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정과/설교 자료

주일(10월 13일) 설교 자료 참고:『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ree610 2024. 10. 8. 12:13

주일(10월 13일, 창조절 7주) 설교 자료

참고:『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필자 : 조헌정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였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9월 첫 주부터 적용한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부활은 깨어진 세계를 지금껏 해석하고 움직여 온 거짓 이론과 폭력적 권위에 대한 ‘하느님의 반역’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존재이기에, “부활은 우리 모두를 반역자로 만든다”. 부활과 함께 새로이 창조된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고통당하는 자에게 값싼 위로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빈 무덤이라는 부조리를 증언함으로써 현실의 부조리를 부숴내는 것이다.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 지구민주주의는 생태학적 관점에서 인간은 지구 가족의 한 일원으로서, 우리가 (다른 생물들의 먹이가 되는) 동물이라는 것을 자각하도록 한다. (반다나 시비)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주일 본문]
  욥 23:1-9, 16-17; 시 22:1-15; 히 4:12-16; 막 10:17-31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욥기 23:1-9, 16-17}

1 욥이 대답하였다.
2 오늘도 이렇게 처절하게 탄식할 수밖에 없다니! 내가 받는 이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그분이 무거운 손으로 여전히 나를 억누르시는구나!
3 아, 그분이 계신 곳을 알 수만 있다면, 그분의 보좌까지 내가 이를 수만 있다면,
4 그분 앞에서 내 사정을 아뢰련만, 내가 정당함을 입이 닳도록 변론하련만.
5 그러면 그분은 무슨 말로 내게 대답하실까? 내게 어떻게 대답하실까?
6 하나님이 힘으로 나를 억누르실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씀을 드릴 때에,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실 것이다.
7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 하나님께 떳떳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을 다 들으시고 나서는, 단호하게 무죄를 선언하실 것이다.
8 그러나 동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은 거기에 안 계시고, 서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을 뵐 수가 없구나.
9 북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고, 남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구나.
16 하나님이 내 용기를 꺾으셨기 때문이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떨게 하셨기 때문이지,
17 내가 무서워 떤 것은 어둠 때문도 아니고, 흑암이 나를 덮은 탓도 아니다.

[신학적 관점]

의인 욥이 당하는 고통은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가 아닌 하늘 궁정의 테스트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개인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집단사회구조로 인한 고통이다. 전쟁, 코로나 혹은 경제불황으로 인한 정리 해고와 같은 경우와 같다. 욥기는 고통을 견뎌내는 하느님 절대 신앙을 강조하고 있지만, 욥의 무고한 억울함을 집단사회구조로 인한 결과로 전환하는 신학적 사고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은 경우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게 된다.

[목회적 관점]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이 저성장 혹은 교인 감소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는 저출산과 탈종교화하는 사회 변화의 어쩔 수 없는 결과이다. 물론 그중 성장하는 교회가 있지만, 이는 교인 수평 이동에 따른 결과이다. 교인 감소는 목회자나 교인들의 ‘욥과 같은 하느님을 찾는’ 기도나 전도 열성의 부족 때문이 아니다. 7, 80년대 세계 개신교회의 성장 모델이기도 했던 ‘긍정적 사고’(positive thinking)의 주창자 로버트 슐러 목사의 LA 수정교회(Crystal Church)는 오래전 파산선고를 하고 히스패닉 성당으로 전환이 되었다.

[주석적 관점]

17절은 번역상 어려움이 있다. 시작하는 부정 부사 lo’(아님)를 조건 부사 lu(만약)로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Feasting 151) 부정 부사를 택한 표준새번역은 무엇 때문에 떤 것인지, 17절의 뜻이 명확하지 않다. 공동번역은 이 부사를 ‘차라리’로 번역하였는데, 이 또한 명확하지 않다. “하느님 앞에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전능하신 분 앞에서는 간담이 서늘해지는구나. 차라리 온통 어둠에 싸여, 나의 얼굴이여, 흑암 속에 묻혀라.” 우리말 번역은 1절로 15절까지의 신의 부재를 지적하는 욥의 저항하는 모습이 전혀 드러나 있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마지막에 이르러 자포자기하고 만다. 반면 영어성서 NIV는 “내 비록 짙은 어둠이 내 얼굴을 덮을지라도 나는 어둠 때문에 침묵하지 않으리라.”(Yet I am not silenced by the darkness, by the thick darkness that covers my face.) 그리고 CEV는 “하느님이 나를 어둠으로 덮을지라도, 나는 침묵을 거부하리라.” (God has covered me with darkness, but I refuse to be silent.)로 번역하여 23장 전체 맥락의 뜻을 유지하고 있다.

[설교적 관점]

교인들은 누구나 어려웠던 고난의 순간들을 기억하고 있다. 잠들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하느님께 눈물로 기도했지만, 아무런 답변이 없었던 침묵하는 하느님에 대한 기억들이 있다. 나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겼는데, 삶의 고통스런 결과(특히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경우)만 주어질 때, 우리는 모두 절망하게 되고 하느님을 향해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하는 절규를 외친다. 그러나 이는 허공을 치는 메아리로 사라지고 만다. 신앙에 대해 깊은 회의 속에 잠긴다. 물론 욥기 말미에서 하느님은 이에 대해 답변을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욥이 침묵하는 하느님께 항의하는 그 심정을 전하는 것으로 그치자. 그냥 욥만을 편들자. 섣부른 답을 피하도록 하자. 홀로코스트의 유대인들의 고통, 오늘날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들의 고통만을 얘기하자. 앞으로 이 주간 더 욥의 본문을 다루게 된다.

{시편 22:1-15}

1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살려 달라 울부짖는 소리 들리지도 않사옵니까?
2 나의 하느님, 온종일 불러 봐도 대답 하나 없으시고, 밤새도록 외쳐도 모르는 체하십니까?
3 그러나 당신은 옥좌에 앉으신 거룩하신 분, 이스라엘이 찬양하는 분,
4 우리 선조들은 당신을 믿었고 믿었기에 그들은 구하심을 받았읍니다.
5 당신께 부르짖어 죽음을 면하고 당신을 믿고서 실망하지 않았읍니다.
6 나는 사람도 아닌 구더기, 세상에서 천더기, 사람들의 조롱거리,
7 사람마다 나를 보고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빈정댑니다.
8 "야훼를 믿었으니 구해 주겠지. 마음에 들었으니, 건져 주시겠지."
9 당신은 나를 모태에서 나게 하시고, 어머니 젖가슴에 안겨 주신 분,
10 날 때부터 이 몸은 당신께 맡겨진 몸, 당신은 모태에서부터 나의 하느님이시오니
11 멀리하지 마옵소서. 어려움이 닥쳤는데 도와 줄 자 없사옵니다.
12 황소들이 떼지어 에워쌌습니다. 바산의 들소들이 에워쌌습니다.
13 으르렁대며 찢어발기는 사자들처럼 입을 벌리고 달려듭니다.
14 물이 잦아들듯 맥이 빠지고 뼈 마디마디 어그러지고, 가슴 속 염통도 촛물처럼 녹았습니다.
15 깨진 옹기조각처럼 목이 타오르고 혀는 입천장에 달라붙었습니다.

{히브리서 4:12-16}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양날 칼보다도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 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냅니다.
13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14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늘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킵시다.
15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범하지 않으셨습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래서 우리는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신학적 관점]

하느님 말씀의 위대한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은 인간의 언어(레마) 곧 기록된 글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로고스)은 요한복음에서와 같이 태초부터 하느님과 함께 한 신적 존재성을 상정(想定)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와 장소에 제한되는 인간의 언어로 신적 절대 능력을 다 담아낸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성서에 기록된 글자는 엄밀히 말하면 언어의 틀에 갇힌 불완전한 말씀이다. 13절 또한 ‘말씀’ 앞에서의 인간 존재 와해(瓦解)를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대리인 곧 대제사장으로 내세운다.

[목회적 관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이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서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증거하고 있지만, 이는 저자에 따라 제각기 다르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 거울에 비친 예수 그리스도의 희미한 모습을 볼 따름이다. 이를 참이라고 주장하는 순간 우리는 다른 교회를 부정하는 목회 딜레마에 빠지고 만다. 이는 마치 자신을 재림주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이는 요한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느님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하고 절대성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자기 정체성에 관해서는 ‘나는...이다 혹은 나는 ... 나다(에고 에이미)’와 ‘표징’(세메이온)으로 대체하는 이유이다.

[주석적 관점]

12, 13절 특히 “사람 속을 꿰뚫어 ...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냅니다.”는 말씀은 하느님 말씀에 관한 인간 이해 능력의 부족함을 지적하는 곧 자아 성찰을 의미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성서 문자에 갇혀 이를 다른 사람을 향한 비판의 틀로 잘못 이용하고 있다.

루터, 깔뱅 등의 개혁자들이 주창한 ‘성서만으로(sola scriptura)’로 또한 당시 교황의 말을 절대화한 중세 가톨릭을 비판하기 위한 시대적 언어였다. 그런데 오늘날의 많은 개신교회는 이 구호에 갇혀 성서 문자 절대화 곧 자기 이해 절대화라는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설교적 관점]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라는 말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차이를 불러일으키는 문자에 매이지 말고(1:1) 살아 있는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되어 로마제국의 핍박을 이겨나가자는 격려의 말씀이다(1:2). 그런데 제사에는 제물이 필요하다. 히브리서 저자는 인류 구원을 위해 대제사장이 스스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렸다고 선포한다. 이는 고난을 이기는 본(本)으로서의 희생이었지, 대체(代替)로서의 희생이 아니었다. 복음서 저자들은 ‘자기 십자가’를 매고 예수를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고, 바울은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드리는 ‘산 제사’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정치적 핍박 앞에서 피안의 세계로 쉽게 도피하는 값싼 은혜를 말하지 않는다. 삶으로 ‘고백하는 신앙(14절)’을 말하고 있다.

{마가복음 10:17-31}

17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께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1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
19 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속여서 빼앗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하지 않았느냐?"
20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21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 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23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
24 제자들은 그의 말씀에 놀랐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하시니,
26 제자들은 더욱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 예수께서 그들을 눈여겨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
28 베드로가 예수께 말씀드렸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라왔습니다."
29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30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생을 받을 것이다.
31 그러나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신학적 관점]

제자도에 관한 영생과 재물에 관한 구원 논의가 재물을 넘어 생존의 근거가 되는 집과 논밭과 가족까지도 포기하는 철저함으로 확대된다. 이는 정치적 박해 앞에서의 죽음이라는 양자택일의 절박한 상황을 전제하고 있다.

31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본문의 신학 방향은 완전히 달라진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일이 하늘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인가? 아니면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인가? 예수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이라는 이원론을 말하고 있지만, 첫째와 꼴찌가 존재한다면 이는 이미 하늘나라가 아니다. 예수는 주기도에서 ‘당신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옵시며’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종말론적인 의미 안에서, 땅의 일로 여기는 것이 마땅하다.

[목회적 관점]

깨끗한 부자(淸富)라는 말이 한때 유행했던 적이 있다. 유산이든 기업 운영이든 주식이든 정당한 방법으로 부자가 된 사람을 말한다. 로또 당첨이나 적법한 도박은 제외하자. 그런데 재화는 한정되어 있다. 누군가가 많이 갖는다면 누군가는 적게 갖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깨끗한 부자라는 말은 성립이 되는 것인지 의심이 든다. 예수께 나아온 사람이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는 대답과 근심하며 떠나갔다는 말은 그가 정당한 방법으로 부자가 된 사람임을 말한다.

[주석적 관점]
마태는 ‘젊은이’로, 누가는 ‘관원’이라고 말한다.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은 전쟁 혹은 정당방위의 경우에도 적용되는가? 예수는 음욕 또한 간음과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살해하는 마음을 품는 것만으로도 살인에 해당하는 것은 아닌가? ‘도둑질’과 ‘속임수’를 같은 방식으로 적용하면 어떤 해석이 되는가?

희랍어 유사함에 근거하여 낙타(kamelos)를 배의 밧줄(kamilos)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음 해석이 더 적절하다. 역사적 자료로 증명이 되지는 않지만, 오래전 필자가 예루살렘 여행 가이드에게서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예전 예루살렘 성문중에는 안식일이 시작한 후 모든 문이 닫히고 나서, 부득이한 경우에 드나들어야 했던 작은 문이 있었다. 이때 낙타상들의 경우 낙타 등에 있는 짐을 다 내리고 낙타는 무릎으로 기어서 들어가야 했다. 이문을 ‘낙타 바늘귀 문’이라 불렀다고 한다. 결국 부자라 하더라도 삭개오와 같이 가진 부를 다 내려놓으면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설교적 관점]

왜 누가는 부자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는 저주를 퍼붓는가? 돈이 많은 것이 죄인가? 돈에 눈이 팔려 하느님의 생각을 읽지 못하고 가난한 이웃을 보지 못하는 것이 죄이다. 구원에 관해 얘기하자면, 재산이 많든지 적든지 그 마음이 재물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이미 영생에서는 멀어진 부자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군가 돈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는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정도의 차이에 있다.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전쟁 상황에서 재물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렇다고 재산을 전부 남에게 주고 자신은 남에게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 노숙자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또한 어리석은 사람이다. 어느 정도의 재물이 적당한 것인가? 처지와 상황에 따라 그 크기는 달라질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이 사람에게 재물을 적당히 나눠주라고 얘기하지 않았다. 전부를 내어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 세상에는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반면 물건 구매할 때, 브랜드를 따지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애완동물을 위한 값비싼 비용 지출을 비난하기도 한다. 당신의 지출 항목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한다고 한다. 헌금에는 인색한 반면 친구들의 밥값 지불에는 후한 사람도 있다. 나의 월별 수입과 지출 항목이 친구들에게 공개된다면 나는 어떤 사람으로 인식될까?

어떤 여인은 값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을 씻기는 일로 사용했다. 그러자 재정부장이었던 가룟 유다는 이를 팔아 구제헌금으로 써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오늘날 어떤 일로 비유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부자를 개인이 아닌 국가로 이해할 수는 없을까? 오늘날 유럽과 미국의 부한 백인국가들은 과거 모두 아시아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을 식민지로 지배하고 흑인들을 노예로 삼아 통치하면서 부를 도둑질하였던 국가들이다. 세계의 전체 재화는 한정되어 있는가? 아니면 개발할수록 더 늘어나는 것인가? 오늘날 자주 발생하는 이상기후는 이 질문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ㅎㆍㄴ’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