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포럼

조선일보와 한국교회여!

ree610 2023. 5. 2. 07:44

  스케일링하러 동네 치과에 다녀왔다. 작년 말부터 뭉기적거리고 있었는데, 노동절 휴무를 맞은 아내가 멱살을 잡아 끌었다.

순서를 기다리느라 앉아 있던 쇼파 앞자리에 종이신문이 있었다. <조선일보>. 신기했다. 대학 시절(80년대)에 글쓰기 훈련할 때 한동안 그 신문의 사설을 베껴쓰곤 했다.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 회사를 모두 그 신문의 광고란에서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가서 합격했다. 두번째 회사를 그만 두고 잠깐 쉴 때 어느덧 30년지기가 된 친구들을 만난 것도 그 신문의 번역 아르바이트 광고란을 통해서였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그 신문을 보지 않게 되었다. 인터넷 신문이 등장하면서부터였다. 대표적인 것이 <오마이뉴스>와 <뉴스앤조이>였다. 그 두 언론은 종이신문들과는 결이 다른 뉴스를 쏟아냈고, 무엇보다도 언론사의 뉴스에 댓글을 달아 뉴스에 대해 시비를 걸 수 있게 했다. 언론의 일방통행에 스스로 제동을 건 셈이었다. 스마트폰의 등장과 보급은 언제 어디서든 클릭 몇 번으로 세상의 온갖 소식을 접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종이신문을 구독하거나 구매할 이유는 점차, 아니 전혀, 없게 되었다. 실제로 가판대에서 종이신문을 구매한 기억은 언제인지 모를 정도로 아득하다.

오늘 느닷없이 마주친 종이신문이 낯설고도 반가워서 잠깐 눈길을 주었다. 한데 그 눈길에 들어온 1면 톱 기사 제목이 확 거슬렸다. "외교의 성공..." 그나마 남아 있던 향수조차 무참하게 날아갔다. <조선일보>는 저 짓하다가 태극기 할배들과 함께 소멸할 것이다. 시대적 소명을 다한 일개 신문사의 소멸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 소멸에 우리 사회가 휘말리지 않을까 걱정이다.  

여기까지 끄적이다 보니, 다시 교회에 생각이 미친다. 우리 사회에 신문이 있었다면, 교회에는 설교가 있었다. 나는 설교가 교회를 위해 한 일을 부정하지 않는다. 설교가 없었다면, 오늘의 교회는 세워지지도 유지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설교의 시대는 끝났다. <조선일보>처럼 뒤틀린 설교만이 아니라, 설교라는 소통형태 자체의 시효가 끝났다는 말이다. 물론 앞으로도 설교는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신자들은 전처럼 목사 한 사람의 일방적인 가르침을 통해 배우지 않는다. 목사의 설교에 감격하며 "아멘"을 외치는 이들조차 그러하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말에 "아멘"하기보다는 자신의 기존의 신념을 강화해주는 말에 "아멘"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간혹 탁월한 설교자가 그런 시효를 잠시 연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탁월함이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인지는, 혹은 유익한 것인지는, 따져 보아야 한다.

15년 전 어느 상가집에서 교회 후배를 만났다. 당시 MBC 경제부에서 고참기자로 일하던 친구였다. 그가 말했다. "공중파 방송의 시대는 끝난 것 같아요."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지금은 알 것 같다. 방송 3사 외에도 다양한 플랫폼이 나타났고, 채널도 아주 많아졌고, 무엇보다도 유튜브가 기존의 TV 시청자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교회가 조선일보처럼 버티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게 버티다가는 조선일보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교회가 처한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인정 위에서 교회가 지닌 조선일보스러움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신학이 바뀌어야 한다. 자신들의 이념을  버리지 않고 모색하는 조선일보의 변화가 소용없듯이, 신학의 변화 없이 모색하는 교회의 변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상과 타협하자는 것이냐고? 그런 비판적인 질문, 오래전에 바울과 루터에게도 제시되었던 것 아닌가?

ㅡ  김광남 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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