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정과/설교 자료

8월 11일(오순절 후 12째, 광복절 기념) 주일 설교 자료

ree610 2024. 8. 6. 12:45

8월 11일(오순절 후 12째, 평화통일) 주일 설교 자료

글쓴이 : 조헌정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였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9월 첫 주부터 적용한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부활은 깨어진 세계를 지금껏 해석하고 움직여 온 거짓 이론과 폭력적 권위에 대한 ‘하느님의 반역’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존재이기에, “부활은 우리 모두를 반역자로 만든다”. 부활과 함께 새로이 창조된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고통당하는 자에게 값싼 위로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빈 무덤이라는 부조리를 증언함으로써 현실의 부조리를 부숴내는 것이다.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주일 본문]

   왕상 19:4-8; 시 34:1-8; 엡 4:25-5:2; 요 6:35, 41-51(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열왕기상 19:4-8}

4 자신은 홀로 광야로 들어가서, 하룻길을 더 걸어 어떤 로뎀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에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기도하였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5 그런 다음에, 그는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서 잠이 들었는데, 그때에 한 천사가, 일어나서 먹으라고 하면서, 그를 깨웠다.
6 엘리야가 깨어 보니, 그의 머리맡에는 뜨겁게 달군 돌에다가 구워 낸 과자와 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그는 먹고 마신 뒤에, 다시 잠이 들었다.
7 주의 천사가 두 번째 와서, 그를 깨우면서 말하였다.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8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서, 밤낮 사십 일 동안을 걸어, 하나님의 산인 호렙산에 도착하였다.

[신학적 관점]

바로 앞 구절에는 성서에서 가장 통쾌한 이야기인 출애굽 과정에서 애굽 군대가 홍해 바다에 수장당하는 이야기 이상으로 통쾌한 엘리야의 갈멜산 승리 이야기가 나온다. 백성들과 함께 바알의 선지자들을 모두 사로잡아 죽이고 가뭄이 그치고 비가 내린다. 모든 목적이 달성되었다. 그런데 엘리야는 왕후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겠다는 맹세 얘기를 듣고 혼비백산하여 광야로 들어가 죽기를 간청한다. 이미 여러 차례 죽음의 위협을 겪어온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가 이렇게 갑자기 이런 겁쟁이로 변하다니!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사람은 누구나 지나치게 승리감에 도취하여 자만하다 보면, 작은 위협에도 쉽게 공포를 갖게 된다고 하는 인간의 약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엘리야는 갈멜산의 승리를 YHWH의 승리가 아닌 자신의 승리로 여겼던 결과이다.

[목회적 관점]

우울(depression) 혹은 탈진(burnout)이란 심리학 용어가 있다. 다른 직업에도 마찬가지이지만, 하느님 나라 건설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갖고 일하는 목회자에게도 우울증과 탈진 현상이 일어난다. 특히 자신이 목표했던 성공적인 목회를 달성한 이후에 찾아온다. 대형교회 목사가 탈선 행위로 인해 사회적 물의를 불러오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이 때문이다. 목회자는 공인으로서 순간순간의 자기 성찰이 중요한 이유이다. 하느님이 자기 편이라고 하는 순간 탈선이 일어난다. 언제나 하느님 편에 서고자 하는 곧 사회적 약자(세상의 중심)와 함께 하고자 하는 노력을 그치지 말아야 한다.

[주석적 관점]

천사의 도움 이야기는 사르밧 여인이 경험했던 이야기 순서와 흡사하다(17:12-16).

로뎀(히) 나무는 관목 덤불인 싸리나무(broom)를 말한다. 성서에 4번 등장한다. 싸리나무는 집단 식물이지만, 본문에서는 엘리야의 홀로됨을 강조하기 위해 단수로 등장한다.(Feasting 317)

엘리야와 모세의 비슷한 이야기 넷. 1. 모세 또한 너무 힘이 들어 죽음을 자청한다(민 11:11-15). 2. 모세 또한 십계명 돌판을 받기 위해 40일을 하느님의 산에 머문다(출 24:18). 3. 특별 계시를 보여달라고 요청한다(출 33:12). 4.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 모세가 바위 위 틈바구니에 서 있듯이(출 33:22), 엘리야 또한 동굴 밖 바위 위에 서서 세미한 음성을 듣는다(왕상 19:9). (Feasting 319)

[설교적 관점]

독립투사의 경우 목숨을 내어놓고 투쟁을 한다. 하느님의 사람 또한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고 일을 한다. 그런데 엘리야는 왜 이렇게 쉽게 자기 목숨에 연연하게 되었을까? 그는 이미 아합과 이세벨의 칼날을 피해 3년간의 도피 생활을 한 바 있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경험했고, 하느님의 명에 따라 아합과 이세벨에 맞서 갈멜산 대결을 제안한 사람이다. 하느님도 그의 편이었고, 백성들도 그의 편이었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그렇게 약한 사람이 되었을까?

그는 홀로 광야에 들어가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전에 자기 조상보다 조금은 나은 사람으로 자신을 여긴 것이다. 사람은 자기 승리(功)에 도취하면 쉽게 자기 환상에 빠져 교만에 이르고 그리하다 보면 조그마한 장애에도 쉽게 좌절하게 된다. 좌절하게 되면 우울증세로 인해 빛은 보이지 않고 어둠만 보인다. 엘리야가 조금만 여유를 갖고 정신을 차렸다면, 이세벨의 살해 위협에도 불구하고 오바댜의 숨겨놓은 하느님의 예언자 백 명을 떠올렸을 것이고(18:4), 백성들이 자기편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18:39).

공을 이루었으면 공을 떠나라는 노자의 말이 있다(功成而不居). 바울은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했다(롬 14:8).

{시편 34:1-8}

1 나 어떤 일이 있어도 야훼를 찬양하리라. 주를 찬양하는 노래 내 입에서 그칠 날이 없으리라.
2 나의 자랑, 야훼께 있으니 비천한 자들아 듣고 기뻐하여라.
3 나와 함께 "야훼, 높으시도다" 노래 부르자. 모두 소리 맞춰 그 이름을 기리자.
4 야훼 찾아 호소할 때 들어 주시고 몸서리쳐지는 곤경에서 건져 주셨다.
5 그를 쳐다보는 자, 그 얼굴 빛나고 부끄러운 꼴 당하지 아니하리라.
6 가엾은 자의 부르짖음을 야훼, 들으시고 곤경에서 건져 주셨다.
7 야훼의 천사가 그를 경외하는 자들 둘레에 진을 치고 그들을 구해 주셨다.
8 너희는 야훼의 어지심을 맛들이고 깨달아라. 그에게 피신하는 자는 복되다.

{에베소서 4:25-5:2}

25 그러므로 여러분은 거짓을 버리고, 각각 자기 이웃과 더불어 참된 말을 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서로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26 화를 내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27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28 도둑질을 하는 사람은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말고, 수고를 하여,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이를 하십시오. 그리하여 오히려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도록 하십시오.
29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십시오.
30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성령 안에서 여러분은 구속의 날을 대비해서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31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은,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32 서로 친절히 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
1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자기 몸을 내주신 것같이,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신학적 관점]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신앙공동체 구성원이 지켜나가야 할 삶의 원칙들이다.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는 구절은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다. 차라리 예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라면 가능하겠지만, 인간이 어찌 신을 본받을 수 있을까? 아마도 이어지는 구절과 연관하여 이해한다면, 하느님이 자신을 비워 인간으로 오셔서 인류 구원을 이루었듯이, 희생의 본을 강조하기 위한 말씀일 것이다.

[목회적 관점]

말을 할 때, 세 개의 질문을 먼저 생각하라고 한다. 첫째 진실한가? 둘째, 반드시 해야 하는가? 셋째, 꼭 지금 해야 하는가? 필요한 말도 적절한 때가 있다.

[주석적 관점]

로마제국은 황제숭배를 통해 모든 민족들이 하나의 몸임을 강조했다(25절). 그러나 여기에는 여성과 노예와 비로마인들에 대한 차별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거짓 구호였다. 바울은 이러한 거짓 구호(Pax Romana)에 대해 종말론적 관점에서(30절) 참의 구호(Pax Christi)를 말한다.

[설교적 관점]

각자에게 가장 깊게 다가오는 말씀은 어떤 것인지 물어보자. 십계명과 같이 열두 문장으로 정리하여 주보에 <0월 말씀>으로 싣는 방법도 좋다.

도둑질을 제 손으로 땀 흘려 일하지 않고 벌어들이는 불로소득이라고 정의할 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둑질의 개념은 어디까지 적용할 수 있을까? 부동산 투기나 엄청난 유산, 로또는 떳떳한(28절) 재물인가? 오늘날 제1세계 유럽 국가들은 과거 식민지 시대에 아프리카/아시아/아메리카 대륙에서 약탈한 금은보화와 노예들을 바탕으로 오늘의 부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모두 기독교 국가들이다. 살상을 목표로 하는 전쟁 무기 판매 수익은 정당한가?

요즘은 관심과 사랑의 표징으로 몸에 문신을 새기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인(印)치심을 받은 사람들이다(30절). 바울 시대에 노예들은 이마에 표식을 달고 다녔다. 만약 우리가 이마에 십자가의 문신(혹은 십자가 목걸이)을 하고 산다면 말이나 행동에 있어 많은 부분이 달라질 것이다. 만약 자기 차에 자신이 다니는 교회 이름을 크게 새겨 놓았다면, 운전 습관에 많은 변화가 생길 것이다.

{요한복음 6:35, 41-51}

3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41 유대 사람들은 예수께서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으므로, 그를 두고 수군거리면서
42 말하기를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를 우리가 알지 않는가?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하는가?" 하였다.
43 그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서로 수군거리지 말아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나는 그 사람들을 마지막 날에 살릴 것이다.
45 예언서에 기록되기를 '그들이 모두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하였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은 다 내게로 온다.
46 이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본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만이 아버지를 보았다.
47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의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다.
50 그러나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빵은 이러하니, 누구든지 그것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신학적 관점]

어떤 삶이 참삶인가? 이는 인간이 자기 존재 의식을 갖게 된 이래 갖는 본질 질문이다. 가장 보편적인 답은 하늘의 뜻(命)에 따라 사는 삶이다. 여기서 하늘의 뜻은 누가 어떻게 구별하는가에 따라 차이가 생긴다. 각 종교는 종교대로, 각 종파는 종파대로, 각 교단은 교단대로, 각 교회는 교회대로 자신이 참 가르침을 전파한다고 주장한다.

저자 요한은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느님의 아들로 오셨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빵)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참삶, 곧 영생의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당시는 모세의 말씀(만나)을 영생의 빵으로 여긴 유대교에 대한 비판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대안으로 선포되었다. 문제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말씀을 보다 중요한 말씀으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수많은 교단과 교파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서의 YHWH 하느님을 창조주로 고백하기에 전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는 삶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에 보다 합당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목회적 관점]

종교적 용어는 추상적이고 고백적이기에 모두가 같은 신을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이를 구체적인 자기 언어로 표현하게 되면 개인의 편차가 드러나게 된다. 여기서 차이를 강조하기보다는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을 강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주석적 관점]

나사렛을 중심한 이웃 마을 사람들은 예수를 어려서부터 알고 있었고 그 부모를 알고 있었다. 곧 예수에 대한 선입관과 편견을 갖기 마련이다.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선입관과 편견을 깨야 한다.

[설교적 관점]

요한복음은 기적을 표적으로 표현하는 만큼 여러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이를 우리의 일상적인 용어로 풀어쓰는 일이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본문을 있는 그대로 반복하면 머리로는 이해는 되지만, 마음에는 닿지 않는 하늘의 구름을 잡는 격이 되고 만다.

역사 상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다.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모세를 비교하고 있다. 모세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 구원의 핵심 요소였다. 모세를 메시야로 여긴 당시 유대인들은 요한공동체를 이단으로 핍박하여 유대 사회로부터 추방했다. 이에 요한은 모세의 가르침을 부족한 말씀으로(여섯 항아리, 열두 해 등등) 해석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참 메시야, 참 진리로(일곱 표적, 일곱 에이미 등) 내세우고 있다. 설교자는 역사 상황적으로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세 율법에 기초한 안식일법, 정결법, 성전법 등이 가진 한계와 결점을 지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갖는 구속(해방)의 의미를 되새겨야 할 것이다. 주의할 점은 반유대주의(anti-semitism)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 철폐가 아닌 율법의 완성자로 오셨기 때문이다.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ㅎㆍㄴ’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