파울로 프레이리의 프락시스 개념과 그 비판]이란 제목의 논문을 작성했고, 그해 12월 5일 안세희 총장님께서 시상하시는 연세문화상 학술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에게 주어진 명예와 영광은 오직 선생님의 세세한 지도와 자상한 배려의 결실이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1997년 제가 관동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학과와 교육대학원 종교교육 석사과정을 책임질 때, 선생님을 특별 강사로 초청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영동고속도로가 잘 닦여서 강릉까지 2시간 30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지만, 그 당시 대관령의 꼬불꼬불한 도로를 거쳐 강릉까지 오는 것은 시간도 많이 소요되고 불편한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초청에 기꺼이 응해주셨고, 지방대학의 학부 학생들과 석사과정 대학원생들을 위해서 강연을 열정적으로 해주셨습니다. 막 교수가 된 제자를 격려하기 위해서 불편한 길을 감수하셨던 셈입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오히려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분에 넘치는 큰 대접을 해주었다” 말씀하시며 저에게 감사의 편지를 따로 보내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큰 사랑과 함께 어떤 교수가 되어야 할지 교수의 좌표를 찍어주셨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선생님의 50%도 흉내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큰 부끄러움입니다.
제가 2000년 연세대학교 교목실 소속의 교수로 임용되었을 때, 선생님께서는 막 은퇴하신 상황이셨지만,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제가 부족한 저서를 출판해서 보내드리면 그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사모님께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셔서 암 수술을 받고 치료를 이어가실 때, 마침 저는 연세의료원의 원목실장 겸 교목실장의 보직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병실을 방문해서 기도를 종종 했던 것이 좋으셨는지 만나실 때마다 감사의 인사를 하셨습니다. 그 후 사모님께서 소천하셨을 때는 정동제일교회에서 거행되었던 장례예식의 기도를 저에게 부탁하셔서 제가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선생님과의 지난 43년의 인연을 돌아보면,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큰 스승님으로서 많은 것들을 베풀어주셨는데, 그에 비해 저는 제대로 응답한 것이 없어서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사실 선생님께서는 저에게만 특별한 분은 아니셨습니다. 연세대학교 봉직 이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로 계셨을 때도, 연세대학교를 은퇴하신 이후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해 설립하신 실천신학대학원 대학교에서도 모든 제자에게 동일한 열정과 관심을 쏟으신 다정다감한 스승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은준관 선생님, 이제는 세상에서 더는 뵐 수 없다는 것이 우리 모두의 큰 슬픔입니다.
지난해 10월 18일 100세 장수를 하시고 돌아가신 유동식 선생님이 계십니다. 유동식 선생님 역시 연세대학교에서는 큰 스승님 가운데 한 분이십니다.
그분의 사모님께서 쓰신 시 가운데 ‘세 번째 생일’이란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그 시에 의하면 첫 번째 생일은 부모님에 의해 세상에서 태어난 날이고, 두 번째 생일은 신앙으로 거듭난 날이며, 세 번째 생일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영원한 부활의 삶에 이르게 된 날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은준관 선생님께서는 부친 은영순 탁사님과 모친 정태규 권사님의 장남으로서 1933년 12월 9일 겨울에 첫 번째 생일을 맞이하셨습니다. 어린 시절은 황해도 옹진군에서 포목상을 크게 운영하신 부모님 슬하에서 호의호식하시면서 부러운 것 없이 성장하셨습니다. 첫 번째 생일 이후 재관, 길관, 병관 세 동생을 만나셨는데, 네 형제는 누가 보아도 우애가 넘치는 형제들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둘째 동생 은길관 장로님은 선생님께서 실천신학대학원 대학교를 설립하실 때, 그리고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연합교회를 운영하실 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힘이 되어주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은길관 장로님을 은준관 선생님 사모님의 장례예식이 거행되었던 정동제일교회에서 처음 뵈었는데, 그때 이후로 제가 보직을 수행한 연세의료원 신촌세브란스병원에 거액의 기부금을 따님들과 함께 지금까지 기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제가 담임목사로서 섬기던 연세대학교 대학교회에 출석하셨고, 지금까지 성실하게 출석하고 계십니다. 이는 은준관 선생님 네 형제분의 우애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라고 여겨집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은준관 선생님께서는 1944년 험악한 일제시대에 가천국민학교를 다니실 때, 동네 교회의 목사님 아들 박신원과 반에서 단짝이 되셨는데, 착하고 성실한 단짝 친구의 초대로 교회를 처음으로 방문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를 강력히 경험하며 회심함으로 두 번째 생일을 맞이하셨습니다. 교회 창문 사이로 살짝 비치는 아침 햇살이 강단 위의 ‘놋 십자가’를 밝힐 때 선생님은 경외감과 황홀경을 느꼈고, 그 후로는 한 번도 주일학교를 빠지지 않았다고 고백하셨습니다. 해방 이후 중학교 1학년 때부터는 주일학교 서기로, 보조교사로 활동하셨고, 한국전쟁 중에는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거치면서 하나님의 은총과 보호하심을 경험하셨습니다.
1952년 선생님께서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기를 원하셨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고, 결국 친구 박신원이 재학 중인 감리교신학교에 입학하시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출발로 해서 목사님의 따님이신 사모님을 만나 결혼하시게 되었고, 또한 군목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전역 후 미국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신 후에는, 감리교신학교 교수로서, 정동제일교회의 담임목사로서, 연세대학교 교수로서, 실천신학대학원 대학교 총장으로서 학자와 목사, 그리고 교육행정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 길의 흔적이 지금 세 대학교와 정동제일교회에 휘황찬란하게 남아 있음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은준관 선생님께서는 마침내 2023년 1월 16일 오전 8시 40분, 세 번째 생일을 맞이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평생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특별히 목회자들의 재교육과 교회학교 운동을 위해서 헌신해오신 선생님을 당신의 넓은 품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이 다섯 달란트 받고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을 칭찬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착하고 충성된 나의 아들 준관아, 네가 세상에서 나를 위해서 정말 많은 수고를 하였구나. 이제 나와 함께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도록 하자.” 치하하시며 환영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6년 전 영원한 삶의 자리로 먼저 가신 사모님을 만나시어 즐거운 회포를 푸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선생님의 세 번째 생일로 인해서 섭섭함과 아쉬움을 금할 수 없지만, 선생님께는 이날이 부활의 기쁨과 영광의 순간이 되셨을 것입니다. 또한 선생님께서는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라는 시의 내용처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을 잘 끝내시고, 이렇게 고백하시면서 선하고 인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셨을 것입니다. “참 아름다운 세상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네 자녀로 인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참 아름다운 세상에서 삶을 풍성하게 해준 친구와 친지들, 사제의 정을 나눈 제자들로 인해서 즐거웠습니다. 참 좋은 일터에서 영예를 누리며 일하게 하신 주님, 세상의 삶을 고통없이 잘 마감하도록 도우시고 영원한 부활로 이끄신 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당신을 진심으로 찬양합니다.”
이제 선생님을 입관하고 나면 우리는 선생님의 육신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여전히 남아서 계속 살아야 하는 우리는 선생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억하면서, 특별히 선생님께서 열정을 다하셨던 [TBC 성서연구] 사역과 [교회학교 새로 세우기] 사역을 잘 계승하고 강화하며 발전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도 언젠가는 세 번째 생일이 도래할 것을 기다리면서 우리의 남은 인생을 기회로 하여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헌신하고 기여해야 할 것입니다.
91년의 인생을 사시면서 다섯 달란트를 남기시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으셨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은준관 선생님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충성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위로하심이 은준관 선생님께서 사랑하신 남은 가족들, 자녀분들과 형제분들에게 그리고 입관예식에 참여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넘쳐나기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ㅡ 정종훈 교수 (연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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