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어리는 풀어야 산다.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우리는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광대하심을 묵상하고 찬양하기 보다는
오랜 시간동안 학습된 내용을 아주 자연스럽게 복습하며
그 내용들을 조목 조목 곱씹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지고 잠겨진
응어리들을
다시 휘저어 하루를 엽니다.
마치 잠수부들이 심해에 들어가
가라 앉은 온갖 오물들을 끌어 올리듯 말이죠.
'이제는 더 이상 이런식으로 살아서는 안된다'고 중얼거려 보지만
마음과 생각은 벌써 응어리 속에 집을 짖고 웅크리고 있습니다.
어제와 같지 않은
오늘을 기대하지만, 실상은,
오늘이 어제보다 더 심하기에 내일이 더 두려운지도 모릅니다.
때때로 가까운 지인들에게 오픈도 하고 하나님께도 간구해 보지만
내면 속에는 변화에 대한 소망과 기대치가 거의 zero에 가깝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을 향한 기대보다는 운명으로 받아들이려는
극단적 패배주의가 더 깊이 다스리고 있는듯 합니다.
기막힌 영적성숙과 삶의 열매들을
목말라 하지만
성숙으로 향한 시계는 이미 과거의 응어리 앞에서
요동치 않음을 봅니다.
때때로 감동도, 기쁨도, 눈물도, 감사도, 헌신도...경험하지만
돌아선 자신의 모습에서 응어리의 흐느낌과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의 통증으로
순간마다 힘들어 합니다.
날아가는 새들을 자세히 보시면 상처없는 새가 없듯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중의 차이는 있겠지만
응어리는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분들은 응어리가 한이 되고
결국 병이 되어 누워 계신 분들도 있고,
어떤 분들은 응어리를 가슴에 묻은 채로
그럭 저럭 살아가는 분이 있고
어떤 분들은 응어리를 끌어 앉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우리의 응어리는 외부의 충격이나 상처,
감당키 어려운 일이나 상황에 대한 쓴 열매이지요.
사랑받고 싶은데, 버림받았고
인정받고 싶은데, 무시당하고
하고픈 말이 많은데, 말할 수 없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데, 숨죽여 살아야 되고
삶의
모든 가능성이 사라지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억울함과 분노를 누르고 살아야 될 때...의 쓴 감정들이
한 곳에 뭉쳐 응어리가 되고
그 응어리는 결국 인격형성과 신앙성숙에 장애물이 될 뿐 아니라
영육간에 병이 되어 결국은 극심한 패배주의와
열등감의 포로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계획하심'보다
내 속에 강이 되어 흐르는 패배주의와 열등감을 더 신뢰하며
그 허상을 진상처럼 믿고 살아 갑니다.
내면의 응어리들은 대개 두 가지 형태로
표현되는데
하나는, 내면에 잠재적으로 흐르는 응어리이며
또 하나는, 입술로 표현되는 응어리입니다.
우리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이렇게 늘
지껄입니다.
'나는 안돼!'
'내 기도는 안들어 주시는 가봐'
'나는 안 사랑하시나봐'
'나는 왜 이렇게 할
줄 아는 게 없지'
'나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지'
'나는 왜 이렇게 못났지?
'기도해도 안 되잖아'
'누구를
봐, 평생을 나처럼 살잖아'
'나도 아마, 비참하고 초라하게 인생을 마칠꺼야'
이 지껄임과 속삭임이 있는 동안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아무일 도 하실 수 없을지 모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잠18;21)
우리의 말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열매가 되어 돌아 오기 때문에 우리의 말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도, 신앙도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61;1-3절을 통하여
주의 신을 우리에게 보내사 '마음이 상한(응어리) 자'를 고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지금도 절대 유효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까지 신실하시고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마음에 응어리'를 품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심정이 아닙니다. 그 응어리가(미움,분노,억울함,원통함...) 어떤 것이든 말이죠.
"그때 그 일만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다른 것은 다 참고 용서해도,
그 일만은 그 사람만은 안되고
그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 땀이 흐르고
그 사람을 떠올리면 피가 거꾸로 돌고
그때 일을 생각하면 너무 후회가 되고 억울하고
내 살아 생전에는 용서 못할 것 같고,
해결 안될 것 같은 것"
이런 식의 생각과 응어리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할 뿐 아니라,
성령의 생각이 아닙니다.
이런 식의 생각과 응어리의 배후 조종자는 사단입니다.
응어리는 사단이 성도들을 넘어지게 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비밀병기입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응어리가 풀리지 못한 채 맺혀 있으면
잠깐 기쁠
수는 있으나, 오래 기쁠 수는 없으며
잠깐 감사할 수는 있으나. 오래 감사할 수는 없으며
잠깐 사랑할 수는 있으나, 오래 사랑할
수는 없으며
잠깐 용서할 수는 있으나, 오래 용서할 수는 없으며
잠깐 기도할 수는 있으나, 오래 기도할 수는 없으며
잠깐
뜨겁게 믿을 수는 있으나,
오래 잘 믿을 수는 없습니다.
응어리를 품고 사역을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게 마련이고,
응어리는 반드시 또 다른 응어리를 낳습니다.
이러므로, 응어리는 반드시 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우선과제 입니다.
응어리는 '품고 사는 것'이 아니라,
'풀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주님의 부활의 사건은,
우리의 응어리의 풀어짐의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응어리를 풀어야 할까요?
우리의 응어리를 풀어 주실 주님!
이 땅에 머무시는 분들 가운데
가슴에 바다만한 응어리들을
품고 사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는데,
주의 성령을 보내셔서
한분 한분 맺힌 응어리들을 풀어 주시옵소서.
숯덩이된 응어리위에 성령의 기름을 부으소서.
마음이 이래 저래 상하고 지쳐 있는 분들을
주 날개 아래 보듬어 주셔서
상처가 영광이 되게 하시고,
한숨이 노래가 되게 하소서.
능히 그렇게 하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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