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시

민들레처럼

ree610 2024. 3. 20. 07:05

[민들레처럼]

-박노해-

일주일의 단식 끝에
덥수룩한 수염 초췌한 몰골로 파란 수의에
검정고무신을 끌고 어질어질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굴비처럼 줄줄이 엮인
잡범들 사이에서

"박노해씨 힘내십시오"
어느 도적놈인지 조직폭력배인지
노란 민들레 한 송이 묶인 내 손에 살짝이 쥐어주며
환한 꽃인사로 스쳐갑니다

철커덩, 어둑한 감치방에 넣어져
노란 민들레꽃을 코에도 볼에도 대어보고
눈에도 입에도 맞춰보며 흠흠
포근한 새봄을 애무한 민들레꽃 한 송이로 환하게 번져오는
생명의 향기에 취하여
아 - 산다는 것은 정녕 아름다운 것이야

그러다가 문득
내가 무엇이길래
긴장한 마음으로 자세를 바로잡고 민들레꽃을 바라봅니다
어디선가 묶인 손으로 이 꽃을 꺾어
정성껏 품에 안고 네 손에까지 쥐어준
그 분의 애정과 속뜻을
정신 차려 내 삶에 새깁니다

민들레처럼 살아야 합니다
차라리 발길에 짓밟힐지언정
노리개꽃으로 살지 맙시다
흰 백합 진한 장미의 화려함보다
흔하고 너른 꽃 속에서 자연스레 빛나는
우리 들꽃의 자존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특별하지 않아도 빛나지는 않아도
조금도 쓸쓸하지 않고 봄비 뿌리면 그 비를 마시고
바람 불면 맨살 부대끼며
새 눈과 흙무더기 들풀과 어우러져 모두 다 봄의 주체로
서로를 빛나게 하는
민들레의 소박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그래요 논두렁이건 무너진 뚝방이건
폐유에 절은 공장 화단 모퉁이
쇠창살 너머 후미진 마당까지
그 어느 험난한 생존의 땅 위에서건
끈질긴 생명력으로 당당하게 피어나는
민들레 뜨거운 가슴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우리는
보호막 하나 없어도 좋습니다
말하는 것 깨지는 것도 피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피어나야 할 곳에 거침없이 피어나
온몸으로 부딪치며 봄을 부르는
현장의 민들레
그 치열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자신에게 단 한번 주어진 시절
자신이 아니면 꽃피울 수 없는 거칠은 그 자리에
정직하게 피어나 성심껏 피어나
기꺼이 밟히고 으깨지고 또 일어서며
피를 말리고 살을 말려 봄을 진군하다가
마침내 바람찬 허공중에 수천수백의 꽃씨로
장렬하게 산화하는 아 민들레 민들레
그 민들레의 투혼으로 살아가겠습니다

고문으로 멍들은 상처투성이 가슴 위에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 받아 들고
글썽이는 눈물로 결의합니다
아 - 아 - 동지들, 형제들
준엄한 고난 속에서도
민들레처럼 민들레처럼 그렇게 저는 다시 설 것입니다

'모리아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은 거룩하다  (0) 2024.03.23
세상에, 봄이라니요  (0) 2024.03.21
봄비  (0) 2024.03.19
수선화  (0) 2024.03.18
일으켜 세웠다  (2) 2024.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