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포럼

나의 동양고전 독법

ree610 2004. 12. 22. 07:52
"모든 존재는 사람 사이의 관계망으로 존재한다"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돌베개


[유석재 기자]
육사 경제학과 교관으로 있던 그가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것은 1968년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꼭 20년2개월 동안 그는 감옥 안에 갇혀 있었다. 당시 교도소에선 책을 세 권 이상 가지고 있을 수 없었고, 한 권을 가지고도 오래 읽을 수 있는 책은 동양고전만한 것이 없었다. 유년시절 조부로부터 한문을 배웠던 기억을 되살리며, 그는 차제에 ‘우리 것을 다시 공부해 나 자신의 정신적 영역을 간추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가 자신의 교양과목 ‘고전 강독’의 내용을 정리한 이 책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경전에 대한 훈고학적 탐구나 주해(註解)는 여기서 그가 천착하는 방향이 아니다. 문제는 “고전으로부터 바로 지금 우리의 과제를 재조명하는” 것. ‘시경’ ‘서경’ ‘주역’의 삼경(三經)도, ‘논어’ ‘맹자’ 등의 사서(四書)도, ‘묵자’ ‘순자’ 등의 제자백가도 모두 “그러한 논의를 이끌어내는 마중물의 의미”를 넘지 않는다.

그는 이 강독 과정의 화두를 한 단어로 분명히 드러낸다. 그것은 ‘관계론(關係論)’이다. 서구 근대사의 원리가 ‘개별적인 존재’라는 기본 단위를 상정하고 자본주의적 질서를 만들어낸 ‘존재론’임에 비해 동양고전에선 “세계의 모든 존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망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선 ‘자본론’과 ‘논어’가 “사회 관계를 중심에 놓고 있다는 점에서 동질적인 책”이 된다. 이 관계론은 ‘주역’에서부터 드러나는데, 하나의 사물인 효(爻)는 그 자체로는 가치판단을 할 수 없으며 그것이 자리잡고 있는 위(位)와 다른 효와의 관계인 응(應)에 따라 길흉화복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논어’는 이런 관계론의 보고(寶庫)와도 같다. ‘덕불고 필유린(德不孤必有隣·덕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은 공자의 말에서 그는 “덕(德)이란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에 무게를 두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나아가 운동론에서도 민중과의 접촉 국면을 확대하고 그 과정을 민주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이 ‘덕불고 필유린’의 원리라는 것이다. “인간관계로서의 덕이 사업 수행에 뛰어난 방법론으로서 검증됐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이며 가치이기 때문에 귀중한 것”이다.



군자의 덕목인 ‘화이부동(和而不同)’에서 ‘동(同)’은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지배·흡수의 논리로, ‘화(和)’는 타자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의미로 해석된다. ‘동’의 논리는 바로 전 지구적 자본주의와 세계화를 의미하는 반면 ‘화’는 세계가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구도가 된다. 이런 ‘관계론’은 현실도피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도가(道家) 사상에서도 나타난다. 장자(莊子)가 나비의 꿈을 꾼 우화는 ‘모든 사물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된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을 나타낸다는 설명이다.

인간과 역사에 대한 사랑을 깊이 깔고 있는 그의 글은 준엄한 동시에 따뜻한 ‘체온’을 지니고 있다. 그 체온은 자신의 이론과 사상이 세상을 걸어가는 ‘실천’에 고스란히 녹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실천’을 밝히려는 부분이 때론 약간의 고집스러움을 드러내기도 한다. ‘논어’의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배우고 때때로 익힌다)’에서 ‘습(習)’을 실천이라는 의미로 읽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다)’의 ‘사(思)’까지도 실천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무래도 당혹스럽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 사이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무시하고 새로이 등장한 지식인 계층인 사(士)를 피지배계급으로 설정, 유가(儒家)를 ‘제3의 계급 사상’으로 본 부분은 지나친 도식화라는 이론의 여지를 남긴다.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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