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이만수 감독의 이야기

ree610 2022. 8. 25. 15:01


< "재능기부하는 지금이 가장 행복해요" >

이만수(삼성 라이온즈)

“내 인생 통틀어 지난 10년이 가장 행복했습니다.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했을 때도 그 기쁨이 일주일이 채 가지 않았는데, 다 내려놓고 이들과 야구하니 웃음이 끊이질 않네요.” 돈과 명예를 얻던 현역 시절보다 사비 털어 재능기부하는 요즘이 더 행복하다는 이만수 감독. 20~30대에겐 낯설겠지만 그는 프로야구 원년부터 한국 야구의 간판스타였다. 1982년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제1호 안타, 제1호 타점, 제1호 홈런을 날려 ‘최초의 사나이’로 불렸다. 그는 최초의 100호와 200호 홈런을 날린 ‘타자왕’이었으며 헐크처럼 거침없고 막강한 포수로 유명했다. 또 우리나라 선수 최초로 미국 메이저리그 코치를 맡아 팀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다. 2014년 10월, 한국 프로야구계를 은퇴하자마자 라오스행 비행기에 오른 그는 야구 전도사로서 또 다른 ‘최초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는 이미 라오스 최초 야구단 ‘라오J브라더스’ 구단주이고, 우리나라 최초의 포수상을 만든 ‘헐크 파운데이션’ 이사장이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코로나19 여파로 발이 묶였던 베트남에 열흘 정도 다녀온 뒤 제6회 이만수포수상·홈런상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포수 출신이라 우리나라 최초로 포수상을 만들었고요. 홈런상은, 아마추어 선수들이 삼진을 당하더라도 시원하게 장타를 많이 치라고 만들었습니다. 선수들은 평소에 경기에 이기려고 단타 위주로 (공을) 많이 치는데, 그렇게 하면 대형 선수가 나오기 힘들거든요. 시상식은 매년 12월에 여는데, 프로야구 스카우터와 아마추어 감독, 기자들에게 후보 추천을 받아 직접 전국을 돌며 경기를 관람한 뒤에 선정합니다.

조선시대 황성YMCA야구단을 창단한 질레트 선교사처럼 라오스에 야구를 전파했는데요. 어떤 계기로 시작했나요?

어느덧 9년 전이네요. 감독직 2년차였던 2013년 10월, 라오스의 선교사 제인내 대표가 제게 이메일을 보낸 게 인연의 시작입니다. 당시 성적이 안 좋을 때라 신경을 제대로 못 쓰다가 두 달 뒤 전화했습니다. 제 대표 말로는 당시 제 첫마디가 “뭘 도와드릴까요?”였대요. “야구 재능기부를 해 달라”고 해 제 딴에는 완곡한 거절의 표현으로 “언제 시간나면 하겠다”고 했는데 ‘순수한’ 그분이 제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죠. 이후 수시로 전화가 왔어요. 처음엔 사비를 털어서 천만 원어치 야구 장비를 사서 보냈고, 이후 우리 선수들의 중고 유니폼을 수거해 운송비를 부담해 보냈습니다. 그러다 2014년 10월, 저의 감독 재계약 불발 뉴스를 보고 “이젠 라오스로 와 달라”고 하셨죠. 정말 그땐 ‘나를 약 올리나’ 싶어 너무 화가 났었습니다.

은퇴 기념 동유럽 여행까지 포기하고 감독님을 화나게 한 그분과의 약속을 지켰네요?

아내의 권유가 결정적이었죠. 고생한 아내를 위해 은퇴 기념 깜짝 이벤트로 동유럽 여행을 준비했는데 아내가 “재능기부 약속부터 지키라”고 했죠. 퇴임 3주 만에 라오스행 비행기에 올랐는데, 거기서 놀라운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이 아시아로 전도 여행을 가려고 했는데 꿈에서 하니님께서 마케도니아로 가라고 하셨잖아요. 저도 동유럽으로 가려 했는데 하나님이 라오스로 가라고 하신 것 같았죠. 하나님이 사울을 위해 루디아라는 여인을 예비했듯, 제인내 대표는 저를 위해 예비된 사람이었던가 봐요. 그분이 모든 것을 세팅해 뒀더라고요.

지난해 라오스에서 첫 야구 리그가 열렸는데요. 지금의 결실을 맺기까지 그 과정이 녹록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많이 부었습니다.(웃음) 2014년 11월, 난생 처음 라오스에 도착했을 때가 생각나네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 라오스의 경제력이 세계 139위로 1960년대 초반의 우리나라 모습이었죠. 선수들의 상황도 열악했어요. 12명이 전부인 선수들은 비쩍 말라 있었고, 그중 5명이 맨발로 왔더라고요. 꿈이 뭐냐고 물으니 하루 세끼 밥 먹는 거래요. 충격적이었죠. 그래서 선수 모집 광고에 빵과 물을 지급한다고 했더니 400~500명이 지원했어요. 최종 40명을 뽑았는데 그들이 라오스 유일의 야구단 라오J브라더스의 선수였고 동시에 라오스 최초의 국가대표였습니다. 방문 첫해 뎅기열에 걸려 기분 나쁜 미열이 한 달 넘게 지속됐던 기억도 생생하네요.

재능기부 활동을 더 체계적으로 하려고 재단도 설립했는데요.

선수 시절 별명인 ‘헐크’를 붙여 ‘헐크 파운데이션’으로 지었습니다. 재능기부에 너무 많은 사비가 들어 주위에 고민을 털어놨더니 엄홍길휴먼재단을 만든 친구가 재단 설립을 권했어요. 2014년 창립 준비 TFT를 발족하고, 이듬해 라오스 야구장 건립 프로젝트 팀과 라오스 야구협회 창립준비위원회를 출범시킨 뒤 2016년 4월 공식 발족했습니다. 친구가 재단 운영의 원칙으로 “네 돈을 쓰기 시작하면 망하니까 그것만 명심하라”고 했는데, 말처럼 쉽지 않더군요. 직원 월급 줄 돈이 없어 아내가 다 맡고 있는데 잔고가 바닥입니다.(웃음) 결과적으로 재단 꾸리며 인생을 많이 배웠습니다. (스타 선수·감독으로 살다 보니) 평생 누구한테 굽실거려 본 적이 없는데 기부해 달라고 참 많이 굽혔습니다. 또 거절에 익숙해졌죠.

남모를 고생이 많았지만, 보람도 컸을 것 같습니다.

음악이 삶을 바꾼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처럼 야구가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구나, 그걸 알게 됐죠. 선수들이 다양한 경험을 했으면 싶어 부산국제교류재단의 지원으로 2016년에 처음으로 라오스 선수들을 한국에 초청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루 세끼 밥 먹는 게 꿈이라던 선수들이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어요. 라오스의 문맹률을 낮추는 교사, 정치 경제의 변화를 이끌 정치인·사업가가 되고 싶다고들 했습니다. 병원이 없어 아프면 태국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의사를 꿈꾼 친구도 있었죠. 물론 야구선수도 꿈꿨고요. 초창기 40명이던 선수는 이제 150명으로 늘었는데, 구단을 거쳐 간 이들까지 합치면 200명의 인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셈이에요.

라오스 최초의 야구장이 2019년 문을 열었는데, 뿌듯하시겠습니다.

한국을 다녀간 라오스 선수들에게 국제야구대회 출전과 같은 또 다른 동기부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라오스 야구협회 설립을 추진하던 중 야구장 건립으로 이어졌습니다. 라오스가 공산국가라 외부인을 경계하다 보니 야구협회 설립에 2~3년이 걸렸어요. 정부 관계자 미팅에서 그들이 대접한 지네와 박쥐 요리까지 먹으며 설득했습니다. 결국 라오스 정부에서 땅을 줄 테니 야구장은 알아서 지으라고 해 우여곡절 끝에 대구은행 회장님의 기부금 3억 원에 제 사비를 보태 야구장 건립 비용을 마련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베푸는 삶을 모르다가 라오스에 가서 억지로 내 손에 움켜쥐고 있던 돈을 내놓게 됐죠. 그렇게 재물, 명예, 건강이 다 날아가나 싶었는데 뒤돌아보니 더 많은 것을 얻었더라고요. 오늘날까지 하나님이 저를 헐벗게 하진 않으셨고, 진짜 행복을 선사하셨거든요.

대학 시절, 지금의 아내와 헤어지기 싫어 교회 다니기 시작했다죠?

대학교 1학년 때 만난 아내는 제 첫사랑인데요. 3년간 제게 전도했는데, 제가 꿈쩍하지 않자 헤어지자고 하더라고요. 결혼할 생각이던 저로선 화들짝 놀라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죠. 그러다 대학 4학년 때 국가 대표팀에서 탈락하는, 저로선 충격적인 일을 겪고 3박 4일 금식기도에 들어갔다가 성령 체험을 하게 됐습니다. 대학 졸업 후 삼성라이온즈 창단 멤버가 됐는데, 야구도 열심히 했지만 한창 신앙으로 뜨거울 때라 젊은 혈기의 베드로처럼 지혜롭지 못하게 다짜고짜 전도하다 구단 선배에게 따귀를 맞기도 했습니다.

야구도 전도도 열심히 한 것으로 유명한데 기억에 남는 사람을 꼽는다면요?

중·고교 시절부터 삼성라이온즈까지 함께한 고(故) 장효조 선배입니다. 전도하다 뺨을 두 대나 맞았는데, 집 장독대에 정화수 떠놓고 아들 잘되길 비는 ‘불자’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들이었죠. ‘하나님도 장효조 선배는 전도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선배가 연락을 해 “나 교회 다닌다” “내 아들은 목사다”라고 말해 진짜 기절할 뻔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