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장 부드럽고 치열한 영혼,
어질고 심오한 구루의 넋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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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소에 두뇌가 빼어난 사람이 조금 교만하게 그 두뇌의 개인화 사유화로 자 신의 낮은 이기적 가치와 세속적 욕망으로만 살아간다면 흡사 돼지에게 진주를 준 격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식육으로 잡아 먹을 수도 없는 가치없는 못나고 흉한 돼지들이 떼로 녈려 있고 뭉쳐서
돼지 카르텔로 세상을 아주 못되게 만듬을 지난 겨울 이래 돼지들의 내란사태를 통해서도 신물나도록 목하 실감하고 있는 혼란 중이지만 ..)
그리고 나는 아주 빼어나고 좋은 두뇌는 무언가 자신을 초월하여 이기적 삶을 초월하는 보다 높은 창조적 가치나 공공 공익적 가치에 기여하거나 무상의 가치 인 사상 진리 예술 등에 헌신하는 것아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불교는 사람의 진리 ㅡ법을 추구하고 담는 그 그릇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일컫는다.
고 김경재 교수님은 나와의 인터뷰에서 매우 솔직하게 자신의 삶을 들려주시면서 나의 선생님의 젊은날에 신학말고는 무슨 삶의 방향이 있으셨냐는 질문에 공부는 그저 조금 한편이고 집안이 가난해서 의사가 되기를 바라고 그 바람에 따랐다면 전남 의대 정도는 갔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하신 바 있으셨다.
그런데 이번 장례에서 김상근 목사님 말씀으로 김경재 교수님이 고교졸업시에 전국 고사 석차가 3위로 광주고교에서도 수석으로 서울법대 가기를 기대했다고 하셨다.
이런 사실도 겸손하게 자신은 신학이 아니었다면 전남의대 정도 갈 정도로 말씀하시던 그런 분이셨으니 불가의 범주로는 존재론적인 대 겸손의 최 상근기였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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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교수님은 내가 뵌 적지않은 대표적 인물들 중에서도 매우 그 인품이 부드럽고 깊은 남성성의 전형이셨다. 아마도 매우 진보와 보수적인 신사로 나는 김경재 교수님과 내가 인터뷰로 감지하게 된 Dj 곁에서 정보부장과 통일원장관을 역임하며 남북문제를 헤쳐간 전직 장군 겸 군사전략가 임동원 두 분을 생각한다.
임동원 장군도 내유외강의 참 크리스챤 신앙으로 보수의 품격과 향기로운 인품을 지닌 멋진 신사셨다.
성공회대학교가 이른바 1990년대 열린 진보 대안대학으로 성가를 인정받기 전에 1970년대 한국상황에서 매우 작으나 강한 신학대학이 수유리에서 그 존재와 예언자적 역할을 놀랍게 수행하였다. 장공 김재준이 일찌기 조선신학원의 이름으로 설립한 한국신학대학이었다.
나는 비교적 짧게 수배와 피신상태로 계속 수학을 포기당하며 그 신학동산을 애정 깊은 한편의 졸시<화계삼동>을 남기며 떠나야만 했다. 많은 신학생들이 수유리 임마누엘 동산으로 지칭하는 그 아름답고 장려한 북한산과 화계사 계곡 아래 자리잡은, 지금은 사라지고 만 백악의 긴 일자형 신학대 건물과 4월과 5월에 피어나던 캠퍼스의 푸른 잔디를 언제나 잊을 수 없다. (그런 지성과 낭만의 작은 참 지성의 공간과 배움의 터 ㅡ 대학을 만들고도 싶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곳에는 당대의 시대정신과 모순 속에서 가장 고뇌스럽고 치열하게 스승과 제자들이 혼연일체로 한덩어리되어 기도하며 사랑하며 싸우던 살아 움직이던 예언자집단과 그리스도 공동체가 있었다.
그 날에 숱하게 제자들이 끌려가고 체포되고 수배되고 갇히우면 진심으로 심지어 집단 삭발로 항거하며 아파한 스승들이 있었고 그 스승들 또한 야만적인 정권에 의하여 마침내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거리로 내쫒겼다. 김경재 선생님은 당시에는 교수직을 박탈당하지는 아니한 당시로서는 매우 젊은 조교수로 이리뛰고 저리 뛰며 온갖 학내 민주화운동의 크고 작은 뒤치다꺼라도 마다하지 않으며 분망해하던 그 분의 30대 젊은 날의 모습을 또렷히 기억한다. 매우 부드럽고 웅숭깊은 품성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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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수유리 한국신학대 황금의 70년대 아우라 세대의 마지막 스승의 한분이신 한국문화신학의 정상과 거장이신 김경재 교수님이 어제 고단하셨던 85년의 지상에서의 선비와 학자의 향년을 마치시고 엊그제 드디어 오월의 푸른 하늘 아래 남한강 공원묘역의 일우에 묻히셨다.
마지막 길을 배웅한 수많은 조객 중에 한신대 59학번 동기이면서 동서의 인척으로 65년동안의 가히 일생을 동해행하신 한국민주화운동의 거목의 한분이신 김상근 목사님께서 거동의 불편함을 무릅쓰시면서 "으쌰으쌰" 시종 버스에서 오르내리는 수고로움으로 휠체어를 타시면서도 시종을 함께 하셨다. 그러면서 관에서 한줌의 재로 화하는 장면에서는 그 강하고 밝게 슬픔을 견뎌내시던 김목사님도 끝내 오열을 참지 못하셨다. 아쉽게도 치매로 고생하시는 왕년의 대단한 미모의 주인공셨을 교수님의 구순심 사모님도 치매 중이심에도 불구하고 백발의 처연하신 단장의 오열을 금치 못하셨다.
김상근 목사님은 하관식일 수 있는 마지막 봉안의 시간에 담담하고 부드럽게 고인에 대한 생애적 마지막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셨다. 그 중의 인상적인 말씀은 자신도 일찌기 잘 나가던 한양대학교 공과대 전기과에 입학한 자질로 다시 한국신학대에 입학할 때 수석입학으로 장학생이 될 것을 기대하였으나 의외로 도저히 자신과는 경쟁상대가 되지 않는 도저한 존재의 출현으로 수석도 장학생도 못되었는데 그 상대가 바로 일년 아래의 손위 동서가 된 김경재 교수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고인을 <신학적 천사>로 명명하셨다.
찬찬히 새겨보니 과장적 수사법 아닌 맞는 말씀이셨다.
난 소위 최소한의 지성도 참 역사도 배제된 이 땅의 영성 운운하는 믾은 사이비 가짜이거나 장사꾼들을 혐오하지만 선생님의 영성의 향기와 깊이는 절대 신뢰한다. 그 영과 진리의 겸손하며 충직한 한 구루...!
신학적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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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편집책임을 맡고있는 인문계간지 <산넘고 물건너> 2년 전의 특집대담으로 나의 발의로 김경재 교수님의 삶과 사상을 집중 조명한 바 있다. 나의 이름이나 선생님의 존함으로 구글이나 네이버를 검색하면 동영상 인터뷰도 마주할 수 있다.
과연 내가 평소에 깊이 그 인격과 정신, 학문적 내공을 존경하여 마지않는 김교수님은 2년 전 그 무더운 여름날, 이미 많이 초췌하게 지병이신 신장투석의 병중이심에도 불구하고 더위도 잊은채 2-3시간의 집중 인터뷰를 통하여 많은 깊이있고 솔직한 말씀과 가르치심을 들려주셨다.
나는 다른 분들도 그럤겠지만 젊은날에 거의 발분망식으로 무언가를 위하여 추구하며 공부한 바 있다. 몇가지 중요한 갈래의 사상적 공부 중에 우리의 동학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노력 속에서 내 눈이 번쩍 뜨이는 걸출한 논문이 한국철학회가 편찬한 최제우와 동학사상 특집호에 실렸다. 그 중에 나의 눈을 끈 것이 당시에 부산대 철학과 교수로 있던 윤노빈의 <동학의 세계사상적 의미>와 함께 이미 한신대 교수로 있던 김경재의 <최수운의 신관- 신의식과 체험 연구>였다. 1980년대 초반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시절에 김경재 교수는 이미 신분이 공식적안 교수로서는 이례적인 공부를 고려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한국철학 동양철학 전공의 석사과정을 하고 있던 차였다. 나는 이과정이 김경재 교수의 해외유학 못지 않은 그 이상의 매우 가치있고 창조적인 탐구의 시간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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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와 제3제국에 적그리스도세력으로 규정하며 항거한 것이 독일의 고백교회와 대표적 신학가 성공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성인으로 추도되고있는 20세기의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였다. 본회퍼는 24세의 약관에 교수자격시험에 패스한 그의 비범한 신학적 천재성과 명성으로 그가 유니온신학교에 있었기에 미국에 계속 있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박차고 위험한 독일로 가서 고백교회의 핀겐바르데 신학교를 통하여 신학을 가르치며 나치에 저항하다가 드디어 자신도 히틀러 암살모의와 혐의로 젊은 나이에 바이에른의 플로쉔뷔르크 수용소에서 처형되고 만다.
꼭 모든 구도자와 성직자와 진리를 공부하고 수행하고 추구하는이들이 본회퍼처럼 순교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불가의 위법망구ㅡ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고 버린다 ㅡ라는 개념처럼 그 진리나 의로움과 자신이 추구하는 어떤 가치를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불사르는 그런 열정과 순수와 치열함은 그 인간의 삶과 존재를 평가하는 준거와 지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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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교수님은 이른바 <<대승적 기독교와 신학>>을 주창하셨다. 그것은 서구신학의 전형 복사품으로 신학이 아니라 우리의 유구한 원효와 지눌의 불교 유교 특히 최수운의 동학사상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포괄 통섭하여 새로운 우리의 창조적 구원관과 신학으로 엮는 것이었다.
굳이 전통 신학적 범주로는 조직신학이며 문화신학일 수도 있지만 그는 굳이 이런 학문적 범주나 쟝르에 이미 구애받지 않는 심오하고 폭넓은 종교적 자유사상가의 면모셨다. 앞으로 꽃피어날 K사상의 탄생에 선생님의 정신과 가르치심이 매우 건강하고 반듯한 초석의 하나가 될 것이다.
과연 그 뉘들이 중요하면서도 이 고귀한 작업을 온전히 이어가며 감당할 것인가...?!
오월의 질푸른 하늘 아래 남한강의 개인의 재산이라고 하는 거대한 공원묘원에 김경재 선생님은 안장되셨다.
그 조금 가까운 높은 방향에 한시대의 정신과 신앙의 스승으로 함석헌 선생과 언제나 큰 역할로 동행하신 그의 신앙과 신학의 큰 스승 장공 김재준 목사님이 안장되어 계셔서 우리는 장례 후에 그곳에서 예배를 함께 하고 헤어졌다.
강원룡 목사도 멀지 않은 곳에 묘소가 있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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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의 삶을 성찰하시면서 내가 다시 사신다면 무슨 일로 사시겠느냐는 질문에 선생님은 시골의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시고 싶다 하셨던가.
한 시대와 인간 삶의 다채로운 요소와 운명적이며 실존적 문제에 누구보다도 치열하고도 심오한 지적 탐구와 탐색을 온 생애적으로 추구한 분으로서는 너무도 소박하고 질박한 시적 답변과 희망이셨다.
단순한 강단의 신학교수 만이 아닌 그리스도 예수의 영적 종의 존재와 삶을 은진교회와 작은 삭개오 교회 등을 통해 추구하신 선생님의 삶으로 볼 때 너무도 자연스레 이해가 가는 그런 꿈이셨다.
거기에 소월의 시를 말씀 끝에 덧 붙이셨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은노래 빛
강물 밖에는 별들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무상하면서도 그가 평생 깊게 사숙한 폴 틸리히의 <<Eternal Now -영원한 현재>>를 되뇌이게 한 김경재 선생님의 마지막 길과 하루였다.
참으로 부드러우시며 어지신 분, 그러나 영과 진리 앞에서 겸허하면서도 치열했던 한 스승의 마지막 길의 하루셨다.
남한강가 공원묘역에서 평생의 단짝 사모님과 합류할 그 시간을 기다리며 그가 존경하는 스승 장공 김재준 목사님의 가까운 발밑에서 남한강변의 은모래 별빛 노래를 그리움 속에서 홀로 잔잔히 부르실 선생님의 영복을 삼가 기원드린다.
- 최자웅 신부(대한성공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