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필승 전(前)> - 작가 김유정이 친구 필승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ree610 2024. 12. 2. 09:17

<필승 전(前)>
- 작가 김유정이 친구 필승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글쓴이: 백승종 박사

김유정(1908~1937)은 <동백꽃>과 <봄봄> 등 탁월한 단편소설로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이다. 1937년 3월 18일에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짤막한 편지 한 통을 친구에게 보냈는데, 그 사연은 다음과 같았다.

<필승 전(前, 앞)>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 있다. 그리고 맹열(猛熱, 지독한 고온)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달리 도리를 차리지 않으면 이 몸을 다시는 일으키기 어렵겠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의 담판이다. 흥패(興敗, 살고 죽음)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내가 돈 백 원을 만들어 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 주기 바란다. 또다시 탐정 소설을 번역해 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 있는 걸로 두어 권 보내 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50일 이내로 번역하여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 주마. 하거든 네가 극력(極力, 힘껏)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 다오.

필승아,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친다. 그러나 그 병을 위하여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의 몸이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30마리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10여 마리 먹어 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치질)가 돈을 잡아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하여다오.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 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 다오. 기다리마.
  
(1937년) 3월 18일 김유정으로부터 김유정, <<김유정 전집 2 – 소설, 문학>>, 엮은이 김종년, 가람기획, 2003; 김유정, <<원본 김유정 전집 - 개정증보판>>, 엮은이 전신재, 강, 2012

결핵이란 악질(惡疾)

정말 기막힌 이야기였다. 29살의 젊은 나이였음에도 김유정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맸다. 편지에서 언급한 병명은 치질이었는데, 서술된 증세로 미루어보아도 알 수 있듯 그는 폐결핵에도 걸려 있었다.

조선 후기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한국인이 결핵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천재 시인 이상도 결핵에 걸려 김유정과 같은 해에 사망했다. 보통 이 병을 ‘폐병’이라고 불렀는데, 가난한 선비 또는 지식인 사이에서 널리 퍼졌다. 전염성도 무척 강해 한 사람이 걸리면 식구들이 차례로 감염되기 일쑤였다. 20세기 초반까지는 서양에서도 결핵 때문에 세상을 등진 지식인이 많았다. 위대한 작가 조지 오웰과 프란츠 카프카도 이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일제강점기에 유명 지식인치고 결핵에 걸리지 않은 이가 드물 정도였다. 춘원 이광수가 대표적이었다. 처음에 그는 민족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존경을 받았으나 나중에는 친일파로 변신해 민족의 분노를 사기도 하였는데, 1917년에 청년 이광수는 폐결핵에 걸려 죽을 고생을 하였다. 그때 마침 근대 의학을 공부한 허영숙이 곁에서 힘껏 간호한 덕분에 살아났고, 그 인연으로 두 사람은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가난한 지식인이 결핵에 많이 걸린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그들은 곤궁한 삶으로 말미암아 영양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했다. 자연히 유난히 몸이 허약했고, 결핵에 쉽게 노출되었다. 둘째, 지식인들은 대체로 건강을 해치는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종일 글을 읽고 쓰는 데만 매달렸으며, 틈만 나면 담배를 피워대고 지나치게 술을 마셔댔다. 셋째, 나라를 빼앗긴 울분으로 원통한 일이 많았으나, 그들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뜯어고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우울하였다.

결핵에 특효약은 스트렙토마이신이다. 그 성분이 처음으로 발견된 것은 1943년이었다. 유대계 미국인 셀먼 에이브러햄 왁스먼(Selman A, Waksman) 교수의 실험실에서였다. 그 약품이 상용화되자 그동안 인류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던 결핵균은 점차 퇴치될 수 있었다. 1952년, 왁스먼 교수는 스트렙토마이신을 발견한 공으로 노벨상의 영예를 안았다.

작가 김유정이 필승에게 마지막 편지를 쓸 당시는 누구도 스트렙토마이신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때는 요양원에 지내며 영양을 충분히 섭취하는 것 이상 다른 방법을 몰랐다. 김유정이 마지막 편지에서 돈이 생기면 닭 30마리를 고아 먹겠다고 다짐한 것이며, 살모사와 구렁이를 10여 마리나 먹겠다고 말한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필승과의 우정

짐작하다시피 필승은 김유정의 절친(切親)이었다. 소설가이자 평론가 안회남(安懷南, 1909년 출생)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의 본래 이름이 필승(必承)이었다. 필승의 부친은 안국선(安國善)으로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을 쓴 개화기의 뛰어난 작가였다. 필승과 김유정이 처음 만난 것은 1924년이었다. 두 사람은 휘문고등보통학교에 함께 입학해 문학청년의 꿈을 키웠다.

학업을 마친 뒤 필승은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잡지사에 취직해 <<개벽(開闢)>>의 편찬에 힘을 보탰다. 1931년이 되자 그는 <조선일보>의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입선하였고, 그때부터는 본격적인 작가의 길에 접어들었다. 1933년부터 그는 안회남이란 이름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른바 ‘예술파’ 작가의 한 사람으로 김유정과 우정을 이어나갔다. 그 시절에 필승은 개인의 신변에서 발생하는 이야기, 또는 가정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일을 심리적으로 분석하는 작품을 집필했다. 1945년에 국토가 분단되자 필승은 북으로 넘어갔으므로, 남쪽의 문학사에서는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그렇지만 안회남은 본래 개성이 강하고 유능한 문인이었다.

필승은 김유정이 작가의 꿈을 펼칠 수 있게 마지막까지 조력하였다. 위에서 우리가 읽은 마지막 편지에서도 김유정은 친구가 자신을 도와주기를 바라며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다.

“또다시 탐정 소설을 번역해 보고 싶다. 그 외에는 (내가 돈을 벌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 있는 걸로 두어 권 보내 주기 바란다.”

김유정은 끝까지 병마와 싸워 이길 결심이었다. 그러려면 얼마간의 돈이 있어야 했고, 그래서 떠올린 것이 외국 작가의 탐정소설이었다. 그런 책을 골라 자신에게 보내줄 만한 친구라면 단연 필승이었다. 김유정은 친구의 박학다식함을 잘 알고 있었다. 필승이라면 번역해도 좋을 책을 여러 권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또, 필승이라면 자신이 번역한 원고를 어느 잡지에든 주선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작가 김유정에게 필승은 믿음직한 친구이자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 시절에 결핵으로 고생이 심하던 시인 이상은 김유정에게 동반 자살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김유정은 이상의 권유를 물리쳤다. “명일의 희망이 이글이글 끓는다.”(김유정, <실화>) 이처럼 말하며 김유정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을 궁리를 하였다. 그는 끝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말인데, 외롭고 우울한 김유정을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세상과 연결해 주는 필승이란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김유정이란 작가

나라의 운명이 실낱과도 같이 위태하였던 1908년 2월 12일, 김유정은 강원도 춘천의 실레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에서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는데,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하였다. 말까지 더듬어 나중에 휘문고보를 다닐 때는 ‘눌언교정소’를 다니며 말씨를 고쳤다고 한다. 그러나 평생 남 앞에 나서 말하기를 꺼렸다.

어린 시절에 김유정은 고향에서 한문을 익혔고, 3.1 만세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에 학업을 위해 서울로 보내졌다. 그는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고, 4년 이 지난 1923년에는 휘문고보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필승과 우정이 쌓였다. 1930년에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으나 곧 제적되었다. 결석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이란다. 그 이듬해에 김유정은 다시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곧 학업을 그만두었다.

청년 김유정은 한때 명창 박녹주를 사랑하였으나 실연으로 끝났다. 그러자 고향마을로 돌아가 야학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다 1933년이 되자 다시 서울로 올라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때 잡지에 발표한 소설이 <산골나그네>와 <총각과 맹꽁이>였다.

1935년에 김유정은 <조선일보>의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응모해 <소낙비>라는 작품이 1등으로 당선했다. 마치 4년 전에 친구 필승이 그랬듯 그도 등단 작가로 문단 생활을 시작했다. 마침 <조선중앙일보>에도 <노다지>가 가작으로 입선해 그의 명성은 대단하였다.

하지만 그 이듬해에 폐결핵과 치질이 심해져 김유정은 병상에 드러눕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봄봄>이나 <동백꽃> 등 수준 높은 작품을 연달아 발표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김유정은 병상에 누운 채 필승에게서 답장이 오기만 하루하루 기다리다가 1937년 3월 29일에 눈을 감았다. 다섯째 누이 유흥의 집에서 굵고도 짧은 천재 작가의 삶을 마쳤으니, 필승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지 11일 만이었다.

작가로 활동한 기간이 4년뿐이었으므로 그가 세상에 남긴 작품은 두툼한 책 한 권 정도였다. 정확히 말해 30여 편의 단편소설과 10여 편의 수필이 전부였다. 그러나 작품성이 매우 뛰어나 그의 문학을 연구한 학위 논문은 수백 편이나 된다.

빛나는 해학과 강렬한 삶의 의지

김유정을 연구한 학자들은 그의 문학세계에 특별한 점이 있다고 칭찬한다. 일제강점기에 고통에 시달리던 서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패배주의나 감상에 함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상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강한 의지가 작품마다 짙게 배어있고, 작품 도처에서 우리 말의 아름다움과 해학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는 평이다.

과연 김유정의 해학은 독특하다. 작중 인물은 비참한 현실에 직설적으로 분노를 표출하거나 눈물을 쏟는 일이 없다. 그들은 해학을 통해 독자에게 잔잔한 미소를 선사하는데, 이는 제아무리 삶이 고통스럽고 부당한 처지에 휘둘리더라도 자유를 얻고야 말겠다는 작가의 소망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김유정은 여러 작품에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작중 인물을 배치하기 일쑤였다. 언행이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고 교양이라고는 하나도 갖추지 못한 하층민 특유의 삶을 묘사한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결코 하층민의 삶을 조롱하거나 경멸하려는 뜻이 없다. 그보다는 하층민 특유의 끈질긴 생명력과 자기 확신을 작품으로 표현해, 그들이야말로 세상의 참된 주인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필승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도 우리는 작가 김유정의 그러한 정신세계를 잠시 엿볼 수 있다. 자신은 병마에 시달리다 못해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고 말았으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셈이었다. 단시간에 탐정 소설 두어 권을 번역해 돈도 벌고, 그것으로 닭을 고아 먹고 살모사와 구렁이를 잡아먹어서라도 반드시 생의 광명을 되찾으려고 몸부림쳤다고 할까.

탐정소설

필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되듯, 김유정은 생계를 위해서 탐정소설에 주목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는 비단 그뿐만 아니라 다수의 문인이 탐정소설이나 외국 동화의 번역을 통해 밥벌이를 하였다. 그 무렵 작가에게 지급되는 원고료는 400자에 50전 정도의 헐값이었다. 그러므로 김유정처럼 원고료에 매달려 사는 문인들은 여러 작품을 서둘러 번역하기에 바빴다.

편지에서 김유정이 친구 필승에게 부탁한 번역거리는 끝내 그의 수중에 들어오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숨을 거두고 한달쯤 지났을 때인 1937년 4월에 김유정이 번역한 <귀여운 소녀>라는 동화가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다. 이야기는 영국 어느 도시에 살았다는 가엾은 소녀 네리의 짧은 일생을 다루었다.

또, 그해 6월부터 6개월에 걸쳐 김유정이 번역한 탐정소설 <잃어진 보석>이 월간지 <<조광>>에 연재되었다. 기량이 출중한 정현웅의 삽화를 곁들여 독자들의 구미를 한껏 북돋웠다. 편집자의 말에 따르면, 김유정은 병상에서 그 소설을 번역하였고, 심혈을 쏟아 개작했다고 한다.

원작자는 반 다인(S. S. Van Dine)이라고 하였다. 그의 본명은 월러드 헌팅턴 라이트(Willard Huntington Wright, 1888~1931)이었는데, 김유정이 번역한 소설은 그의 출세작인 <벤슨 살인 사건(The Benson Murder Case)>이었다. 그 소설이 미국에서 처음 간행된 것은 1926년이었다. 뉴욕 월가의 주식중개인 한 사람의 미스테리한 죽음을 다룬 이야기였다. 작중에서 검찰은 알리바이에 집착하였으나, 주인공인 탐정 파이로 번스는 자신만의 심리분석법을 통해 진짜 범인을 찾아낸다는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김유정은 원작의 길이를 대폭 줄이고 구성도 바꿔 21개의 장으로 편역했다.

참고로, 방금 소개한 동화 <귀여운 소녀>와 탐정 소설 <잃어진 보석>은 <<원본 김유정 전집>>에 발표 당시의 모습 그대로 실려있다. 이 작품들을 김유정에게 소개한 이도 친구 필승이었을 것이요, 신문과 잡지에 연재를 주선한 이도 그였을 것이다.

김유정의 실연

작가 김유정이 명창 박녹주를 보고 첫눈에 반한 사건이 있었다. 1928년 봄, 작가가 스무살 때였다. 어느 날 목욕탕 문을 열고 나오는 한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본 순간, 그는 일찍 여읜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눈을 떼지 못했다. 수소문해 알고 보니, 그는 명창 박녹주(1905~1979)였다. 김유정보다 세 살이 많은 이였다.

이미 1925년에도 박녹주는 <동아일보>에 “여류 명창”이라고 소개될 만큼 지명도가 높았다. <동아일보>, 1925년 9월 5일.
갓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김유정이 애인으로 삼을 만한 여성이 아니었다. 알다시피 20세기 초반부터 창극(唱劇)이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명창들은 서울의 여러 극장에 출연하며 유명세를 누리고 있었는데, 박녹주도 그중 하나였다.

마침 조선극장에서 박녹주가 출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김유정은 무작정 여배우 대기실로 찾아가 잠시 말을 붙였다. 그때부터 그는 연정을 담은 편지를 정성껏 썼고, 여러 차례 사랑을 고백하였다. 하지만 유명 인물 박녹주에게는 이미 연인이 있었다.

박녹주는 학생신분인 김유정을 타이르며, 자신에게는 이미 정인(情人)이 있으니 공연히 다른 생각을 하지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당부했다. 그런 말을 듣고도 김유정은 연모의 정을 삭이지 못해 괴로워하며 한동안 술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김유정이 사랑한 여성이 박녹주만은 아니었다. 시인 박용철의 여동생 박봉자에게도 연정을 느껴 그는 30통도 넘게 편지를 썼다고 한다. 일곱 살 어린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편부 슬하에서 자라다가 일찍이 서울로 올라가 외롭게 학교를 다닌 김유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정서적으로 불안한 편이었다. 더구나 맏형이 집안 재산을 탕진해버린 바람에 청년 시절에는 가난하고 의지할 곳이 없는 파리한 지식인이 되고 말았으니, 그야말로 불우한 처지였다.

명창 박녹주든 신여성 박봉자든 그의 외로운 마음을 붙잡아주었으면 좋았으련마는, 그의 뜻대로 연애가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개인적 불운과 질병의 고통 속에서도 김유정은 해학을 잃지 않고 꿋꿋한 문학적 자아를 실현했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김유정 문학촌

오늘날 우리에게 김유정은 경춘선 전철역의 이름으로도 남아 있다. 그 역에서 5분쯤 걸어가면 작가의 고향 마을 춘천 실레마을이 나온다. 그곳은 ‘김유정 문학촌’으로 불린다. 마을에는 김유정의 소설 제목을 따라 여러 개의 길이름이 있다. ‘봄·봄길’, ‘동백꽃길’, ‘산골나그네길’, ‘만무방길’, ‘금따는 콩밭길’ 등이 방문객을 기다린다.

그 마을에는 김유정이 쓴 12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실레 이야기길’도 있다. 또, 그가 농촌계몽에 힘쓸 때 세운 ‘금병의숙’의 자취도 엿볼 수 있다. 금병의숙 앞에는 1988년 6월에 건립한 ‘김유정 기적비(紀蹟碑)’가 있어 작가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만약 이 가을에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면 경춘선을 타고 다시 김유정 문학촌에 들르고 싶다. (끝)

위에 사진은 김유정 문학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