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얼

[스크랩] 기독교 안에도 구원이 있다

ree610 2007. 11. 8. 10:42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했다가 시비에 휘말려 결국 한국 감리교에서 출교(黜敎)당한 스승 변선환 교수에게 한 번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에 대한 교단의 재판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으로 기억됩니다.

  “선생님, 같은 말도 아-해 다르고 어-해 다른 법인데, 왜 하필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해서 이런 시비에 휘말리신 겁니까?”

  “뭔 말이냐?”

  “저 같으면 그렇게 말하지 않겠어요.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니요? 그럼 기독교 안에 있는 사람들 기분 나쁠 것 아닙니까?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다는데, 하물며 구원이라니요?”

  “그럼, 넌 어떻게 말할 참이냐?”

  “저라면, 기독교 안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겠어요.”

  “기독교 안에도 구원이 있다? 야, 거 말 되누나!”

  우리는 한바탕 웃었고, 그날 얘기는 그렇게 끝났지요.


  스승이 목사직을 빼앗기고 교단에서 쫓겨난 몸으로 우리 곁을 떠나신 지 십년 세월이 넘은 오늘, 나는 상상 속에서 그 날의 대화를 계속해봅니다.

  “말이 될 뿐 아니라 그렇게 밖에는 말할 수 없는 거예요. 선생님이나 저나,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으니까요. 선생님이나 저나, 평생 기독교 바깥으로 나가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미국이라는 데를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 ‘미국에도 무궁화가 핀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정 말하려면 ‘미국에도 무궁화가 핀다더라.’ 또는 ‘미국에도 무궁화가 필 것이다.’ 또는 ‘미국에도 무궁화가 피면 좋겠다.’ 라고는 할 수 있겠지요. 누가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려면 그 사람은 기독교 안과 밖에 모두 있어 본 사람이어야 합니다. 기독교 안에 있다가 밖으로 나갔거나 기독교 밖에 있다가 안으로 들어온 사람만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 선생님께서는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대신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을 것이다.’라든가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으면 좋겠다.’라든가, 뭐 그렇게 말씀하셨어야지요. 그랬더라면 이 정도로 심하게 성토를 당하지는 않으셨을 것 아닙니까?

  “기독교 안에 있다가 밖으로 나갔든, 기독교 밖에 있다가 안으로 들어왔든, 그냥 몸만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해서는 역시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기독교 안팎 모두에서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라야 그렇게 말할 수 있지요. 기독교 바깥에서 구원을 경험하고 나서 기독교에 들어와 구원을 경험했든지 아니면 기독교에서 구원을 경험하고 나서 기독교 밖으로 나가 구원을 경험했든지, 그런 사람이라야 ‘내가 겪어본 바로는,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선생님이나 제가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려면, 기독교에 들어오기 전 기독교 바깥에서 구원을 경험하고 나서 기독교에 들어와 구원을 경험했든지, 아니면 기독교에서 구원을 경험한 다음 기독교 밖으로 나가 거기에서 구원을 경험했든지 둘 중에 하나여야 하는데, 사실 어느 쪽도 아니잖아요? 그러니 선생님이나 저나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는 거지요.”

  “그러면, ‘기독교 안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 아니냐?”

  “그렇지요. 하지만 제 말은, 구원과 기독교를 연관지어 말하려면 그렇게 밖에는 말할 수 없다는 거예요. 저도 선생님도, ‘기독교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겁니다. 한 번도 기독교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으면서, 그래서 기독교 바깥이 어떤지 구경도 못했으면서, 어떻게 기독교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평생 대한민국 국경을 넘어본 적 없는 사람이 한국에만 무궁화가 핀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선생님이나 저나 굳이 구원을 기독교에 결부시켜 말하려면 ‘기독교 안에도 구원이 있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는 겁니다.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든가 ‘기독교 밖에는 구원이 없다.’든가 ‘기독교 안에만 구원이 있다.’는 말은 평생 기독교 안에서만 살아온 사람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거든요.”

  “허, 그러니 내가 터무니없는 말을 괜히 한 셈이구만?”

  “예. 괜한 말씀을 하셨어요. 사실 ‘구원’을 진짜로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것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하느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고요. 사랑에 국경이 없듯이 구원에는 교경(敎境)이 없는 겁니다. 더군다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사람이 노력해서 이루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말인데,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누가 무슨 경계를 어디에다가 설치한단 말입니까?

  “구원이 기독교 안에만 있다든가 밖에도 있다든가, 그런 말은 구원을 몸으로 경험한 사람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라고 봅니다. 참으로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가지고 옳거니 그르거니 하는 사람들 앞에서 연꽃 한 송이 들어 올리며 빙그레 웃기나 할까요?”

  “하하하... 기분 좋다야! 우리 시원한 냉면이나 마시러 갈까?”


  상상 속 대화는 이쯤에서 접고, 그리고 나는 괜히 말합니다.

  “기독교 안에도 구원이 있다.”고.


  누가 묻지 않았는데 괜한 말을 하는 까닭은, 한번도 기독교 바깥을 나가보지 않았다면서 “기독교 안에만 구원이 있다.”든가 “기독교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을 고집하며 자기와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으로 보아, 참된 구원을 맛보지 못한 게 분명한 기독교인들이, 그것도 스스로 차지한 ‘지도층’ 자리에, 우상처럼 버티고 앉아 있는 우습고 딱한 현실 때문입니다.

출처 : 主式會社 드림
글쓴이 : 관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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