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좋은 설교

김종수 목사 추모예배 추모사

ree610 2023. 6. 30. 18:47

 

김종수 목사 추모예배 추모사 / 연세대 신과대 동문회 주관
2023년 6월 29일(목) 오후 9시 / 목포 효사랑장례식장

지난 해 10월 안병무 선생 탄생 100주년 학술대회 자리에서 김경재 목사님을 만났을 때 김종수 목사님 안부를 물어오셨습니다. 김경재 목사님은 저의 대학시절 교회의 담임목사님이고 또 대학원시절 은사이기도 한데, 김종수 목사님의 이모부이기도 합니다. 저랑 각별한 관계를 아시고 묻는데, 첫마디에 제가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철이 없기는 하지만, 목포에 있는 김종수 목사랑은 잘 지내고 있어?” 웃으며 답했습니다. “한참 선배입니다만, 철이 없어서 한참 후배인 저랑 같이 노는 사이입니다.”^^ 그렇게 답하고 근황을 전했습니다. 얼마 후 종수 형께 그 이야기를 전했더니,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 이모부인 김경재 목사님께서 아버지 역할을 대신해 주신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습니다. 누구인들 ‘아버지’의 입장에서 철없지 않은 자식이 있을까요?

하지만 김종수 목사님을 알고 지내는 분들에게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차릴 것입니다. 정말 순수하게 해맑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남들 보기에 능력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영화를 위해 세상과 타협한다거나 자기잇속을 챙기기 위해 계산하는 인간들과 너무나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후배들을 대할 때도 절대 선배로서 권위를 내세우는 법이 없었습니다. 제 기억에 한 번도 없습니다. 늘 동료이자 친구로서 대해 주었고 그 관계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맡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후배들에게 진정한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고 신뢰감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저의 친형이 계시지만, 김종수 목사님은 저랑 피를 나누지 않았음에도 늘 친형과 같이 느껴지는 분이었습니다. 아마도 많은 후배들에게 같은 느낌을 주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많은 일을 솔선수범하여 도맡았습니다. 저만 해도 이제 슬슬 뒷전으로 물러나는 태세인데, 종수 형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한국교회를 걱정하여 교회를 새롭게 하는 여러 일에 나섰습니다. 원래 학구적이어서 지역에서 공부하는 모임으로서 목포성서학당도 만들고, 전남NCC를 만드는 일에도 주도적으로 나섰습니다. 여기에 응한 많은 이들은 대의에 공감하기도 했겠지만, 그가 하는 일이기에 따랐을 것입니다. 교단의 총회에서 발행하는 교재와 문서의 집필 위원으로도 헌신했고, 총회와 노회의 여러 위원으로도 헌신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세월호 가족들을 위한 활동, 평화통일을 위한 활동, 소수자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활동에 헌신적으로 나섰습니다. 그 모든 활동 역시 그의 해맑은 성품과 인격에 힘입은 바 크리라 생각합니다. 세월호 선체 조사 책임을 맡았던 친구 조승우의 평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모든 자리에 그분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질 것입니다. 저와는 여러 가지 얽힌 일들이 많지만, 최근에는 교단의 제7문서 집필위원으로 선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입원하신 바람에 참여하지 못해 다들 쾌차하셔서 마무리 작업에라도 기여하시기를 기대했습니다. 광주전남지역 5개 노회에서 10년 계획으로 진행하는 5.18신학 정립 계획을 추진하는 데 좌장으로서 일이 원만하게 추진될 수 있도록 역할을 맡아 주셨습니다. 이제 더는 그 몫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와는 여러 사연이 많아 하나하나 다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저의 개인적인 감회를 한두 마디 하는 것으로 추모사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김종수 목사님을 처음 만나 알게 된 것은 서울 은진교회에서 함께 중고등부 교사로 봉사했던 김지희 사모님을 통해서였습니다. 학교 선배였지만, 제가 학부 때 대학원 재학중이었고 제대로 뵐 기회가 없었는데, 한빛교회 전도사를 하시던 시절 교회 일과가 끝나면 은진교회로 사모님을 만나러 오신 덕분에 인사를 나누고 그 이후 마음이 통하여 그야말로 진짜 형 아우 사이로 지냈습니다.

저에게는 저를 가장 잘 이해해주고 늘 격려를 아끼지 않은 선배이자 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을 심각하게 가로 막은 적이 두 번 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자 했을 때는 주동자가 되어 선후배 동료들을 몰고 저희 집에 쳐들어와 하룻밤 꼬박 새우며 만류했습니다. 교회당을 짓겠다고 했을 때도 하지 말라고 만류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저를 가장 잘 알기에 제가 망가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행히 제가 망가지지 않고 지금까지 버텨냈습니다. 얼마 전에 그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형이 하지 말라는 대로 하면 되더라. 그러니 내가 중대한 결단을 해야 할 때마다 그 역할을 기대한다.” 이제 그 역할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김종수 목사님은 저에게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2006년 안식년 휴가로, 저희 교단과 대만장로교가 함께 하는 5주간 어학연수를 함께 떠났습니다. 떠날 때쯤 저는 감기몸살을 앓는 것으로 알고 떠났는데, 아니었습니다. 치료를 받는데도 전혀 차도 없이 고열에 시달렸고 일주일이 지나 거의 시신이 다 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진짜로 죽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하소연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나흘째 되었을 때 형이 “안 되겠다, 돌아가야겠다”고 했을 때도 버티다가 일주일 만에 제 스스로 “형 나 집에 데려다 줘! 죽겠어!”라고 하소연했습니다. 형이 거의 시신이 다 된 저를 데려다 주었습니다. 곧바로 병원에 입원하여 일주일간 치료를 받아 제가 살아났습니다. 제가 사경을 헤맬 때 저의 목숨을 구해줬는데, 형이 사경을 헤맬 때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것 같아 어찌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만하라고 하면서도 “최형묵이 목숨 구해준 것 하나만으로도 천국 가게 생겼다.”고 웃곤 했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형은 그 이유 말고도 천국을 누려 마땅한 이유가 많습니다. 아니 몸은 고단했고 병까지 들었지만, 끝까지 스스로 보람되고 즐거운 일들에 헌신하는 가운데 이미 천국을 누려왔습니다. 이제 더 이상 육체의 질병도 없고, 못된 권력자들 더러운 꼴 보지 않아도 되는 천국, 형처럼 해맑은 영혼들과 온전한 평화를 누리는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ㅡ 최형묵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