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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의 만남’을 ‘필연의 만남’으로 가꾸는 이 >
1. 무채색이 될 수 있는 이 살아감에, 간혹 아름다운 색채를 느끼게 하는 일들이 있곤 한다. 물론 무엇이 ‘아름다운 색채’를 부여한다고 경험하는가는 사람마다 또는 정황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오늘 내가 느끼는 '아름다운 색채'는 스칠 수도 있는 만남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우연한 만남’을 유의미하게 만드는 열정을 지속적으로 작동시키는 사건의 경험이다. 무심히 지나갈 수 있는 것들을 부여잡고, 의미부여를 하고, 그 만남에 대한 열정, 끈기, 결단을 가지고 무채색으로 지나갈 수 있는 경험을 유채색의 독특하고 의미로운 ‘사건’으로 자리 잡게 하는 한 사건을 최근 경험하고 있다.
2. 내가 그를, 아니 그가 나를 만난 것은 2017년이다. 2017년 서울대 인권센터가 주관하는 모임에서 강연을 했다. 강연은 매우 큰 공간에서 열렸기에 나는 그 강연장에 온 사람들의 얼굴을 세세하게 보기 어려웠다. 그곳에서 그는 나를 처음으로 만났다고 한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이 아니라, 그가 나를 만났다고 하는 이유다. 그가 나를 처음 만났던 것을 전혀 몰랐던 나의 눈에 그가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한 계기가 있다. 한국에 올 때 여러 강연을 하곤 했는데, 연속강좌든 일회성 강연이든 다양한 강연장에서 그의 모습을 보기 시작했다.
3. 그는 맨 앞에 앉곤 했고, 강연에 관하여 또는 나의 책이나 칼럼 등을 읽고 나면 그것에 관한 포스팅을 블로그나 페북에 올리곤 했다. 작은 공간에서 열리는 강연장에서는 청중들의 얼굴 표정이나 듣는 태도 등을 통해서 몸이 보내는 다양한 메시지를 보게 된다. 그런데 그가 나의 강연을 듣는 모습은 온 존재로 듣는 듯한 진정한 경청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존재가 서서히 나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4. 코로나로 인해서 대면 만남이 제한되던 때인 2021년, 한국에 계신 분들의 요청에 의해서 나는 줌(ZOOM)으로 처음 강연을 하기 시작했다. 한번으로 끝날 것이라 생각했던 줌 강연을 연이어 하게 되었다. 그 때 그에게 행정업무를 도와줄 수 있겠는가 하고 메시지를 보냈다. 나의 메시지에 그는 기뻐하며 줌 모임을 돕겠다고 회신을 했다. 그렇게 해서 2021년에 시작된 <이론 그룹>에서부터 지금까지 그는 모든 행정업무를 맡아서 해오고 있다.
5. 독일에서 석사과정을 끝내고 미국에서 박사과정에 지원하는 과정에서 나는 추천서를 쓰게 되었다. 내가 직접 가르친 적이 없는 사람을 위해 추천서를 쓴 것은 처음이다. 그런데 나는 그가 나의 강연과 책, 그리고 칼럼 등과 연관되어 29개의 포스팅을 하였다는 것, 그리고 그가 몇 년 동안 강연장에서 또한 이론 그룹의 복잡한 행정업무들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경험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나누고 추천하는 추천서를 쓰기에 충분한 토대가 있다고 생각했다.
6. 나는 스칠 수 있는 ‘우연의 만남’을 서로에게 삶의 에너지를 주는 ‘필연의 만남’으로 만들어 아름답게 가꾼 J를 박사과정에 추천하는 편지에서 이렇게 그에 대한 소개의 문을 열었다:
“나는 이제까지 19개 나라에서 무수한 강연을 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이 고도의 복합적인 수준의 호기심, 질문들, 그리고 열정을 가진 ‘청중’은 결코 만나지 못했답니다. (Throughout my professional journey, I have given countless public lectures in 19 countries but have never met such a passionate ‘audience’ like Woomok with a highly sophisticated level of curiosity, questions, and passion.).”
7. 얼마전 기쁜 소식을 전해들었다. 지원한 미국 대학의 박사과정에서 참으로 좋은 조건의 장학금을 받고 공부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제 2023년 가을학기부터 자신이 공부하고 싶어했던 미국의 한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된다. 미국 대학에 지원하는 과정들, 담당교수와 인터뷰하는 소식들을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잘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코비드 이후 재정지원이 대폭 줄어들은 미국대학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염려가 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만족스러운 조건으로, 본인이 정말 가고 싶어했던 대학의 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되니, 마음이 참으로 훈훈해진다.
8. 미국 대학지원과정이 이제 마무리 지어진 후 J와의 만남을 되돌아보니, 나는 나의 삶의 여정에서 무관심과 소극성으로 놓쳐왔을 의미로울 수 있는 만남이 참으로 많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커다란 강연장에서 우연히 청중의 한 사람으로 만난 사람과 이렇게 각별한 만남의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그도 예상하거나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새로운 배움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 그리고 끈기와 따스함으로 스쳐 지나갈 수 있는 나와의 우연의 만남을, 이렇게 의미로운 만남으로 가꾸어 나간 것이다. 그와의 만남을 통해서 살아감에 대하여 이렇게 다시 배운다.
지금 내가·우리가 놓치는 소중한 것은 혹시 없는가. 우연을 필연으로 가꾸기 위한 열정을 나는·우리는 지속적으로 작동시키고, 결단하며 행동으로 전이 시키고 있는가.
ㅡ 강남순 교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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