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시

[너에게로 걸어가야 겠다] -김종제- 높은 담을 기어올라 앉아 날카롭게 손톱 세운 붉은 장미꽃 한 철 눈만 뜨고 살았다

ree610 2024. 5. 12. 07:11

[너에게로 걸어가야 겠다]

-김종제-

높은 담을 기어올라 앉아
날카롭게 손톱 세운 붉은 장미꽃
한 철 눈만 뜨고 살았다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푸르른 소름 같은 열매 지녔던 회화나무
한 철 귀만 열고 살았다

나는 나는
희디흰 벽지속 감옥에 갇혀
살다 썩고 뼈만 남은 나는 나는
구토하는 입만 열고 한 철을 지냈다

아아, 한 순간
꽃에게 꽃잎이었던 것
나무에게 있어 나뭇잎이었던 것
사람에게 있어 절대적인 사랑이었던 것

한 순간 붉은 피와 같은 것들
하늘이나 바다와 같이 푸르렀던 것들
눈이나 눈물과도 같이 흰 것들
둥굴게 굴러가는 바퀴도 없이
펼치고 날아가는 날개도 없이
광속으로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냐

나는 나는 맨발로
시간도 멈춰 놓고
한없이 느리게 느리게 걷고 싶다

때로는 그냥 선 채로 잠이 들어서
돌이 되거나 산이 되거나
지나가는 새들이나 바람에게
한 점씩 적선도 하면서
아주 아주 느리게 느리게
희망을 향해 소원을 향해
너에게로 무작정 느리게 걸어가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