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차(茶)와 예수

ree610 2023. 2. 2. 09:24

얼어붙은 날씨 속에 뜨겁게 우려 마시는 차의 묘미로 ‘열기와 온기’라는 성도 삶의 자세를 가다듬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받아 갖는 영적 열정이 사람 향해 따뜻한 친절로 배어날 덕목입니다.  

첫 새벽 서재에서 차를 우리면 차향이 방안에 가득 차고 마음으로도 스며들어 하루 생활의 조급함이 차분히 잦아드는 묘미가 있습니다. 썰렁한 날씨에도 한 잔 차의 온기가 몸부터 마음 까지 따뜻하게 합니다. 고립된 시간에 찻잔을 마주 놓고 앉는 사람이라면 누구랑이라도 따순 사이를 만들어 갖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 생각을 나눌 때는 서둘러 마시고 돌아서는 커피 대신 시간조차 녹여 내는 차를 마십니다. 

차를 마시는 또 다른 덕목도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입안에 머금다가 차 한 모금으로 씻어 삼키고 맙니다. 뱉지 않은 말은 재산으로 남습니다. 생각보다 많이 뱉어지는 언어로 오염된 입안을 씻는 청정제로도 용도가 좋습니다. 홀로 차를 우려 마시는 기쁨은 들키지 않고 누리는 나만의 호사입니다. 

내가 30년 넘게 즐겨 마시는 차는 지리산 아래 산청군 시천면이 원산지인 황차(黃茶)입니다. 지리산 골짜기에 야생하는 찻잎을 이른 봄에 따서 살짝 발효를 시켜 제조한 차입니다. 원래는 상품으로 만들 목적이 아니라 그저 지인들끼리 나눠 마시기 위해 만들던 차랍니다. 우연한 기회에 이 대열에 끼어들어 봄에 창호지에 둘둘둘 말아 가져오면 약간의 비용만으로 마시곤 했었지요. 점차 인기를 얻어 결국은 제대로 된 상품으로 개발되었습니다. 가격이 좀 비싸졌지만 그래도 오래된 입맛을 바꾸지 못해 그냥 사다 마십니다. 

십수 년을 그러다 재작년부터 15분 거리, 가까운 데 있는 녹차 밭에서 차를 딸 수 있습니다. 20년 전에 조성한 차밭인데 누가 관심하지 않는 통에 내 차지가 된 겁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편애입니다. 입 다물고 눈과 손끝 만으로 여린 찻잎을 따는 건 노동이기도 하지만 수행입니다. 역시 말 뱉을 새 없으니까요. 몇 주간 월요일을 털어 한 해 먹을 찻잎을 따다 녹차로 덖기도 하고 황차로 발효도 시키면 한 해 마실 거리가 마련됩니다. 전문가가 아니니 별 솜씨 아니지만 그래도 내 손으로 덖어 마시는 차는 훨씬 감미롭습니다. 마지막 덖을 때 살짝 태우면 고소한 맛이 더해진다는 경험적인 득도 얻었지요. 

차가 주는 유익함과 미각, 후각에 감미로움을 경험한 사람들은 다 좋아하기 마련입니다. 더러 제 방에서 차를 내려 대접하면 열에 아홉은 그 향기에 호감을 표합니다. 그런 유익에 비하면 차는 이 시대에 잘 맞지 않는 음료입니다. 20년 동안 차밭이 방치될 만큼요. 옛날 음료이다 보니 제대로 마시는 절차를 아무리 간소화한다 해도 번거롭습니다. 좀 궁상맞구요. 게다가 현대인들은 시간을 깔아놓고 차 우려 마실만큼 몸도 마음도 한가하지 못하거든요. 여운 없이 미각, 후각을 직격하는 커피가 시대의 음료입니다. 저도 그 커피를 제법 즐겨 마시는 바이구요. 

혼자 오래 차를 마셨습니다. 새벽 미명에 혼자 마시는 차는 쾌적하고 감미롭습니다. 커피와는 사뭇 다른 품격이지요. 이 좋은 차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는 게 아쉽습니다. 

산청군 시천면에 다원을 열고 야생차를 따다 황차로 발효시키는 황덕봉씨가 만드는 차가 참 좋습니다. “이 좋은 차를 다인(茶人)이라카는 사람들이 다 망쳐 삔기라요” 그의 걸쭉한 논지에 따르면 차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차 문화를 망쳤답니다. 스스로 전문가입네 하여 옷 떨쳐 입고 제자들 거느리고 거들먹거리며 찻값, 다구(茶具)값만 올려 놓았답니다. 단순히 뜨거운 물 부어 마시면 되는 차를 구태여 다도(茶道)라는 복잡한 과정으로 엮어 놓는 바람에 번거로운 거 싫은 현대인들이 자연 차를 멀리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딴은 그렇기도 하여 쉽게 마실 수 있는 음료에 갖가지 허장성세를 덧입혀 난감 무지로 만들어 놓은 탓이 큽니다. 차는 쉬운 음료입니다. 그냥 뜨거운 물 붓고, 사발이나 대접이나 머그잔 등에 줄줄 부어 훌훌 마시면 됩니다. 격식 갖추느라 궁상스럽게 두 손으로 받쳐 들고 황공한 듯 마시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 전문가인 목사로 한 평생 삽니다. 예수님은 우리 일상 음료인 차처럼 편안하고, 다정하고, 친근하고, 매우 일상적인 분이십니다. 게다가 인생에 유익은 골고루 갖추신 분이시지요. 

그 예수님을 예수 전문가로 자칭하는 무리가 종교에 가두고, 예전으로 째 내고, 신학으로 양념해서 호불호 강한 기호식품으로 전락시킨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 만나는 데 형식이나 조건을 곁들여 놓았거든 모두 걷어 내셔도 괜찮습니다. 허물 없이 이물 없이 만나기 원하시는 예수님이시거든요. 

이 목사님은 우리 교단의 영적 지도자이십니다. 잠시 다녀가셨지요. 기도를 가르치는 책에서 ‘외로우니 올라가서 외롭다고 말씀드려야겠다’ 라는 글귀를 읽었습니다. 진짜 예수님을 제대로 누리는 언사입니다. 예수님은 친구처럼 우리 가까이 격식 없이 늘 계시거든요. 새해라고 호들갑 떨 것도 없이 작년에 하던 대로 수더분하신 예수님과 수더분하게 살아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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