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y Question: 투표가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나요?
우리의 역대 국회의원 선거 중심으로 확인해봅니다.
1.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은 선거 때문에 사라졌습니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은 심장마비로 급서합니다. 대통령후보는 이승만 단독으로 그는 88.7%를 득표합니다. 문제는 부통령선거였습니다. 1956년 부통령 당선자는 이기붕이 아니라 장면이었습니다.
1960년에도 같은 결과 나오면 노령의 이승만이 죽으면 장면으로 대통령이 승계됩니다. 그걸 막고자 인기없는 이기붕 자유당후보의 당선을 위해 역대 최악의 부정선거, 부정개표가 이루어졌습니다.
이기붕은 79% 득표로 발표되었지만, 마산에서부터 3.15부정선거 항쟁이 본격화되었습니다. 투.개표 부정의 수준은 국민의 인내의 임계치를 넘어섰습니다.
4.19민주혁명의 결과 이승만은 하야하고 망명했습니다. 그러나 자유당은 온건파 중심으로 결속하여 7.29 선거에 나섰습니다. 결과는? 민의원.참의원 총수로 정리해보면 민주당은 206석, 자유당은 6석, 사회대중당은 5석이었습니다. 그 뒤 자유당은 해체되었습니다. 자유당이 사라진 것은 7.29 민의의 심판이었습니다.
2. 박정희 정권의 몰락은 선거 때문이었습니다.
-1967년 v.1971년의 총선을 봅시다. 67년 선거엔 공화당이 압승했습니다. 공화당 129, 신민당 45 였으므로 2/3 이상을 차지(여기에도 부정선거 비판 많습니다)했고, 그 효과로 69년에 대통령 3선개헌헌법을 야간에 날치기로 통과시켰습니다.
그런데 1971년엔 야당이 선전했습니다. 공화당 113, 신민당 89석이었으므로, 또한번의 개헌이 불가능해졌습니다. 박정희의 대통령직은 1971+4=1975년에 끝납니다.
그러자, 박정희는 1972년 유신쿠데타를 일으켜 불법으로 국회를 해산하고, 계엄령 하에서 유신헌법을 통과시켜 대통령 중임제한을 없애버리고, 국회의석 중 1/3은 대통령이 지명(유정회)하게 만들었습니다. 최악의 독재헌법시대를 열었습니다.
- 이런 상황에서 민의의 심판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1978년 총선에서 뜻밖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물론 유정회 몫 1/3을 갖고 있기에 여당 절대우위가 흔들린 건 아닙니다. 하지만 선거득표율에서 신민당이 32.8%, 공화당이 31.7%...야당이 여당을 득표율에서 1.1% 더 앞섰습니다. 유신정권 심판의 민의를 확인한 야당은 관제야당이 아니라 선명야당의 기치를 높이 들었습니다. 1979년 김영삼이 신민당총재가 되었고, 선명민주화의 길을 달려가자 다급한 박정권은 김영삼의 의원제명까지 밀고 나갔고, 선거민의가 짓밟힘을 확인한 부.마 시민들의 범시민민주항쟁을 했고, 결국 그 과정에서 박정희의 피살로 유신체제가 종식되었습니다.
어쩌면 수십년 더 지속될 것도 같았던 박정권도, 선거 민의의 표출 앞에 몰락한 것입니다.
3. 전두환의 몰락도 선거 때문이었습니다.
-전두환은 1979년 12.12 군사쿠데타, 1980년 5.17 정권장악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5.18민주항쟁을 짓밟고 절대권력을 틀어쥐었습니다. 헌법 개정을 통해, 전체 의석의 1/3 중에서 제1당이 2/3의석을 차지하는(유신때보다는 조금 완화된) 기괴한 방식으로 국회 다수를 장악하려 했습니다.
-1981년 총선은 YS, DJ, JP를 위시한 대중정치인들의 피선거권을 박탈했습니다. 그런 상태로 치른 선거에서, 국민들은 20년간 찍어오던 공화당 정권을 몰락시키는 정도의 역할을 했습니다.
-1985년 총선은 2.12.에 치르졌기에 동토의 선거라고 했습니다. 선거활동기간은 12일밖에 없었고, 역시 YS, DJ, JP는 피선거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선거에서 YS+DJ는 신한민주당이라는 정통야당 재건과 민주회복을 강력하게 내세웠습니다.
당시 관제야당(민한당)과도 경쟁했습니다.
이철 등은 '정치사형수'라는 포스터로 출마했습니다.
결과는? 우선 투표율이 기록적이었습니다.
무려 84.6%. 그리고 신한민주당이 67석, 민한당이 35석. 이렇게 되니, 민한당은 유지할 동력이 전혀 없어져 몰락, 통합되었습니다. 선명야당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확인한 다음, 85년부터 87년까지 민주헌법쟁취, 군사독재 타도의 중심축으로 밀고 가고 끝내 1987년 6월민주항쟁으로 군사정권의 퇴조를 이루어냅니다. 그러니, 전두환 몰락의 시발점은 2.12총선에서의 심판민의였습니다. (to be continued)
[투표율이 가장 높았던 국회의원 선거는?]
역대 투표율은 계속 하향하다가, 한번 엄청나게 뛰어오릅니다. 바로 1985년입니다. 무려 84.6%. 왜 이랬을까요?
-전두환은 재임중 국회의원 선거를 두번 치릅니다.
-1981년 총선 전에 전두환은 YS, DJ, JP를 위시한 대중정치인들의 피선거권을 박탈했습니다. 야당은 관제야당 1중대(민한당), 2중대(국민당)을 만들어, 총재부터 의원까지 공작했습니다. 전두환은 흐뭇했습니다.
-1985년 총선엔, 그동안 정치활동 금지했던 정치인들 중 일부를 해금했습니다. 단 YS, DJ는 여전히 정치금지로 묶었습니다. 전두환은, 야당을 관제1당(민한당)에다, 선거 한달 전 쯤에 일부인사가 민주야당 만드는 걸 놔뒀습니다. 야당인사들은 신민당을 연상시키는 "신한민주당"을 만들었습니다. 두 야당이 표를 나눠가지면, 전두환당이 다수를 차지한다는 어부지리, 이이제이 공작이었습니다.
-선기기간도 2주밖에 없었고, 게다가 2월 12일에 치르지기에, 동토의 선거라 했습니다. 그런데 2월이 되자, 거짓말처럼 날씨가 확 풀렸습니다. YS, DJ는 피선거권도 없었지만, YS+DJ는 신한민주당이라는 정통야당 재건과 민주회복을 강력하게 내세웠습니다.
당시 관제야당(민한당)과도 경쟁했습니다. 이철 등은 '정치사형수'라는 포스터로 출마했습니다.
-결과는? 우선 투표율이 기록적이었습니다. 무려 84.6%. 그리고 신한민주당이 67석, 민한당이 35석. 이렇게 되니, 민한당은 유지할 동력이 전혀 없어져 몰락, 통합되었습니다. 선명야당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확인한 다음, 85년부터 87년까지 민주헌법쟁취, 군사독재 타도의 중심축으로 밀고 가고 끝내 1987년 6월민주항쟁으로 군사정권의 퇴조를 이루어냅니다. 그러니, 전두환 몰락의 시발점은 2.12총선에서의 심판민의였습니다.
-1960년대 이후 지금까지 최대의 투표율 84.6%. 투표율이 높을수록 민심의 소재가 확연히 드러남을 1985년 선거처럼 잘 보여주는 경우도 달리 없습니다. 아래 역대 투표율을 보면서, 이것저것 생각해보면 흥미진진할 것입니다.
* 역사적 교훈, 중간정리하자면
1. 투표가 이깁니다. 투표하면 이깁니다.
2. 투표율이 높으면 민의가 이깁니다. 애매하면 각자 유리하게 해석하지만, 민의가 분명히 확인되었는데도 아니라고 고집하면 정권의 몰락을 초래합니다.
ㅡ 한인섭 교수(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샬롬^^ 재외국민 유권자들의 뜨거운 참여!!
"재외선거 5일차 투표율 56%" 뜨거운 열기‥역대 '최고치' - https://v.daum.net/v/20240402115816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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