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의 길 (시 133:1-3, 엡 2:14-17, 마 5:43-48)
남원제일교회의 평화통일주일 예배에 참석해서 함께 예배드리며 말씀을 나누게 된 것을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남원제일교회 하면, 저에게 떠오르는 몇 가지 이미지가 있습니다. 환경운동과 지역 시민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세상을 열심히 섬기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지역의 작은 교회 목회자들을 위해서 남원성서학당을 운영하며 에큐메니칼한 협력을 선도하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당회의 남녀평등을 위한 노력이 보수적인 한국 교계의 현실과 달리 대단히 모범적인 교회라는 것입니다. 하나 더 추가하면, 진실하고 변함없는 장효수 목사님이 담임목사로서 사역하는 참으로 안정된 교회라는 것입니다. 오늘 평화통일주일 예배에 참석하신 남원제일교회 성도님들과 성도님들의 가정과 일터 위에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가득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에서 평화를 찾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누구나 평화를 원하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든 집단적인 차원에서든 평화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평화를 누리기는커녕 평화가 결핍된 상태에서 긴장과 대립, 갈등이 오히려 첨예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들이 당리당략과 이기적인 욕망으로 타협과 협력의 기술을 발휘하지 못하고, 정쟁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평화가 없습니다. 기업인들이 기업의 발전과 최대 이윤 창출의 지나친 욕심으로 노동자들과 공존하려 하지 않고, 일할 만한 조건 속에 행복하게 일해야 하는 노동 현장이 더 열악해지고 있으니 평화가 없습니다. 법과 원칙 위에서 국민을 섬겨야 하는 검찰과 사법부와 언론이 역사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권력의 카르텔을 구성해서 자신들의 무소불위(無所不爲)한 특권만 행세하고 있으니 평화가 없습니다.
한편, 산업화시대 이후로 인류 전체가 하나님의 선물인 생태환경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결과, 기후 온난화로 인해서 이상기후가 일상화되고, 폭염과 폭우로 살아있는 모든 생명이 고통을 겪으니 평화가 없습니다. 2019년 12월에 시작된 세계적인 재난 코로나가 사라지는 듯하다가 최근 확진자가 다시 5, 6만 명씩 나오면서 우리 일상생활의 자유로움과 기쁨이 제한되니 평화가 없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미국과 소련 강대국에 의해서 강제로 분단된 한반도에서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맺은 지 70년이 지나도록 평화협정은커녕 종전선언조차 하지 못한 한반도의 남북관계가 날마다 험악해지니 평화가 없습니다. 특히 한반도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핵 보유국가가 된데다가 대륙간 탄도탄으로 미국 본토까지 위협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되자, 한미일 군사동맹이 강화되면서 언제라도 전쟁이 일어날 수 있게 되었으니 평화가 없습니다.
이처럼 평화를 찾기 어려운 한반도와 우리 삶의 자리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4절 이하에서 이렇게 선포한 바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그분은 오셔서 ...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사람들을 화해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직후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을 처음 만나셨을 때 “(너희가) 평안하냐?”(마 28:9)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는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눅 24:36)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한 공사역 최초의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평화였고,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전하신 예수님 자신이 우리에게는 복음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높은 담벼락을 쌓고서 갈기갈기 찢기어져 있는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선하고 아름다운 동거를 이루기 위해서 자기가 처한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평화의 복음을 수용하고, 무엇보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시간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자기 삶의 자리에서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지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보통 사람들은 ‘나’를 살리기 위해서 수많은 ‘너’를 죽이려고 합니다. ‘나’만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길이라면, ‘나’ 아닌 ‘너’는 죽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위한 희생물이 되어야 하고, ‘나’를 위한 도구나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너’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너’ 역시 ‘나’를 포함한 다른 수많은 ‘너’를 죽이려는데 주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나와 너’, ‘너와 나’의 관계는 긴장과 갈등, 대립과 투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세상의 악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을 위해서 생각처럼 죽어주지 않으면, ‘너’ 죽고, ‘나’ 죽자는 듯이 덤벼듭니다. ‘나’ 혼자 죽기는 억울하다는 막가파식의 행동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세상에 대해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은 보통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길입니다. 수많은 ‘너’를 살리기 위해서 ‘나’를 죽이는 길입니다. ‘너’를 살릴 수 있다면, ‘나’는 죽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 ‘너’를 위한 희생물과 ‘너’를 위한 도구가 되어 ‘나’를 ‘너’에게 기꺼이 내주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 가운데 황금률(Golden Rule)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말씀을 황금률이라고 지칭하는 이유는 금같이 귀한 삶의 고고한 원칙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황금률을 give and take의 조건적인 원칙처럼 오해하고 있습니다. 나를 대접하지 않는 다른 사람에게 대접을 받기 위해서 내가 먼저 그를 대접하면, 언젠가 그도 나를 대접할 것이라는 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황금률의 원래 의도는 상대의 반응과 상관없이, 상대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바로 그 내용과 바로 그 방식으로 조건 없이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황금율보다 더 고고한 삶의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너’를 위해 ‘나’를 죽이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보복원리를 주장하는 세상과 달리 폭력의 악순환은 물론이고 폭력 그 자체를 멈추게 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수많은 다른 ‘너’에게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수많은 ‘너’의 태도와 상관없이 십자가의 길을 자발적으로 걸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진정 십자가의 길로 나아간다면, 우리 삶의 모든 자리에, 우리의 가정과 일터에, 우리의 교회와 지역사회에, 전쟁의 위기 가운데 있는 우리 한반도에 긴장과 갈등, 대립과 투쟁이 해소되고, 진정한 평화가 움터 오르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 원수사랑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43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원수사랑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우리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들과 다를 수 있는 분기점, 자기 정체성은 여기 원수사랑에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고, 가족 친지 친구들을 사랑하는 것 역시 당연합니다. 오늘 세상의 문제는 당연한 사랑조차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한 사랑은 물론이고 원수사랑까지 실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독일의 개신교협의회가 발표한 ‘평화사회백서’에 의하면, 원수사랑은 원수에게 굴복하는 것도 아니고, 그에게 알랑거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원수를 희망과 공포, 공격성에 의해 움직여지는 죄 있는 한 인간으로서 승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천사화하지 않고, 원수를 악마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양쪽의 실제 요구와 관심을 과장된 것으로 보지 않고, 객관적인 것으로 보며, 자기 안에서 원수를, 원수 안에서 자기를 동시에 고려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대통령이었던 바이젝커 대통령은 이를 ‘지성적인 원수사랑’으로 호소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원수를 괴롭히지 않는데, 원수는 우리를 괴롭힌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세계평화를 원하지만, 원수는 전쟁을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군의 전투력은 방어용이지만, 원수의 전투력은 세계지배의 주도권을 지향하는 공격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도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인식할 때,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대화를 증진할 수 있고, 지성적인 원수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의미의 원수사랑은 원수의 인격성을 승인하는 것이고, 원수에 대한 왜곡된 편견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원수를 공동의 삶을 위한 동반자로서 보고, 신뢰 형성을 통해 상호 안전보장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안전보장이란 자신을 위해서 자신에 의해서만 보증되지 않고, 모두를 위해서 원수와 함께 공동으로 노력할 때만 보증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친구 아니면 원수’라는 극단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떨쳐버리고, 원수라도 함께 살아야 할 사랑의 동반자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두 번 보고 싶지 않은 인간관계에서도, 남남갈등의 우리 대한민국에서도, 서로 괴뢰라고 호칭하는 남북 대립의 한반도에서도 더불어 사는 공존의 평화가 도래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비유 가운데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강탈하고, 반은 죽여서 길가에 팽개쳤습니다. 그 곁을 제사장이 지나갔고, 레위인이 지나갔지만, 그들은 강도 만난 자를 외면하고 자신들의 가던 길을 급하게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이웃이 되었습니다. 레오나드 그리피쓰(Leonard Griffith)라는 신학자는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는 세 가지 삶의 철학이 담겨있다고 해설한 적이 있습니다.
첫째, “너의 것은 나의 것이다. 나는 그것을 가지려고 한다.”는 강도의 철학입니다. 강도는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남의 것을 억지로 강탈합니다. 남이 땀 흘려서 거두어들인 결실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 거두려고 합니다.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물리적인 폭력으로 분풀이를 합니다. 둘째, “나의 것은 나의 것이다. 나는 그것을 지키려고 한다.”는 두 종교지도자의 철학입니다. 두 종교지도자는 강도 만난 자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자신들의 소유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자신들이 노력해서 소유한 것을 자신만 누리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자신들의 소유를 남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합니다. 셋째, “나의 것은 당신의 것이다. 나는 그것을 당신과 나누려고 한다.”는 사마리아 사람의 철학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기쁘게 생각하며 아낌없이 나누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땀으로 확보한 자신의 소유라도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누군가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미리 준비하기나 한 것처럼 최선을 다해서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의식주의 결핍으로 어렵게 사는 사람들, 특히 북한 동포들이 힘겹게 살고 있습니다. 최근 영국 BBC 방송 보도를 보니, 영양실조로 고생하는 북한 주민이 많고, 기아로 죽는 주민도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일어난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경제력 10위의 선진국으로서 국민 모두 비교적 풍요롭게 살고 있습니다. 이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어낸 우리 국민의 저력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과 도우심의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힘겹게 사는 북한 동포들을 외면한다면, 마지막 심판의 날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심판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나를 외면하고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악하고 게으른 사람들아, 너희는 영원한 벌로 들어가라.”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철학을 가지고, 억압과 착취가 팽배한 세상에서, 기아와 아사가 편만한 한반도에서 기꺼이 나누며 더불어 먹고 마시는 평화의 세상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 일상생활 속에서 평화를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박노해 시인의 시 가운데 ‘평화 나누기’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이 시에 의하면, 평화 나누기란, 일상에서 작은 폭력을 거부하며 사는 것입니다. 세상과 타인을 비판하듯 내 안을 잘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현실에 발을 굳게 딛고 마음의 평화를 키우는 것입니다. 경쟁하지 않고 각자 다른 역할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일을 더 잘 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좀 더 친절하고 더 잘 나누며 예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전쟁의 세상에 살지만 전쟁이 내 안에 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총과 폭탄 앞에서도 온유한 미소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폭력 앞에 비폭력으로 그러나 끝까지 저항하는 것입니다. 전쟁을 반대하는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이 평화의 씨앗을 눈물로 심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하는 기독교 신앙은 인간 삶의 모든 자리에서 언제나 일관되게 드러나야 하는 생활신앙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앙생활은 가정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 문화생활 등 다양한 생활 영역 가운데서 부수적으로 추가되는 또 하나의 생활 영역처럼 오해하게 만듭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우리가 처한 모든 생활 영역에서 궁극적인 방향이자 삶의 근원적인 에너지이자 삶의 구체적인 방식으로 작동해야 하는 신앙임을 우리는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평화라는 것을 인간 삶의 모든 자리에서, 우리의 일상적인 모든 생활 영역 속에서 하나님의 선물인 동시에, 일관되게 실천하는 삶의 덕목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든 생각의 바탕이 평화가 되어야 하고, 삶의 궁극적인 방향이 평화가 되어야 하며, 살아가는 삶의 일상적인 방식 또한 평화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평화는 전쟁의 방식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평화의 방식으로만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 한반도의 통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반도의 통일은 평화의 방법으로, 오직 평화를 목적으로 철저히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남원제일교회가 ‘통일주일’이 아닌, 평화통일주일을 지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지금 여기에서 미리 경험하며, 삶의 모든 자리에서, 특별히 척박한 한반도에서 언제나 평화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남원제일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평화를 누리며 살고 계십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너희가 평안하냐?”라고 질문하시면, “예, 제가 평안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 3장 12절 이하에서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분이 없다고 선언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평화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 용납하고, 서로 용서하며, 서로 사랑할 것을 간절한 심정으로 권면했습니다.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 여러분은 ....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는 띠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 평화를 누리도록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새 사람이 된 우리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에게 형제자매가 되어, 있는 그대로를 용납하고, 과거의 잘못을 용서한다면, 언제 어디서나 평화를 만들 수 있고,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자매의 아름다운 동거를 우리 삶의 모든 자리에서 실질적으로 이루어낼 것입니다. 나아가 긴장과 대립과 갈등의 한반도에서 아름다운 동거와 평화통일의 날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코로나가 다시 기승을 부리고, 묻지마 폭력이 시도 때도 없이 자행되며, 국격이 떨어져 국민의 자존심이 바닥이 되어 평화가 없는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이하도록 종전을 선언하지 못하고, 광복절 78주년을 맞이하도록 진정한 자주독립을 이루지 못한 채로 전쟁의 위협 가운데 있는 우리 한반도에서, 평화를 만들기 위하여 평화의 길로 기꺼이 나아가는 남원제일교회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평화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우리에게 평화 주기를 원하시며, 우리가 평화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이제는 우리가 너를 살리기 위해서 나를 죽이는 십자가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이제는 우리가 만나기 싫은 원수일지라도 만나게 하시고, 용서하게 하시고, 화해함으로 참 평화를 만들게 하옵소서. 이제는 우리가 우리의 소유를 필요로 하는 궁핍한 사람을 만나게 될 때는, 기꺼이 나눔으로 그에게 평화를 선물하게 하옵소서. 이제는 우리가 서 있는 일상생활의 모든 자리에서 작은 평화라도 기꺼이 실천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평화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ㅡ 정종훈 목사 (연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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