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정과

사사기 1장 ~ 18장 묵상

ree610 2018. 11. 18. 17:19

1:1-10 유다와 시므온의 합류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도 가나안 정복전쟁은 계속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워야 하냐고 묻자 유다가 먼저 나가 싸우라고 하시면서 그 땅을 유다 지파의 손에 넘겨주었다라고 하십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직 정복전쟁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점령한 것처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바라보는 동안에는 잠시 동안이지만 물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몰아치는 풍랑의 현실로 시선을 돌렸을 때에는 물에 빠졌습니다. 현실을 볼 때는 물에 빠지는 것 같지만 주님을 바라보면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십니다. 물 위를 걷는 믿음으로 오늘도 이끌어 가십니다.(이계연)

 

7/2(주일) 1:11-15 갈렙의 딸 악사

드빌은 광야의 종착지로써 가나안 정복전쟁에 있어 중요한 성읍이었습니다. 이에 갈렙은 그의 딸 악사를 전승의 포상으로 제시함으로 이스라엘의 사기를 북돋우려고 합니다. 신부를 맞이하는 값으로 전승을 걸었던 것은 고대 근동의 보편적인 풍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속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 땅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약속하신 일을 인간적인 수단으로 풀어가려고 합니다. 죄의 근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마음의 동기에서 비롯됩니다. 자아를 의지하는 삶은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한 후에도 얼마든지 계속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충만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닌 지속적인 현재의 사건으로 지금도 일어나야 합니다.(이계연)

 

7/3() 1:16-21 가나안 족속을 진멸과 베냐민의 실패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냥 우연히 일어나지 않습니다. 영적인 전쟁은 현실에서 개인의 질병, 부도, 관계적인 어려움, 경제적인 문제 등의 다양한 상황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문제 자체를 문제로 보고 해결하려고 하면 오히려 상황이 안 좋아지거나 더 확산될 수 있습니다. 현실의 사건과 일들이 벌어진 이유를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이런 어려움이 왜 생긴 것인지, 그 어려움의 의미와 이유를 묻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것이 어떤 죄로 인함인지,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용서하고 풀어야 하는 문제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부분에서 풀리게 되면 현실에서도 복잡했던 실마리들이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이계연)

 

7/4() 1:22-26 요셉 가문이 벧엘을 정복하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분들을 보면 모든 분들이 이 사역은 하나님께서 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현재의 사역적 결과의 좋고 나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주님께서 오신 이유는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그 봉사와 사역의 성과와 결과가 어떠하든지 그 일로 인해 영적 생명들이 살아나고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지금 진행되는 상황은 어려워 보이고 잘 안 풀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일로 인해 더욱 기도하며 하나님을 찾게 되는 계기가 되는지요? 아니면 어떤 사역과 일들이 잘 풀리고 좋은 성과를 내고 있음에도 오히려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되고 영적 생명은 말라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하나님으로부터 온 모든 일은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이계연)

 

7/5() 1:27-36 거듭되는 실패,

옷감을 염색물에 처음 담갔을 때는 조금 옅게 염색물이 베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여러 번 담갔다가 빼내는 동일한 과정을 반복하면 할수록 옷감의 색은 점점 더 선명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은 하루아침에 변하여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를 경험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을 정복하거든 그곳에 살고 있는 백성들을 진멸하고 내어 쫓으라는 명령에 타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과 함께 거하며 이스라엘이 강성해진 후에는 자신들의 편의를 위하여 가나안 사람에게 노역을 시켰습니다. 타협하는 불신앙이 반복되면서 자기의 생각에 좋아 보이는 대로 행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순백의 신앙이 가나안 종교의 다른 색깔에 점점 물들기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반복되기 전에 옷감을 빼내어 다시 탈색하여 희게 할 수 있습니다. 실패 속에서 주어지는 보혈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이계연)

 

7/6() 2:1-7 깨어진 언약

몬테스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내 자신에 유익해도 내 가족에게 해로우면 하지 말아야하고, 내 가족에게 유익해도 내 나라에 해로운 일은 하지 말아야하며, 내 나라에 유익해도 전 인류에게 해로우면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성경 진리는 한 가지 더 말하고 있습니다. 전 인류에 유익해도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일이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이준호)

 

7/7() 2:8-15 새로운 세대의 악행과 재앙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는 다뉴브 강을 헤엄쳐 내려가는 위험한 스포츠가 유행입니다. 다뉴브 강의 어떤 지점에 가면 소용돌이를 만나게 되는데, 수영을 잘 하는 사람도 일단 그 지점에 가면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이 소용돌이를 쉽게 극복하는 비결은 자신을 가만히 물결에 맡기는 것입니다. 가만히만 있으면 안전하게 그 장소를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용돌이에 말렸다고 겁을 먹고 요란하게 발버둥치는 것은 도리어 실패의 요인이 됩니다.(이준호)

 

7/8() 2:16-19 사사를 세우심

예수님은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악을 선으로 갚기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좋은 증언이 되고, 동시에 우리의 영혼과 마음과 몸을 보호하는 것이 됩니다. 미움은 우리 속에 고통을 일으켜서 결국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망치게 됩니다. 미움의 정신은 파괴적인 요소로서 남을 파괴시킬 뿐더러 우리까지 파괴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이유는 우리의 육체적, 감정적인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적인 행복을 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미움의 정신을 나타내는 대신에 사랑의 정신으로 살아가면 우리의 삶은 보다 더 풍성해지고 세상은 더 살기 좋은 곳이 됩니다.(이준호)

7/9(주일) 2:20-23 믿음을 시험하심

구운 과자는 부서지기 쉽습니다. 살짝만 눌러도 길게 금이 가면서 두개로 쪼개집니다. 그러나 삶은 요리는 이와 다릅니다. 딱딱하게 건조된 국수를 삶으면 부드러워지고 몰랑몰랑해집니다. 인생에서도 보면 부서지기 쉬운 사람과 부드러운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압박이 가해질 때 깨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인생에서 맛보는 뜨거운 고생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참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은 부드러워집니다. 그리고 부드러워지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상처도 기쁨도 함께 느끼며 동정하며 그들과 함께 어려움을 겪습니다. 부서지기 쉬운 사람을 부드러운 성자로 바꿔 나가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습니다.(이준호)

 

7/10() 3:1-6 시험에 실패하는 새 시대의 사람들

살아갈수록 우리는 자신이 믿을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들어도 믿음을 지키기 못하고 보이는 것에 순간 마음을 빼앗기며 살아가곤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도 우상을 섬기는 악으로 인해 대적의 손에 억압되고 다시금 하나님께 부르짖어 회개함으로 용서받는 반복된 어리석은 모습을 보면서 그들도 진리를 붙잡고 살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를 짐작하게 합니다. 불순종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진리를 붙잡는 손이 느슨해지면 반드시 우상에 빠지게 됨을 깨닫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보면서 나와 나라의 모습은 어떠한지 조용히 돌아볼 때인 것 같습니다.(차춘현)

 

7/11() 3:7-11 메소보다미아 압제에서 구원한 옷니엘

성경을 통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을 많이 듣습니다. 기도는 영적 호흡으로 신앙생활에서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엠 바운즈는 기도하기를 멈출 때 그 믿음의 생명도 끝이 난다. 믿음은 기도에 의해 생명력이 유지된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을 지키는 생명력은 기도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가 중단될 때 영적 침체와 삶의 무기력을 경험하곤 합니다. 기도는 영적 호흡으로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럼에도 기도시간의 소중함을 잊고 삽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신앙인의 모습은 이미 건강한 신앙인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차춘현)

 

7/12() 3:12-25 모압 왕 에글론을 죽인 에훗

바라봄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하늘의 별들을 바라봄으로 가슴에 꿈을 새겼듯이 우리에게는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기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영생 소망 꿈을 갖게 하셨습니다. 바라봄은 마음을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미혹을 바라고 구하면 미혹에 빠지고 참된 것을 바라고 구하면 참된 것을 얻게 합니다. 무엇을 바라는가에 따라 인생이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남은 삶이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신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닮아가는 참된 삶으로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차춘현)

 

7/13() 3:26-31 에훗이 모압에서 삼갈이 블레셋에서 구원함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말씀은 삶에 있어서 분명한 축복의 기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베푸시는 축복의 원리를 붙잡는 대신 세상적 필요를 먼저 구하는 좁은 생각에 자신을 맡김으로 축복의 통로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 마음에 찾아오는 의심과 염려를 떨쳐버리고, 주님 말씀대로 사는 용기와 결단이 은혜와 축복받는 길임을 다시한번 깊이 새겨야겠습니다.(차춘현)

 

7/14() 4:1-10 가나안 야빈의 공격과 드보라의 계획

또 하루가 오늘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당신의 하루가 희망차게 열렸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장 소중한 오늘을 무의미하게, 때로는 아무렇게나 보낼 때가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모여 평생이 되고, ‘영원히란 말이 됩니다. 하루는 곧 일생입니다. 좋은 일생이 있는 것처럼 좋은 하루도 있습니다. 하루를 짧은 인생으로 본다면 결코 오늘을 부질없이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하루를 보내는 것이 좋은 일생을 만드는 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선물이며 시간이고 생명입니다. 오늘이라는 소중한 당신의 하루를 아름답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저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하렵니다.(김충산)

 

7/15() 4:11-16 바락이 시스라를 이김

죄의 유혹에 너무 쉽게 넘어지는 것 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너무 쉽게 회개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애쓰고 힘쓰고 노력해도 넘어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들이지만 그렇다고 십자가의 은혜를 일회용 밴드 정도로 여기는 느슨한 마음은 오히려 죄를 다시 반복하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겠죠. 지금 우리가 나누는 말씀이 나의 느슨했던 마음에 작은 울림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반복되는 죄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회개로 이끄는 하루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김충산)

 

7/16(주일) 4:17-24 시스라를 죽인 여인 야길

길을 가던 사자 한마리가 잠이 든 토끼를 발견했습니다. 배가 고팠던 사자는 이게 웬 떡이냐며 토끼를 잡아먹으려고 하는데 그 옆으로 사슴 한 마리가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토끼 보다는 몇 배 좋은 먹잇감을 보자 사자는 토끼를 놔두고 사슴을 뒤쫓기 시작했습니다. 사자가 맹렬히 추격했지만 목숨을 걸고 달리는 사슴을 따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사슴을 포기한 사자는 토끼나 잡아먹어야겠다.’ 라는 생각하고 되돌아 왔으나 토끼는 이미 달아나버린 뒤였습니다. 사자는 땅을 치며 주린 배를 붙잡고 후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세상의 많은 일 가운데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따라 현명한 판단과 선택을 할 때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김충산)

 

7/17() 5:1-12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 1

글을 쓰는 한 남자가 거의 수만 페이지에 이르는 원고를 많은 시간을 투자해 완성했습니다.

절친한 지식인 친구에게 검토를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집에서 일하던 아주머니가 쓸모없는 종이뭉치로 알고 그 원고를 불태워 버렸습니다. 이 남자는 충격을 받고 다시는 그런 글을 쓰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과 실의에 빠져 우울한 날을 보내던 어느날 공사장에서 벽돌을 한 장씩 쌓아 높은 벽을 만드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나도 한 장씩 글을 다시 써보자.’ 그리고 그는 처음보다 더 좋은 글을 완벽하게 재생했습니다. 이 남자가 바로 프랑스 혁명사를 지은 토머스 칼라일입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길을 가다 돌이 나타나면 약자는 걸림돌이라 하고, 강자는 디딤돌이라 한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우리 인생, 내 앞에는 디딤돌만 있다고 선포하고 살아갑시다!(김충산)

 

7/18() 5:13-23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 2

차를 따라주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보면 한 가지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차 주전자에서 차를 담으려면 찻잔의 위치는 분명 주전자 보다 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며 겸손이라는 뜻을 생각해 봅니다. 겸손은 분명 낮은 곳에서 피어납니다. 겸손의 왕으로 하늘로부터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섬겨 주셨습니다. 그분을 통해 높아지려 하기보단 낮은 곳에서의 섬김을 배웠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앙망할 때 우리 마음 속의 빈 잔도 하늘의 거룩한 것으로 채워질 것을 믿습니다.(김충산)

 

7/19() 5:24-31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 3

우리는 어려울 때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간구합니다. 문제는 모든 것이 형통할 때, 넉넉할 때, 아무 부족함이 없을 때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가 문제입니다. 요셉의 믿음을 봅시다. 그는 그가 이룬 성과에 집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자식들을 데리고 늙은 아버지에게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축복을 받습니다. 그는 진짜 복은 이 세상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의 복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저의 자식들도 이 세상에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네가 이룬 것에 집착하지 말고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싶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구별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말씀에 순종하며 구원받는 믿음의 자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김충산)

 

7/20() 6:1-10 미디안의 압제와 선지자의 책망

사람들은 말합니다. 십년만 젊었더라면 못할 일이 없을 거라고... 십년만 어리다면 인생을 다시 살아보고 싶다고... 십년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지금처럼 살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늦지 않았습니다. 지나간 십년 전은 돌아갈 수 없는 길이니 접어두고 앞으로의 십년 후를 설계합시다. 십년 후의 내 모습에 잘 살았노라 미소지을 수 있도록 지금 이 시간 내게 주어진 삶을 소중히 여기고 나를 지켜 주시며 이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분의 인도함을 받아 설계되어가는 복 있는 인생이었으면 합니다.(하정화)

 

7/21() 6:11-18 기드온을 부르심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기가 왜 그리 힘든 걸까요? 욕망의 탑에는 꼭대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위만 보지 말고 자신을 향해 눈높이를 맞춰보세요. 현재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힐링의 시작입니다. 지금까지는 잘 해냈으니 앞으로도 잘 할 거라고 진심으로 자신을 격려하세요. <우리들의 좋은 시> 중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 곁에서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하정화)

 

7/22() 6:19-24 기드온에게 표적을 보여 주심

손을 잡아 줍시다. 마음이 괴로울 때 잡아 주는 손은 따뜻한 온기로 괴로움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의미요, 고요하게 마음의 평화를 찾게 해줍니다. 손을 잡아 줍시다. 실패했을 때 잡아 주는 손은 당신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의미요, 다시 설 수 있는 용기를 찾게 해 줍니다. 손을 잡아 줍시다. 외로울 때 잡아 주는 손은 당신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요, 우리가 함께라는 생각을 하게 해 줍니다. 손을 잡아 줍시다. 시련을 겪을 때 잡아 주는 손은 당신은 소중하니 고통을 나누자는 의미요, 삶의 새로운 희망을 찾게 해 줍니다. 손을 잡아 줍시다. 삶의 의욕을 잃었을 때 잡아 주는 손은 당신과 더불어 살아 보자는 존재 가치에 대한 의미요, 삶의 행복을 찾을 수 있는 믿음을 갖게 해 줍니다. <비울수록 채워지는 행복> 중에서 나는 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먼저 손잡아 주시고 있음을 믿고 내가 받은 사랑의 온기를 나누는 행복한 삶이기를 소원해 봅니다.(하정화)

 

7/23(주일) 6:25-32 기드온이 아비의 바알 제단을 헐다.

긴 인생의 처음은 아침입니다. 오늘 아침에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첫 시작, 첫 생각, 첫 행동, 기분 좋게 시작하십시오. 처음이 좋게 시작되면 이후에도 분명 좋은 일이 연이어 일어날 것입니다. <내 마음 들었다 놨다> 중에서 우리의 삶의 주관자이신 그 분, 그리고 시작하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이를 떠올리는 하루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하정화).

 

7/24() 6:33-40 기드온의 전투 준비

어느 아메리카 원주민 치유사는 병든 사람에게 이렇게 묻는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노래를 불렀던 때가 언제였죠?” 아메리카 원주민 치유사는 알고 있었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한 몸과 마음에 별 탈이 없으며, 설사 아프더라도 머지않아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정희재의 <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 중에서 성가대나 합창단의 평균 수명이 가장 길고, 회복탄력성도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고 합니다. 기억하세요? 언제 마지막 노래를 불러 보셨나요? 기쁨의 노래, 사랑의 노래, 감사의 노래. 노래를 부르면 다시 살아납니다.(하정화)

 

7/25() 7:1-8 기드온의 300 용사

기드온이 두려워 떠는 자를 다 돌려보냈으나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의 수가 많다고 하시며 삼백 명만 남기셨습니다. 그들의 상황이 너무 열악해 보입니다. 미디안의 진영에는 많은 군인이 있어서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해변의 모래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영적 전쟁 앞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이 우리 안에 영원히 함께하시는 것을 믿고 성령님의 능력을 신뢰해야 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기 바랍니다.(최양호)

 

7/26() 7:9-18 기드온에게 전해진 예언과 공격계획

세상을 살아가며 어떠한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경쟁자로 여기며 비방하고 있는지 않은지요? 다른 사람들을 비하함으로써 이기려고 한다면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반대로 사랑하고 섬기며 다른 사람을 높이는 것은 세상을 이기신 주님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세상에서 흔들릴 때마다 바라봐야 할 주님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세상이 우리를 통해 주님을 볼 수 있다면 주님을 따라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최양호)

 

7/27() 7:19-25 미디안을 추격함

참 믿음은 끝까지 유지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다가 중간에 이런저런 계기로 변하는 것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을 믿고 나팔과 횃불을 들고 전쟁에 임해 놀라운 승리를 맛보았습니다. 하지만 미디안을 추격하면서 하나님이 돌려보내신 사람들을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참 믿음은 반드시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세워집니다. 사람의 감정, 열심, 행위를 근거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셔서 성취하신 모든 의와, 믿는 자에게 성령님이 오셔서 예수님이 성취하신 것을 각 사람에게 적용해 주시는 방식으로 세워집니다. 중간에 변해서는 안 됩니다.(최양호)

 

7/28() 8:1-3 기드온이 동족간의 갈등을 풀다

지구가 고정된 중심이고 다른 행성들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는 천동설을 반박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중세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천문학을 여는 시발점이었습니다. 그는 창조 섭리에 관한 분명한 신앙을 갖고 연구한 과학자요 천문학자였습니다. 그의 묘비명엔 다음과 같은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 바울이나 베드로에게 베푸셨던 은총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의 강도에게 베푸셨던 그 은혜만이라도 베푸소서.”(이지현)

 

7/29() 8:4-12 도움을 거절한 성읍들

기독교는 죄는 미워하되 죄인을 사랑하라는 원리가 있습니다. 말처럼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훌륭한 본을 따라 실천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라는 소명을 성취하는데 성큼 다가갈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는 것과 죄인을 미워하는 것은 이해가 안되는 부분입니다. 어떻게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면서 그 사람이 한 일만 미워할 수 있단 말인가요? 그것은 나 자신 속에 있는 죄됨을 미워하며 그 속에서 나오려는 몸부림에서 나 자신을 사랑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죄를 미워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남의 죄도 미워하는 것은 상대의 그런 행동을 안타까이 여기며 언젠가는 회복되기 바라는 사랑의 마음입니다.(이지현)

 

7/30(주일) 8:13-21 징벌 받은 성읍과 왕의 죽음

복수심은 앙갚음하고 싶은 욕심입니다. 상처받은 만큼 갚아 주고 싶은 불타는 욕망입니다. 복수의 문제점은 원하는 바를 결코 얻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양편은 동점을 이룰 수 없습니다. 공평한 상태는 오지 않습니다. 복수 할 때마다 가동되는 연쇄 반응은 항상 걷잡을 수 없이 치닫습니다. 복수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둘 다 고통의 에스컬레이터에 묶어 놓습니다. 이 에스컬레이터는 결코 정지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내려놓지 않습니다. 최소한 복수의 악순환을 중단시킬 방도는 용서뿐입니다. 용서가 없이는 복수라는 괴물이 언제 동면에서 깨어나 현재를 삼킬지 모릅니다. 나아가 미래까지도...(이지현)


7/31() 8:22-28 기드온이 왕 되길 거절 함

용서는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기에 어려운 기술 훈련과 함께 교육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말했습니다. ‘용서란 간헐적 행위가 아니라 영구적 태도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줄 선물로 은혜와 용서의 문화를 가꾸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미래의 유일한 희망은 과거에 우리의 적이었던 자들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용서가 단지 종교적 감상이 아니라 중력의 법칙만큼이나 인간 영혼에 근본적인 법칙이라는 점입니다.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면 무릎이 깨지는 것처럼 용서의 법칙을 어기면 영혼에 치명상을 입게 됩니다.(이지현)

 

8/1() 8:29-35 기드온의 죽음

민족지도자 월남 이상재 선생의 일화입니다. 이상재 선생이 나이가 많았을 때 한 청년이 선생을 찾아가 선생님, 신문을 보니까 일본의 수상은 100세를 능히 살 수 있다고 장담하고 있으며 영국의 어떤 사람은 120세를 살 수 있다고 말하는데 선생님은 몇 세까지 사실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선생은 빙그레 웃으시며 나를 그런 사람들과 비교하지 마시오. 나는 영원히 삽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영원히요?” “그렇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 땅에서 보람 있는 일을 하다가 영원히 산다오.”(이지현)

 

8/2() 9:1-6 기브온의 아들 아비멜렉

지금 무엇을 이루고자 애쓰고 있는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지,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지를 알려 줍니다. 혈연과 지연이 최고라는 논리, 돈으로 다 된다는 논리를 따라선 안 됩니다. 특히 교회 안에 이 논리가 유입되면 교회는 세속화되어 세상의 가치를 좇는 왜곡된 공동체로 타락하게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논리에 따라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야 합니다. 세상의 논리에 따라 세상의 나라를 세워선 안 됩니다.(최양호)

 

8/3() 9:7-21 기브온의 막내아들 요담의 비유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자에게 어떻게 대하시나요? 하나님은 다른 누군가를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우리가 그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받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며, 더 나아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 호의를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낳고 키워 주신 부모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과 크고 작은 도움을 준 수많은 이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에게는 그들에게 은혜를 갚을 기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는 우리가 베풀 호의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최양호)

 

8/4() 9:22-30 가알과 세겜의 배반

어떤 지도자를 따르고 있습니까? 만약 지금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면 어떤 지도자의 모습으로 서 있습니까? 지도자를 세울 때에는 그의 말과 겉모습에 현혹되어선 안 됩니다. 특히 교회의 지도자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는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좋은 지도자를 세우면 교회에 덕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만, 잘못된 지도자를 세우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됩니다. 지도자는 사람들을 선동하는 말을 하기보다 사람들을 책임질 수 있는 지혜와 덕망을 갖춰야 합니다. 단지 자신의 만족과 명예를 위해 지도자가 되려 해서는 안 됩니다.(최양호)

 

8/5() 9:31-41 가알이 스블에게 배반당함

이전까지 친했던 사람과 원수가 되어 복수할 기회를 노린 적이 있습니까? 어제 친구였던 사람이 오늘 원수가 되고, 원수로 여기면서도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 때문에 친구인 척 다가가는 이 세상의 방식을 거슬러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친구이며, 오늘의 원수도 내일의 친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받은 자는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으며, 설령 자신에게 손해를 입힌 상대일지라도 용서하고 용납해 줍니다.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누군가에게 복수하는데 우리의 인생을 허비해서는 안 됩니다.(최양호)

 

8/6(주일) 9:42-49 세겜을 불사르는 아비멜렉

자존심을 짓밟거나 물질적인 피해를 입힌 상대에게 과연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두말할 것도 없이 복수를 다짐하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선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 우리는 두말할 것도 없이 용서를 다짐해야 합니다. 그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지 않는다고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하기를 은근히 바라서도 안 됩니다. 진정한 용서는 상대의 잘못을 단순히 잊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막힌 담을 완전히 허무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이와 같은 용서가 가득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모습을 세상에 당당히 보여 줘야 합니다.(최양호)

 

8/7() 9:50-57 악을 갚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어떠한 분으로 알고 믿고 있습니까? 날마다 어떤 하나님을 경험하고 고백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기록했습니까? 성경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만물을 심판하실 분으로 하나님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의의 옷을 입고 그 마지막 날을 준비하고 있는지요? 날마다 회개하며 어린 양의 피에 그 흰옷을 씻어 희게하고 있습니까? 이제는 잠에서 깰 때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다시 오실 마지막 날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최양호)

 

8/8() 10:1-5 소사사로 칭하는 돌라와 야일

우리는 사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불쌍한 사람,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종종 만납니다. 그 때 연민을 갖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뜨거운 관심과 사랑을 갖고 그들이 요구하는 필요를 직접 구체적으로 채워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은 만물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어떠한 사람이든지 하나님은 그를 귀하게 여기십니다.(도현경)

 

8/9() 10:6-18 반복되는 악순환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어떤 절망적인 순간에도 믿음의 기조를 잃지 말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결말을 기대해야 합니다. 더불어 매 순간 좋은 것을 심어야 합니다. 오늘 심은 것을 내일 거두게 되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혹 우리 자신이 거두지 못해도 우리 자손들이 거두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황과 형편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좋은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좋은 말, 좋은 태도, 섬기고 나누는 삶, 하나님께 드리는 최선의 헌신. 이 모든 것이 다 씨앗입니다.(도현경)

 

8/10() 11:1-11 사사 입다

어느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빵을 집으려던 아들이 그만 실수로 식탁에 우유를 엎질렀습니다. 순간 아들은 아버지의 눈치를 재빨리 살폈고, 아버지는 아들을 매섭게 쏘아보며 말했습니다. “조심하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니.” 이내 어린 아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어머니가 달려와 식탁을 닦았습니다. 일주일 뒤 어느 때와 똑같은 아침 식사. 이번에는 아버지가 그만 팔꿈치로 우유잔을 건드렸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어머니를 향해 말했습니다. “아니 우유잔을 걸리적거리게 놓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겠소.” 다른 사람을 비난함으로 자신의 실수를 정당화시키려는 나의 모습은 아닌지 살펴봐야 합니다.(도현경)

 

8/11() 11:12-23 암몬 족속이 가나안 동쪽 땅을 요구

율법에서는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법대로 순종해야 한다는 안식일의 문제에 대해 예수님께서 새롭게 해석을 해주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다.’ 이것은 종교의 본질이며, 신앙의 본질이고, 우리 삶의 본질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도현경)

 

8/12() 11:24-33 입다의 서원

사람은 열심히 노력하고 땀 흘려 일하지만, 수확의 근원인 열매는 하나님이 주십니다. 모든 결실을 자기 능력으로 얻은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로 돌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 가족과 친구, 이웃의 고마움도 알아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로써 어둠에 대하여 승리하신 주님을 바라보는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도현경)

 

8/13(주일) 11:34-40 딸을 제물로 드림

2006년 봄, ‘컴패션이라는 단체를 통해 저는 인도로 가게 되었습니다. 온갖 불평을 담고 도착한 그 곳에는 한 무리의 인도 아이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빼빼 마르고 옷도 지저분한 냄새 나는 아이였습니다. 제가 다가가자 한 아이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저는 그 아이의 작은 손을 만져봤습니다. 바로 그 순간 40년 동안 기다렸지만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예수님께서 제 마음에 말씀을 주셨습니다. “인표야, 내가 너를 오랫동안 기다렸다. 얼마나 외로웠니.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는 사랑받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단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아이를 통해 저를 만나주셨습니다.

-배우 차인표의 간증 중-(도현경)

 

8/14() 12:1-7 에브라임이 다시 갈등을 일으키다

어느 날 공자가 조카 공멸을 만나 물었습니다. “네가 벼슬한 뒤로 얻은 것은 무엇이며, 잃은 것은 무엇이냐?” 공멸은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대답했습니다. “얻은 것은 없고 잃은 것만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 나랏일이 많아 공부할 새가 없어 학문이 후퇴했으며 둘째, 받는 녹이 너무 적어서 부모님을 제대로 봉양하지 못했습니다. 셋째, 공무에 쫓기다 보니 벗들과의 관계가 멀어졌습니다.” 공자는 이번엔 공멸과 같은 벼슬에서 같은 일을 하는 제자 복자천을 만나 같은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복자천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잃은 것은 하나도 없고, 세 가지를 얻었습니다. 첫째, 글로만 읽었던 것을 이제 실천하게 되어 학문이 더욱 밝게 되었고, 둘째, 받는 녹을 아껴 부모님과 친척을 도왔기에 더욱 친근해졌습니다. 셋째, 공무가 바쁜 중에도 시간을 내어 우정을 나누니 벗들과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공멸과 복자천, 그들은 같은 일을 하고 있었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승현옥)

8/15() 12:8-15 소사사 입산 엘론 압돈

미국인들은 무언가 매우 특별하게 말하고 싶어 할 때, “애플파이 같다고 말합니다. 또 미국의 가장 큰 도시인 뉴욕을 부를 때 가장 큰 사과라고도 합니다. 이처럼 미국에서 사과는 매우 미국적이며, 매우 특별합니다. 사과를 이렇게 특별한 과일로 만든 배경에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1774년에 태어난 존 채프먼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그는 미국의 개척시대에 많은 지역을 돌며 사과 씨를 뿌렸습니다. 그 이유는 현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세대의 미국인들이 배고픔 때문에 고통받지 않기 위한 배려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조니 애플시드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그것은 아무 대가 없이 평생 사과를 보급한 헌신과 희생의 상징입니다. 내 것을 하나 내줌으로써 내 주변이, 더 나아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승현옥)

 

8/16() 13:1-14 나실인의 서약

선인장처럼 자신의 환경에서 완벽하게 적응한 식물도 드물 것입니다. 사막이란 곳은 매우 덥고, 한 달 이상씩 비가 내리지 않아서 좀처럼 물을 구하기 힘든 곳입니다. 그런 선인장의 가시는 본래 잎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막의 뜨거운 햇볕은 많은 수분을 증발시켰기 때문에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해 잎을 작고 좁게 만들다 보니 차츰 가시로 변했다고 합니다. 수분의 증발을 막기 위해서 잎 대신에 가시를 갖게 된 것입니다. 딱딱하고 가느다란 가시는 수분을 밖으로 거의 빼앗기지 않기 때문에 사막에 사는 선인장에겐 안성맞춤입니다. 또한, 가시는 동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사막에서는 동물들이 식물을 통해 수분을 섭취하기도 합니다. 선인장의 가시는 이들의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보호 장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승현옥)

 

8/17() 13:15-25 삼손의 출생과 성장

알렉산더 대왕이 친한 친구로부터 귀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선물은 아주 훈련이 잘된 사냥개 두 마리였습니다. 사냥을 즐겼던 알렉산더 대왕은 기뻐했습니다. 어느 날 알렉산더 대왕은 사냥개를 데리고 토끼사냥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사냥개들은 사냥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습니다. 토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빈둥빈둥 누워 있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화가 나서 사냥개들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사냥개를 선물한 친구를 불러 호통을 쳤습니다. “토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볼품없는 개들을 왜 내게 선물했는가? 그 쓸모없는 사냥개들을 내가 모두 죽여 버렸다.” 친구는 알렉산더 대왕의 말을 듣고 놀란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 사냥개들은 토끼를 잡기 위해 훈련된 개들이 아닙니다. 호랑이와 사자를 사냥하기 위해 훈련 받은 개들입니다.”(승현옥)

 

8/18() 14:1-9 삼손이 아내를 구함

중국 제나라의 위 왕이 대신들과 길을 가다 어느 산 밑에 도착했습니다. 위 왕은 한참 산봉우리를 바라보다가 대신들에게 말했습니다. “누가 나를 저 산봉우리로 올릴 수 있겠느냐? 그런 재주를 가진 자가 있으면 큰 상을 내리겠다.” 위 왕의 말을 들은 신하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습니다. 그러자 위 왕은 신하들 사이에 있는 손빈을 지목하며 물었습니다. 손빈은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전하를 산 밑에서 산봉우리로 올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전하가 만약 산봉우리에 계신다면 산 밑으로 내릴 수는 있습니다. 위 왕은 미심스러웠지만 그 방법이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위 왕은 손빈이 산봉우리를 향해 걸어가자 발걸음을 재촉하여 부지런히 따라 갔습니다. 드디어 위 왕과 신하들이 모두 산봉우리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손빈은 위 왕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습니다.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미 전하를 산봉우리로 올려놓았습니다.” 그제야 위 왕은 손빈이 자기를 깨우쳐 주기 위해 지혜를 발휘한 것을 깨달았습니다.(승현옥)

 

8/19() 14:10-20 삼손의 수수께끼

관상어 중에 코이라는 물고기의 삶은 아주 특이합니다. 이 물고기는 작은 어항에다 기르면 5~8cm밖에 자라지 않지만, 커다란 수족관이나 연못에 넣어두면 15~25cm까지 자랍니다. 그리고 강물에 방류하면 90~120cm까지 성장하게 됩니다. 같은 물고기지만 어항에서 기르면 피라미가 되고, 강물에 놓아두면 대어가 되는 신기한 물고기입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코이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주변 환경에 따라, 생각의 크기에 따라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만들 수 있습니다. 자신의 무대를 어항이라 생각하지 않고 강물이라 생각해서 꿈의 크기를 키운다면 우리의 인생도 달라집니다.(승현옥)

 

8/20(주일) 15:1-8 삼손의 분풀이

한비자는 차분하지 못하고 일을 쉽게 일으키고 쉽게 격분해 앞뒤 생각을 분간하지 못하면 망한다.”(심연분이부자전후자 가망야)라고 했습니다. 삼손은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분노 때문에 애꿎은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남의 탓만을 하며 복수를 합니다. 많은 문제들 중 대부분은 스스로에게 원인이 있음에도 인정하지 않고 남의 티끌을 탓하며 자신의 들보는 생각하지 못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다며 분노를 표출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돌리실 것이나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주어진 선택이라는 자유는 책임을 지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권선화)

 

8/21() 15:9-20 삼손의 승리와 엔학고레

핑계 없는 무덤이 어디 있겠는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각하면 차가 막혀서이고 시험에 떨어지면 문제가 유달리 어려웠다는 등의 많은 핑계를 댑니다. 핑계로 잘못을 감추고 실패를 만회할 수는 없습니다. 핑계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될 뿐 아니라 자신과 남을 속이는 일입니다. 현실 도피를 하게하며 자신을 소극적으로 만들며 전염병처럼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여 주변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스스로의 능력 발휘에 걸림돌이 됩니다. 삼천 명이라는 사람이 모일수가 있었던 유다 민족은 타락하고 병약하여 삼손을 내어줍니다. 자신 앞에 놓인 시련에 굴복하지 말고 고통을 인내하며 용감히 나아가면 하나님의 영이 삼손에게 임하여 전투의지와 강한 힘이 생겼던 것처럼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여 행동으로 기치를 증명하는 여러분이 될 것입니다.(권선화)

 

8/22() 16:1-5 삼손과 기생 들릴라

안자어는 안자의 마부 이야기입니다. 안자는 춘추시대 말기의 제나라 재상이었던 안영의 존칭입니다. 전혀 교만한 태도가 없이 어질고 총명한 재상으로 칭송을 받는 안자의 마부꾼은 마차가 좋아지자 자신이 출세한 듯 어깨를 으쓱이며 거리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그 얼굴에 거만함으로 대하게 됩니다. 그 아내가 이를 보고 충고를 하게 되며 마부꾼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그 뒤로 언행에 각별히 조심했다고 합니다. 삼손은 자신의 괴력을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도피를 위해 사용합니다. 우리는 나의 명예나, 가진 것, 나의 전망 등을 내세우는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면 소용없으며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권선화)

 

8/23() 16:6-14 들릴라의 유혹

소탐대실-진나라 혜왕은 곡식이 잘되고 많은 보화를 지닌 강국 촉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석수장이에게 대리석으로 소를 조각하게 하고 촉나라 왕의 허영심을 자극하여 황금을 낳는 소라고 소문을 내며, 두 나라간의 길을 뚫는다면 선물로 황금소를 선물로 주겠다고 합니다. 길이 뚫리자 진은 촉을 공격하여 쉽게 정복을 하게 됩니다. 부유함에도 더 많은 것을 탐하다가 결국 진나라에 당하고 가졌던 모든 것을 잃고 마는 우를 범한 것입니다. 기생 들릴라로 삼손은 즐거움을 느끼게 되지만 동시에 영적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즐거움은 결국 우리에게 위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치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아무리 좋아보여도 결국 우리에게 해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권선화)

 

8/24() 16:15-22 삼손이 함정에 빠짐

호랑이는 토끼 같은 작은 동물을 먹이로 잡을 때라도 물소를 잡을 때처럼 온힘을 다해 잡는다고 합니다. 호랑이에게 쫓기는 토끼는 호랑이에게 1초 후에 호랑이의 밥이 될지라도 전심전력으로 살기위해 끝까지 도망간다고 합니다. 동물의 세계는 생존을 위해 전심전력을 추구합니다. 이러한 호랑이와 토끼의 모습에서 우리는 전심전력하는 삶, 끝가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되돌아봅니다. 삼손이 이방 여인의 애정에 스스로 묶여 달아나지 못하던 한심한 모습처럼 우리도 스스로를 죄에 묶어 끝내거나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가 아닌 현실이란 이름으로 죄의 사슬에 매여 괴로워하며 죄에 끌려 다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할 것 입니다.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능력을 펼치는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권선화)

 

8/25() 16:23-31 삼손의 마지막 복수

피그말리온 효과란 타인의 기대나 관심으로 인하여 능률이 오르거나 결과가 좋아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사람은 기대를 받으면 그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하게 마련입니다. 자신을 믿어준 사람에게 좋은 결과로 보답을 해주고 싶기 때문이지요. 출생부터 나실인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특별한 사람이었던 삼손은 자기관리를 하지 않고 타고난 재능만 믿고 자기 좋을대로 살며 자기의 눈이 뽑히는 수치를 당합니다. 꿈꾸던 모든 것이 허망하게 되었고 뒤늦게 회개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복수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계획을 모두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삼손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가 아닌 것이지요. 하나님은 반드시 승리하며 모든 계획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나님의 계획에 우리의 계획을 맞추면 우리의 삶이 더 충만하고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권선화)

 

8/26() 17:1-6 미가의 어머니가 우상을 만듦

사사기의 저자는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라는 구절을 반복함으로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압제와 고통, 종교적 혼란과 도덕적 타락 같은 많은 고난의 원인이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음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명확히 합니다. 이스라엘이 직면하고 있는 왕의 부재현상에 대해 사사기의 저자는,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 신권정치의 부재현상을 고발합니다. 이는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합니다. 우리에게는 왕이 필요합니다. 왕이 없음으로 인해 우상숭배와 죄악이 만연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를 이끄시는 왕의 부재는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고난과 고통의 이유가 됩니다. 나의 오늘은 왕께 보고 드리고 있으며, 왕께서 친히 이끄시는 삶이 되고 있는지 매순간 돌아보아야 합니다.(도성민)

 

8/27(주일) 17:7-13 미가의 제사장이 된 레위인

미가의 행위는 언뜻 보면 선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일들의 의도와 목적이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닌, 자기 자신이 받을 축복을 목적으로 하는데 있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주의 일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주일인 오늘, 우리가 성소에서 드린 모든 헌신과 봉사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나요? 찬양대와 교사와 안내와 봉사 등 오늘 우리가 드린 많은 섬김의 목적이 사람들에게서 칭찬이나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은 아니었는지, ‘주일 성수를 드렸으니 평안하라는 자기 위안은 아닌지, 그 목적이 오직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도성민)

 

8/28() 18:1-6 단 지파의 정탐꾼이 레위인을 만남

원래 단 지파 자손이 하나님께 분배받은 땅은 에브라임과 베냐민 서쪽의 평원지대였지만 그들은 그 땅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산지로 쫓겨 갔습니다(1:34). 그들은 할당받은 기업을 포기하고 가나안 북쪽의 라이스를 정복하기에 이릅니다. 단 지파의 라이스 정복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포기함으로 인해, 대신 생각해낸 자구책이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함으로 인해, 그 대신 실천하고 있는 인본주의적인 자구책은 없는지 살펴봅시다. 단 지파는 비록 당시에는 라이스 지역을 점령하긴 했지만 그들은 나중에 계시록의 십사만 사천 명을 호명하시던 열두지파의 출석점검에서는 그 이름이 사라지고 맙니다.(도성민)

 

8/29() 18:7-13 단 지파의 이동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다섯 정탐꾼은 라이스가 모든 것이 풍족하고 부족함이 없는, 세상에 둘도 없는 곳이라고 보고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레위 제사장의 점괘를 믿은 이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곳을 취해야 한다고 강권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행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일을 이루고 있는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사람들은 주의 이름으로 행해지기만 하면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믿어버리는 경우가 많지만, 그러나 이는 철저히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사람으로부터 나왔는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는지 철저하게 조사하고 또 살펴봐야 합니다. “그때 왕이 없으므로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느니라”(도성민)

 

8/30() 18:14-26 미가의 우상을 취한 단 지파

단 지파 자손이 신상을 꺼내어 가는 것을 본 레위 소년은 그들에게 무엇을 하느냐고 묻지만, 무섭게 위협하는 단 지파의 위세에 눌려 그 항의는 거칠지도 않았고, 지속되지도 않습니다. 성전을 호위하고 지켜야 할 레위인이었지만 목숨을 바쳐 그 명령을 수행하기는커녕, 오히려 단 지파에서 제시한 부와 명예를 보장하는 타협안에 너무도 쉽게 동의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호와께서 명하신, 지켜내야 할 '왕의 명령' 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지키려는 우리 앞에는 오늘도 끝없이 돈의 유혹과 높아짐의 유혹, 목숨 연명을 위한 생활의 염려 등의 타협안이 선택지로 제시되고 있습니다.(도성민)

 

8/31() 18:27-31 산당을 세운 단 지파

단 지파의 신상은 사무엘 시대에는 잠시 사라지지만 북 왕국의 창시자 여로보암의 금송아지에 의해 다시 그곳은 북 이스라엘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됩니다. 이 우상은 나름의 정통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정통성의 명분은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이란 이름에서 기인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십계명의 제 1계명과 제 2계명을 정면으로 어기면서도 여호와를 잘 섬기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를 섬기고 있다는 착각과, 권위 있는 이름이라는 양자의 결합으로 생겨난 정통성은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우상숭배라는 결과물을 낳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조직과 관습에 물들어 있는 우리들에게도 정통성이나 관습의 이름으로 세워진 또 다른 산당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도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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