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정과/설교 자료

7월 28일(오순절 후 10째) 주일 설교 자료

ree610 2024. 7. 23. 12:44

주일 설교 자료(7월 28일, 성령강림 후 10주)  

글쓴이 : 조헌정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였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겸하였다. 그러나 교단별로 창조절 적용 구간이 다르기에 성령강림절 기간을 12주로 정하고 그 이후부터 창조절로 부른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부활은 깨어진 세계를 지금껏 해석하고 움직여 온 거짓 이론과 폭력적 권위에 대한 ‘하느님의 반역’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존재이기에, “부활은 우리 모두를 반역자로 만든다”. 부활과 함께 새로이 창조된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고통당하는 자에게 값싼 위로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빈 무덤이라는 부조리를 증언함으로써 현실의 부조리를 부숴내는 것이다.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주일 본문]
  왕하 4:42-44; 시 145:10-18; 엡 3:14-21; 요 6:1-21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열왕기하 4:42-44}

42 어떤 사람이 바알살리사에서 왔다. 그런데 첫 열매로 만든 보리빵 스무 덩이와, 자루에 가득 담은 햇곡식을,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지고 왔다. 엘리사가 그것을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라고 하였더니,
43 그의 시종은, 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그것을 어떻게 내놓겠느냐고 하였다. 그러나 엘리사가 말하였다.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여라.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하셨다."
44 그리하여 그것을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으니, 주의 말씀처럼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

[신학적 관점]

급식 기적 이야기의 핵심은 음식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루 세 끼를 먹어야 하는 존재이기에 한 끼를 아무리 배불리 먹는다 해도 다음 날은 배가 고플 수밖에 없다. 한 끼 해결한 것을 기적이라고 부를 수가 있을까? 급식은 손가락이고 달을 보아야 한다.

예물을 가져온 농부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지방 이름만 나온다는 것은 그 이름이 암시하고 있는 바가 크다는 말이다. 바알살리사는 북왕국의 성소가 있던 세겜에서 서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마을로서 탈무드에 의하면 따뜻한 기후로 인해 북왕국 지역에서 가장 먼저 곡물이 열리는 지역이다. 본래 이름은 살리사(삼상 9:4)이다. 당시의 토착신인 바알이라는 단어가 붙어 바알살리사가 되었다. 그러니까 이 이름의 뜻은 북왕국에서 나오는 모든 곡물들은 바알 신의 힘에 열렸다는 것을 고백하는 종교적인 명칭이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뒤를 이은 예언자이고 엘리야는 비와 곡물의 신으로 알려진 토착신 바알과 목숨을 건 싸움을 갈멜산에서 행한 사람이다. 바알선지자들은 당시의 권력자인 아합왕과 이세벨왕후의 후원을 받았다. 당시 저들은 정치적 실세였으며 동시에 부자들과 권세가들은 모두 바알 숭배자였다. 따라서 바알살리사라는 마을에 사는 한 농부가 그 첫 열매를 엘리사에게 가져왔다는 것은 비와 곡물을 주장하는 신은 바알이 아닌 YHWH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을 공개적으로 한 것이고 이는 당시 사회의 주류 지배계층과 어긋나는 저항의 행동이었다.

[목회적 관점]

첫 곡식을 하느님께 드리는 목적은 그 이후의 곡식 또한 모두 하느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고, 이는 곧 이웃과의 나눔을 통해 증명이 된다.

[주석적 관점]

엘리야와 평행이 되는 이야기이다(비교. 왕상 17:8-24).

[설교적 관점]

곡식을 가져온 사람의 이름은 없고 바알신을 상징하는 마을의 한 사람이 엘리사에게 곡식을 가져왔다는 것은 단순한 예물 바침이 아니라, 당시의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바알을 넘어서는 저항의 행위이자 이 모든 것이 YHWH에게 있음을 고백하는 신앙 행위이다. 그리고 이를 백 명의 사람들이 함께 먹고 나누었다는 말은 단지 빵이라는 물질을 나누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의 신앙고백을 나누었다는 말이고 다 먹고도 남았다는 말은 이들의 신앙고백이 여기서만 그치고 만 것이 아니라 다른 지방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파되었다는 말이다. 마치 엘리야 선지자에게 7천 명의 YHWH를 따르는 숨은 사람들이 있었듯이 엘리사에게도 백 명의 YHWH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얘기이다. 곧 이는 단순한 급식 기적 이야기가 아니라 민중 저항의 이야기로 YHWH를 향한 찬양과 신앙고백이다.

{시편 145:10-18}

10 야훼여, 당신의 온갖 피조물들이 감사 노래 부르고 신도들이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11 그들이 당신 나라의 영광을 들어 말하고 당신의 공적을 이야기하게 하소서.
12 그리하여 당신의 공적을 사람에게 알리고 당신 나라의 그 찬란한 영광을 알리게 하소서.
13 당신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 당신만이 만세에 왕이십니다. 야훼의 말씀은 언제나 진실되고, 그 하시는 일 모두 사랑의 업적이다.
14 누구나 쓰러지면 붙들어 주시고 거꾸러지면 일으켜 주신다.
15 모든 눈들이 당신만 쳐다보고 기다립니다. 철을 따라 양식을 주실 분 당신밖에 없사옵니다.
16 당신께서 손만 벌리시면 살아 있는 모든 것 원대로 배부릅니다.
17 야훼 가시는 길은 언제나 바르시고, 그 하시는 일 모두 사랑의 업적이다.
18 야훼는, 당신을 부르는 자에게, 진정으로 부르는 자에게 가까이 가시고

{에베소서 3:14-21}

14 그러므로 나는 무릎을 꿇고 아버지께 빕니다.
15 아버지는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분이십니다.
16 그분의 풍성한 영광으로, 그분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주시고,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속에 머물러 계시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18 모든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을 수 있게 되고,
19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여러분이 충만해지기를 바랍니다.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을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신학적 관점]

본문은 에베소서 전반부(1:1-3:13)와 후반부(4:1-6:20)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하는 기도로서 성도의 충만함을 바라고 있다. 전반부에서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일, 곧 차별과 분리의 벽을 허무시고 하나의 새사람으로 만드신 일을 강조하고 있고, 후반부에서는 이에 응답하는 성도로서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

[목회적 관점]

본문은 목회자가 하루를 여는 기도문이다.

[주석적 관점]

15절의 ‘족속’으로 번역된 헬라어 patria는 제2성서에서는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데, 이는 ‘가족’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한 아버지가 여러 자녀들의 이름을 짓는 이치를 말하고 있다.

[설교적 관점]

기도문은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기를 빕니다”(21절)로 끝난다.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있어 하나임을 말하고 있다. 다음 장에서 저자는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심을 강조한다(4:15).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교인(church member)과 신도(believer)를 넘어 성도(saint, 18절)가 됨에 있다. 성도의 특징은 지식을 넘어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자이다.

{요한복음 6:1-21}

1 그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니,
2 큰 무리가 예수를 따랐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가 병자들을 고치신 표적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서, 제자들과 함께 앉으셨다.
4 마침 유대 사람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다.
5 예수께서 눈을 들어서,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모여드는 것을 보시고 "우리가 어디에서 빵을 사다가,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고 빌립에게 말씀하셨다.
6 예수께서는 빌립을 시험해 보시고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하실 일을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7 빌립이 예수께 대답하였다. "이 사람들에게 모두 조금씩이라도 먹게 하려면, 빵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가지고서도 충분하지 못합니다."
8 제자 가운데 하나이며 시몬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가, 예수께 말하였다.
9 "여기 한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예수께서 "사람들을 앉혀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곳에는 잔디가 많았다. 사람들이 앉았는데,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앉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리고 물고기도 그와 같이 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뒤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남은 부스러기를 다 모으고, 조금도 버리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보리빵 다섯 개에서,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신 표적을 보고 "이분은 참으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억지로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16 날이 저물었을 때에, 예수의 제자들은 바다로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갔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께서는 아직, 그들이 있는 곳으로 오시지 않았다.
18 그런데 큰바람이 불고, 물결이 사나워졌다.
19 제자들이 배를 저어서, 십여 리쯤 갔을 때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배로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무서워하였다.
20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시니,
21 그들은 기뻐서 예수를 배 안으로 모셔 들였다.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다.

[신학적 관점]

요한복음의 특징 중 하나는 공관복음서에서는 기적(dynamis)이라고 부르는 사건을 표적(semeion. 2절)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저자는 자신보다 앞선 예수공동체들이 예수를 병을 치유하는 한 명의 기적 행하는 사람으로 오해하고 있음을 보고 이를 비판하고 있다. 곧 예수를 설명하는 기적 이야기들은 모두 하나의 손가락에 불과하니 달을 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모두 7개의 표적과 7개의 에고 에이미가 등장한다.

급식 기적 이야기는 히브리인들의 광야 40년의 만나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만나 이야기의 핵심 또한 공짜로 배부르게 먹었다는 것은 손가락에 불과한 것이고, 달은 많이 거둔 자나 적게 거둔 자나 집에 와서 보니 ‘모두가 같았다’는 말이다. 이는 각자의 필요를 나눔을 통해 채웠다는 얘기이다. 나아가 다음 날 아침에는 어제의 만나가 썩었다는 얘기는 재산 축적(蓄積)에 대한 경고이며 이는 주기도의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과 그 뜻이 맞닿아 있다.

물 위를 걸으셨다는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이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악티움해전에서 물리치고 나서 Pax Romana를 외쳤다. 당시 사람들은 높은 파도를 불러일으키는 바다를 두려워했으며, 구세주라 불리는 로마 황제는 바다를 지배한다고 믿었다. 여기에 본문은 갈릴리의 예수(Pax Christi)를 대신 내세운다. 배는 요한공동체를 뜻한다. 곧 로마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있다.

[목회적 관점]

당회는 일을 계획할 때, 방법을 강구하고 이에 필요한 예산을 세운다. 그런데 많은 경우 예산 부족으로 일을 포기한다. “우리가 어디에서 빵을 사다가,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라는 질문 앞에서 유구무언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을 목회를 통해 간혹 경험한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누군가(‘한 아이’)의 자발적인 헌신이 회중을 감동시킴으로 전세는 역전이 된다.

[주석적 관점]

요한복음이 전하는 7개의 에고 에이미 중의 하나는 아니지만, 20절에서 ‘나다!’ 곧 ‘에고 에이미’가 나온다. 에고 에이미는 히브리어로 옮기면 “YHWH”가 되며 그 뜻은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

21절의 ‘모셔 들였다’의 헬라어 lambanein은 요한복음 안에서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믿었다’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1:12-13; 3:27-36; 5:43; 7:39; 12:48; 13:20 등등)

[설교적 관점]

요한복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달은 무엇인가? 우선 이야기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시기와 장소에 관심할 필요가 있다. 우선 그때는 유월절의 절기였다. 유월절은 애굽제국에서의 히브리 노예들이 모세의 영도 아래 홍해를 건너 해방을 받은 날을 기억하는 유대인들의 가장 큰 축제 절기였다. 이때에는 모두가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서 예물을 드리고 나서 일주일 동안 함께 먹고 마시는 대축제가 열렸다. 이 축제 기간 거기 모인 사람은 누구나 배부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갈릴리에 있는 예수님 주위에는 아예 이 축제에 참여할 생각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수많은 떠돌이 막장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이야기의 바닥에는 삶의 자리를 박탈당한 민중들의 저항의 기운이 바다의 물결처럼 요동치고 있다.

둘째, 공관복음서는 모두 장소를 ‘외딴곳’이라고만 말하지, 요한복음 마냥 특정 지역을 말하지 않는다. 또 그냥 통상적인 표현인 ‘갈릴리 바다’라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굳이 ‘디베랴 바다’라고 특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의 로마 황제는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였으며 예수께서 활동하던 시대의 로마 황제의 이름은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은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Tiberius Julius Caesar Augustus)였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은 ‘신의 아들’이라는 칭호임을 생각하면 요한이 굳이 이를 언급한 그 이유는 분명해진다. 곧 디베랴는 로마 황제를 기념하여 헌정한 도시이자 세상 절대 권력의 상징이었다. 디베랴의 중심에 있는 로마 신전에서 황제 숭배가 끝나면 함께 먹고 마시는 축제가 있었다. 물론 갈릴리의 바닥 민중들은 여기에 합류할 자격이 없었다. 이에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과 로마신전을 대신하여 민중들을 배부르게 할뿐더러 남은 열두 광주리를 통해 새 이스라엘을 배부르게 하는 신의 아들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를 빵공장 사장으로 오해하고 만다. 이에 예수는 자리를 피하고 만다.

곧 본문은 예수께서 추구한 하느님의 나라는 로마가 추구하는 힘의 권력 지배 사회에서 낙오된 떠돌이들을 위한 나라임과 동시에 이는 예수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닌 민중 스스로 이룩해 나가야 할 과제임을 말하고 있다. 곧 민족 해방과 정의 실현 그리고 민중 주체 신앙이 본문의 주제이다.

전태일 열사는 자신이 집으로 돌아갈 버스표로 풀빵 몇 개를 사서 점심을 굶고 있는 어린 여공(시다)들에게 나눠주고 걸어가다 통금에 걸려 파출소에서 잠을 잔 경우가 많다.(같이 동행하는 동생 전태삼에게도 버스표를 내놓도록 요구했다.) 자신의 주어진 한계 안에서 그는 구조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주체적으로 그리고 희생적으로 노력했다.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ㅎㆍㄴ’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