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정과/설교 자료

7월 21일(성령강림절 9째) 주일 설교 자료

ree610 2024. 7. 16. 11:46

7월 21일(성령강림절 9째) 주일 설교 자료

글쓴이 : 조헌정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였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겸하였다. 그러나 교단별로 창조절 적용 구간이 다르기에 사순절과 같이 성령강림절 기간을 7주(50일)로 하고 그 이후부터 창조절로 부른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부활은 깨어진 세계를 지금껏 해석하고 움직여 온 거짓 이론과 폭력적 권위에 대한 ‘하느님의 반역’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존재이기에, “부활은 우리 모두를 반역자로 만든다”. 부활과 함께 새로이 창조된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고통당하는 자에게 값싼 위로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빈 무덤이라는 부조리를 증언함으로써 현실의 부조리를 부숴내는 것이다.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주일 본문]
  렘 23:1-6; 시 23; 엡 2:11-22; 막 6:30-34, 53-56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예레미야 23:1-6}

1 "내 목장의 양 떼를 죽이고 흩어 버린 목자들아, 너희는 저주를 받아라. 나 주의 말이다.
2 그러므로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내 백성을 치는 목자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내 양 떼를 흩어서 몰아내고, 그 양들을 돌보아 주지 아니하였다. 너희의 그 악한 행실을 내가 이제 벌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3 이제는 내가 친히 내 양 떼 가운데서 남은 양들을 모으겠다. 내가 쫓아냈던 모든 나라에서 모아서, 다시 그들이 살던 목장으로 데려오겠다. 그러면 그들이 번성하여 수가 많아질 것이다.
4 내가 그들을 돌보아 줄 참다운 목자들을 세워 줄 것이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무서워 떠는 일이 없을 것이며, 하나도 잃어버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5 내가 다윗에게서 의로운 가지가 하나 돋아나게 할 그날이 오고 있다. 나 주의 말이다. 그는 왕이 되어 슬기롭게 통치하면서,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6 그때가 오면 유다가 구원을 받을 것이며, 이스라엘이 안전한 거처가 될 것이다. 사람들이 그 이름을 '우리를 공의로 다스리시는 주'라고 부를 것이다.

[신학적 관점]

예언과 성취라는 전통적인 제1, 2성서의 신학적 관점에서 본문은 매우 간명하게 종말론적 기독론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우리는 제2성서와 달리 제1성서는 반드시 제2성서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예레미야가 본문의 예언을 통해 이천육백 년 후에 등장할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추정하고 있었다는 결론을 미리 내릴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시대적으로 보면 바빌론의 침공을 앞두고 유대 왕조와 성전 집단의 부패와 타락을 고발하고 이를 대신할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여기서 예레미야가 바빌론에 의한 유다 멸망 이후 60여 년이 지나 페르시아 왕 고레스에 의해 다시 돌아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이다.

[목회적 관점]

잘못된 지도력은 양 떼를 흩어서 몰아내게 한다. 양 떼들이 흩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목자들이 자신들의 안위와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져 있기 때문이다. 흩어진 양들을 모으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목회의 방침들은 무엇이 있을까?

[주석적 관점]

어떤 주석가들은 3절의 ‘흩어진 양들’을 예루살렘 성전 파괴라는 바빌론의 최종 침공(BCE 587) 이전에 있었던 몇 번의 침공으로 인한 유배당한 자들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이를 후대의 삽입으로 설명한다.

시대적으로 보면 유배당한 여호와긴 왕과 허수아비에 불과한 시드기야 왕의 때이다.

[설교적 관점]

유다 왕조 자체가 이미 혈통으로 다윗 가문을 이어오고 있는데, ‘다윗의 의로운 가지’와는 어떻게 구별되는 것인가? 본문은 지금까지의 통치는 양 떼를 흩어 버렸지만, 의로운 지도자는 남은 양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 돌봄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혈통을 강조하는 ‘다윗’보다는 ‘의로운 가지’에 방점을 두면, 이는 기존의 강자 중심의 ‘위로부터의 아래로’의 권력에 기반한 통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약자 중심의 ‘아래로부터 위로’라는 ‘섬김’의 하느님 나라 통치 방식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언과 성취라는 고전적인 해석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도력을 종으로서의 섬김의 지도력(servant leadership, 눅 22:27)의 관점에서 본문을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오늘 한국의 분단 상황에서 ‘다윗에게서 나오는 의로운 가지’는 누구 혹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본문을 포함한 성서 전체에서 의로운 가지 곧 메시야는 한 특정 인물로 서술하지만, 전혀 새로운 시대 곧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현대인들에게도 이는 여전히 유효한 주장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평화통일과 인류공동체를 지향하는 어떤 특정 이념을 공유하는 한시적인 사회 집단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까?

{시편 23}

1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2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3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4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5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 부어 내 머리에 발라 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6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에베소서 2:11-22}

11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난날에 육신으로는 이방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손으로 육신에다가 행하는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무할례자'라고 일컬었습니다.
12 그 때에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었고, 이스라엘 시민권에서 제외되어서, 약속의 언약에서는 외인으로서, 세상에서 아무 소망도 없이, 하나님도 없이 살았습니다.
13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려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된 것을 없애시고,
15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드셔서, 평화를 이루시고,
16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시려는 것입니다.
17 그분께서는 오셔서,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 이방인 여러분에게 평화를 전하시고,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18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와 같은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와 예언자의 터 위에 세워진 건물이요, 그리스도 예수 스스로가 그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성전으로 자랍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서 함께 건물을 이루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거하실 곳이 되어갑니다.

[신학적 관점]

본문과 더불어 고린도후서 5:16-21과 골로새서 1:15-20은 구원을 하느님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간 화해의 사역으로 고백하는 초대교회의 찬양으로서 교회론의 기초가 된다.

바울이 당면한 가장 큰 선교의 과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 분리의 문제였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핏줄과 할례를 하느님 나라 백성 곧 구원의 잣대로 삼고 있었다. 이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이 모든 분리의 장벽이 예수 십자가의 죽음으로 무너졌음을 선언한다. 바울은 더 나아가서 남자와 여자의 성적 차별, 주인과 노예라는 신분의 차별까지도 무너졌다고 말한다(갈 3:28). 바울은 백 년 전 혹은 오백 년 전의 사람이 아니라, 이천 년 전의 사람이다. 당시 로마제국의 기반은 노예제도였으며, 시민권이 있는 로마인과 시민권이 없는 비로마인(야만인, barbarian)이라는 신분제였다. 바울은 이를 다 무효화시켰다는 점에서 너무나도 혁명적이었다. 이는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이 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차별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종교라는 명목하에 기존의 틀 안에 머물려고 한다는 점에서 바울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여러 가지 이유로 분열이 되어 있고, 서로를 향한 미움의 사회로 치닫고 있다는 점에서 본문은 신학적으로 매우 소중한 신앙고백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라는 선언은 일치와 화해의 사역이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소중한 교회의 사역임을 천명하고 있다.

[목회적 관점]

현재 남한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인구 5%에 해당할 만큼 많다. 그러나 우리는 단일민족의 허구성에 갇혀 얼굴색이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저들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배타성이 매우 강하다. 우리 교회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있는 이방인이 있다면 그는 누구일까?

[주석적 관점]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대들보를 중심으로 하는 한옥과는 달리 사각형의 돌집은 네 귀퉁이에 있는 ‘모퉁잇돌(corner stone)’이 중심이 된다. 곧 우리말로는 ‘주춧돌(head stone)’로 의역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

[설교적 관점]

형제의 다툼이 있는 자리에는 부모님이 머물 자리가 없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 다툼이 있고 분쟁이 있다면 하느님이 머물 수가 없다. 교회 안에서 하느님이 자기 편이라고 우기는 일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하느님이 내 편이라고 우기는 일보다 내가 하느님 편에 서는 일이 보다 중요하다.

시야를 넓혀 보면 오천 년을 함께 살아온 남과 북의 형제자매들이 외세의 농간으로 인해 서로 총을 겨누는 주적이 되었다. 한강토 안에 하느님이 머물 자리가 어디에 있을까? 북의 형제자매들을 하느님의 한 가족으로 받아들일 때, 하느님은 우리 안에 머무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사람”이란 내가 개과천선(改過遷善)하는 일이 아니라, ‘나’와 내가 원수로 생각하는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되어 나도 없고 그도 없는 오직 새로운 하나가 되는 창조를 말한다(15, 16절). 그런데 이 창조는 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육정과 선입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기 투쟁의 결과로 주어진다.(갈 5:24) 더 나아가 오늘의 기후위기 시대에서 ‘새인간’은 자연과도 하나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마가복음 6:30-34, 53-56}

30 사도들이 예수께로 모여와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일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거기에는 오고 가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배를 타고, 따로 외딴 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런데 많은 사람이 보고서, 그들인 줄 알고, 여러 성읍에서 길을 따라 그곳으로 함께 달려가서,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이르렀다.
34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으므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53 그들은 바다를 건너가서,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닻을 내렸다.
54 그들이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은 곧 예수를 알아보고,
55 그 온 지방을 뛰어다니면서, 예수께서 어디에 계시든지, 병자들을 침대에 눕혀서 그곳으로 데리고 오기 시작하였다.
56 예수께서, 마을이든 성읍이든 농촌이든, 어디에 들어가시든지, 사람들이 병자들을 장터거리에 데려다 놓고, 예수께 그 옷술만에라도 손을 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병이 나았다.

[신학적 관점]

교회력은 오천 명 급식 기적 이야기(35-44절)와 물 위로 걸으시는 이야기(45-52절)는 따로 떼어냈다. 급식 이야기는 다음 주 요한복음 본문으로 대체하고 있다. 이는 마가의 샌드위치 문학 방식을 감안한 조처이기도 하고 오천 명 급식 기적 이야기에 담긴 보다 풍성한 신학적 이해를 끄집어내기 위한 의도이기도 하다.

저자는 예수를 기적 치유자로 소개하는 것이 목적인가? 아니면 이는 하나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말하고 있는가? 저자 마가는 너무나 많은 민중들이 찾아오는 바람에 예수 일행이 밥을 먹을 틈이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조용한 곳으로 가고자 했지만, 사람들은 거기까지 먼저 와서 예수 일행을 기다린다. 암울한 시대 속에서 메시야 대망에 대한 민중의 열망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병자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병에 대해 고대인들과 현대인들의 판단은 전혀 다르다. 현대인들은 병을 세균 감염에 의한 것으로 판단하지만, 고대인들은 이를 죄에 대한 하늘의 벌로 여겼다. 따라서 병의 치유를 위해서는 먼저 죄의 용서를 받아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서 속죄 희생제물을 드려야 했다. 그러나 갈릴리의 가난한 민중들은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나 경제적 여유가 전혀 없었다. 결국 본문에서 말하는 병자는 단순히 질병으로 인해 신체적 활동이 제한된 사람을 뜻하는 의학적 용어가 아니라, 내일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고 사회로부터 버림받았음을 뜻하는 사회적 용어가 된다. 따라서 옷 술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일어났다는 말은 예수의 치유 능력의 위대함을 말하기보다 메시야를 기다려 온 민중들의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목회적 관점]

병자들은 마치 물속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갖기 마련이다. 그러나 목회자들은 본문에서와 같이 병자를 고칠 치유 능력이 없다. 간혹 그러한 능력이 있다고 소문이 난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극히 제한적일뿐더러 고침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때가 되면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치유의 기적은 순간일 따름이다. 현대 목회에서 예수를 기적 치유자로 이해하는 것은 여러 문제를 야기시킨다. 성서가 말하는 기적에 대한 새로운 이해 가 필요하다.

[주석적 관점]

제자를 ‘사도’라 부르는 명칭이 특이하다. 마가복음에서 처음 등장한다. 제자는 ‘배움’에 방점이 있다면 사도는 일을 위해 보냄을 받았다는 곧 ‘행함’에 방점이 있다.

게네사렛 땅은 갈릴리호수 서쪽 막달라와 가버나움 사이에 있는 곳으로 유황 온천이 많아 옛부터 환자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설교적 관점]

양은 목자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동물이다. 로마제국의 핍박과 착취로 인해 갈릴리의 민중들은 목자 없는 양 같이 갈 곳을 모르는 채 떠돌이가 되었다. “불쌍히 여기셨다”는 번역은 주체와 객체가 따로 분리된 감정을 말한다. 원어(splagxnisthe)의 뜻은 “창자가 뒤틀리는 아픔” 곧 주체와 객체의 혼연일체(渾然一體)의 고통을 말한다. “함께 아파하다”(동병상련, compassion)이다. 예수의 치유 능력은 바로 저들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는 함께 아파하는 마음에서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기적의 원천이다. 기독교의 신은 인간의 삶과 유리된 채 멀리 떨어져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영역 안에 들어와 인간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는 사랑(아가페)의 신이다. 에이브래햄 헷셀은 이를 신적 정념(divine pathos)이라 불렀다.

<신은 나에게>

                      - 로이 캄파넬라

나는 신에게 나를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모든 일에 성공할 수 있도록
그러나 신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습니다.
겸허함을 배울 수 있도록

나는 건강을 부탁했습니다.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러나 나는 허약함을 선물 받았습니다.
더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나는 부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행복해질 수 있도록
그러나 나는 가난함을 받았습니다.
더 현명해질 수 있도록

나는 힘을 원했습니다.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그러나 나는 나약함을 선물 받았습니다.
신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나는 모든 것을 갖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그러나 나는 삶을 선물 받았습니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도록

나는 내가 부탁한 것들을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나는 하찮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신은 내 무언의 기도를 다 들어 주셨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ㅎㆍㄴ’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