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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속에 있는 은총

ree610 2006. 2. 28. 09:56

 

 

고통 속에 있는 은총
시편 22편 19-21절
19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0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21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찬송가 3, 208장
 


  되돌려 보는 것에는 부끄러운 기억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슨 추억이니 회상이니 하는 낭만과 즐거움이 있겠는가... 우리에게는 또 다른 영역이 있다. 받고 나눔을 통한 사랑과 뿌듯함의 기억들이다. 우리는 먼저 받았다 아니 받고 있고 늘 그래왔다. ‘사랑’만으로 본다 해도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요한은 분명하게 일러 주었다. 사랑뿐인가 생명, 용서, 진리, 은총, 지혜, 지식, 부모, 가족, 사회, 사람, 세상, 역사, 시간, 장래... 우리가 얼마나 착각해오던 부분인가. 마치 내가 너에게 먼저 이만큼 또 오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나를 모른다 하면서 강변해 온 사랑의 자기 원조(元朝) 주장 - 어찌 그다지도 ‘내(I)가' 라는 일인칭 주어가 많고 앞서도 또 중심이 되었는지...

 

  고통 속에 들어가면 몰아(沒我)의 신비가 있다. 존재를 잊어버린다는 점이다. 물론 고통을 자각하는 존재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은 모든 사유(思惟; 깊이 있는 생각)의 깊이와 넓이를 제한하면서 고통 자체에 초점을 두게 하는 이기적 집중력이 있다. 맨 처음 뼈가 부러졌을 때 터져나온 비명은 우선 타인의 존재를 염두에서 떠나버리게 했다. 고통은 일단 자기중심성을 지닌다. 시간이 진행되면서 모든 관계성과 책임성을 쓸어 담아간다. 좀더 지나면 고통이 사람을 이끌어 감을 보게 되고 그 때는 비로소 우리의 의식은 퇴행(退行)을 하게 된다. 즉 어린아이가 되어간다는 뜻이다. 좀 더 들어가 보자, 고통이 심화되면서 고통이 몸을 사로잡으면 고통은 내 몸을 다스린다(대부분의 범죄는 여기서 동기를 지닌다.) 고통으로 일체가 되면 신음은 자연스런 호흡이 된다. 비로소 의식은 자기에 제한되는 퇴행을 멈추고 드디어 부상(浮上)을 한다. 차원이 바뀐다. 자기와 타인, 물적, 사회적 관계를 넘어 드디어 전혀 생소한 창조주와의 대면으로 올라간다.  의인 욥도 처음에는 자신의 출생을 언급하며 부모님을 원망하였다(욥 1: 20 이하). 단계적으로 그렇게 올라가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를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셨다. 우리는 아는바 없고 배운바 없이 거칠게도 마구 이름을 불러댄다. 아직은 자아와 오기가 살아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거친 언어로 마치 어린아이가 뜻 모를 옹알이를 하듯 궁시렁거린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을 알기나 할까?

 

  하나님이 마구 불러댈 그런 대상인가?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중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다가 어느새 ‘아빠’라고 부른다. 창조주, 구원자, 동행자, 심판자라는 어색한 말보다 얼마나 정겹고 따뜻한 혈연을 담보한 말인가... 그런데 그러한 호칭이 과연 가능하기라도 한 것인지 우리 자신을 보면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우리가 먼저 사랑하지 않았음을 고백해야 한다. 그저 가시채나 휘둘렀을 뿐이다. 



기도 주님, 제 아픈 침상에 어머니 손으로 제게 다가오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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