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겨울에는 어떻게라도 가야겠다는 생각에 지난 늦가을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약속 아닌 약속을 했습니다. 실없는 인간이 되지 않으려면 엄두가 나지 않아도 꼭 다녀와야 할 상황이 되도록 겨울이 되면 '봉정암 가는 길을 걸을 것'이라고 떠벌리며 다녔습니다. 막상 겨울이 시작되니 수북한 눈, 얼어 있을지도 모를 빙판, 뼛속까지 시리게 할지도 모를 계곡바람 등에 엄두가 나질 않아 미루고 미루다 설날에서야 날짜를 잡았습니다. 1차적으로 날짜를 잡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엄청난 폭설로 입산 자체가 통제되니 다시 일주일을 미루다 지난주 토요일(11일)에야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한겨울이면 백담사까지 가는 것도 큰 고행 봄부터 가을까지라면 용대리 매표에서 백담사까지 가는 것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문제 될 것이 없는 순탄한 관광길일 수도 있습니다. 체력이 되면 걸어가고, 걷는 게 싫으면 셔틀버스를 이용하면 되니 선택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겨울이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아이젠과 스패츠를 착용하는 것으로 산행준비를 마치고 10시쯤에 백담사에서 봉정암을 향해 출발을 하였습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입산이 통제될 만큼 많은 눈이 내렸지만 심하게 불었던 바람 탓인지 멀리 보이는 산에는 별스럽지 않았다는 듯 바위와 나무들이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백담사를 다녀간 기념으로, 백담사를 찾아오며 가슴에 품었던 소원이나 기도하는 마음을 대신해 올려놓았을 수많은 돌탑들, 널찍한 백담계곡 물가에 자리하고 있던 돌탑들도 눈밭 가운데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백담산장을 지나니 눈 덮인 오솔길에 발자국으로 새긴 더 작은 오솔길이 오롯하게 생겨 있습니다.
긴장된 마음으로 1시간쯤을 걷다보니 어느새 영시암입니다. 그동안 수 차례 오르내렸던 길이기에 낯설지 않은 길이지만 왠지 모든 게 낯설게만 보였습니다. 웅덩이에 머물며 가슴이 시리도록 푸른빛을 띠던 맑은 물, 졸졸거리며 흐르던 투명한 계곡 물은 물론 알록달록하거나 푸른빛 가득 머금고 있던 나뭇잎들도 보이질 않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감춰졌던 부분까지 다 드러냈을 기암의 바윗돌들도 예전의 모습으로 보이지를 않고 생소하게만 다가옵니다. 어쩌면 지금껏 오르내리며 계곡이나 기암 자체를 본 것이 아니라 주변의 나무나 이파리와 어우러진, 부분적이거나 허상의 계곡과 바위만을 보아왔기 때문에 낯선 느낌이 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몇 년씩 별렀던 '봉정암 가는 겨울 길'이지만 정작 겨울에는 계곡물도 얼어버린다는 사소하고도 당연한 사실을 간과할 만큼 생각이 짧았습니다. 진득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빈 수레처럼 덜커덩거리는 호들갑만을 떤 어리석음의 업보입니다. 하는 수 없이 수북한 눈을 한 움큼 뭉쳐 입 속에 넣었습니다. 물가에 엎드려 벌컥벌컥 마시던 물보다야 못했지만 갈증 정도는 덜어낼 수 있었습니다. 흙내 비슷한 눈 특유의 냄새가 뒷맛으로 입안에 남습니다. 주먹만한 눈덩이가 녹아 밤톨 크기로 딱딱해진 얼음덩이를 입안에서 굴리며 그동안 뱉어왔던 언행들을 돌이켜보았습니다. 쓸데없는 말을 참 많이 하며 살았습니다. 별 생각 없이 마구 쏟아낸 말들이 누군가에게는 악담이나 비수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조롱이나 비웃음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평생 짓는 이런저런 죄업 중 입으로 짓는 죄가 가장 많으며 중하다고 했습니다.
백옥가루 즈려밟고, 옥빙교를 건너서 지금껏 발 아래서 뽀드득거리던 눈들은 경계해야만 할, 미끄러지거나 더 힘들게 할지도 모르는 장애물로만 생각했었습니다. 눈을 뭉쳐 갈증을 달래니 지금껏 느꼈던 갈증의 실체가 스스로의 잘못된 준비와 짧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껏 걸었던 길, 지금 걷고 있는 길,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에도 뿌려져 있을 하얀 눈들은 장애의 눈길이 아니라 백옥가루가 뿌려진 행복의 길일 거란 생각이 듭니다. 출발을 하면서 봉정암까지 소요되는 시간을 평소의 두 배쯤 되는 8시간으로 예상을 했었습니다. 미끄러지거나 넘어지지 않으려면 조심해서 걸어야 하고, 펄처럼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고 나가려면 아무래도 엄청난 체력소모가 예상되기에 넉넉하게 시간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지금껏 걸어보니 평소 때보다도 오히려 평탄하고 좋았습니다.
수렴동대피소 앞에 있는 담(潭), 깊이가 4~5m는 된다는 계곡을 흐르던 물들도 꽁꽁 얼어있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물길을 피하느라 바윗길을 기어오르고 내려야 할 곳이지만 꽁꽁 언 얼음 위를 걸으니 더없이 평탄한 지름길이 되어 있습니다. 그 맑고 파랬던 옥수가 얼은 얼음은 어떤 색일까 궁금해졌습니다. 짚고 다니는 등산용 지팡이와 등산화로 쌓인 눈을 쓱쓱 밀어내니 맑은 옥색 얼음이 드러납니다. 아! 옥수가 얼어 만들어진 옥빙교 위에 서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언제 다시 이렇듯 청옥빛깔 찬란한 옥빙교를 걸어 볼 거냐는 마음에 맴돌이를 하듯 몇 바퀴를 돌았습니다.
봉정암을 향한 발놀림은 백옥가루를 즈려밟고 옥빙교(玉氷橋)를 건너고 있는 중입니다. 행복합니다. 참 잘 왔다는 생각과 날짜 또한 기막히게 잘 선택했다는 만족감으로 '룰루랄라~'거리는 흥얼거림이 코끝으로 매달립니다. 봉정암으로 가는 백담 계곡은 동안거 중 백옥가루 같은 눈들과 청옥빛깔 얼음이 없었다면 봉정암으로 가는 겨울 길이 조금은 살벌하고 눈길조차 허전했을지 모릅니다. 나무들도 허세처럼 덕지덕지 달고 있던 이파리들 모두 떨쳐내니 허전한 알몸이 되어 있습니다. 초목에 가려 보이지 않던 바위와 땅들도 거무튀튀한 모습 그대로 드러나니 한 층 더 울퉁불퉁하니 험상궂은 산세만을 드러냅니다. 겨울이라는 계절적 특성, 운행되지 않는 버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워낙 오가는 사람을 볼 수 없으니 계곡 자체가 동안거에 든 것이 아닌가가 의심될 정도로 조용하기만 합니다. 오가는 사람이 없으니 속세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날씨가 고요하니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고 물소리 또한 두꺼운 얼음에 갇혀 전혀 들리질 않았습니다.
이 정도쯤이면 모습을 드러낼 다람쥐들도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다람쥐들도 산승을 따라 동안거에 들어 선방생활을 하느라 출현하지 않는 가 봅니다. 동안거에 든 스님들이야 공부하며 화두를 깨치기 위해 참선한다지만 겨울 다람쥐는 어떤 생활, 어떤 화두를 붙잡고 무엇을 깨치려 하는지가 궁금증으로 다가옵니다. 저만치 쌍폭포로 오르는 철 계단이 보입니다. 옥수가 흐르던 계곡, 맑은 물 철철 흐르던 쌍폭포 계곡은 선비가 입었던 청옥빛깔 도포자락처럼 구불구불 흔들렸습니다. 정말 장관입니다. 딱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얼음줄기가 거대하고, 그 얼음줄기에서 발산되는 청옥빛깔의 아름다움이 장관입니다.
크고 작은, 이런 옥빙교와 옥빙폭포는 쌍폭포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벌써 2시간쯤을 걸었는데도 아직껏 백옥가루를 즈려밟고 옥빙교를 건너거나 마주대하며 걷고 있습니다. 어느덧 깔딱고개 아래입니다. 순백의 눈길과 청옥빛깔 얼음에 취해 꺼드럭꺼드럭 걷다보니 무아도취의 상태에서 깔딱고개까지 걸었습니다. 깔딱고개를 오를 때마다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하는 것을 위안 삼게 하는 돌 거북이도 백옥빛깔 눈 도포를 걸친 채 쉬고 있습니다.
몸은 백옥이 되고 마음 또한 청옥이 되어 다가서는 그 곳, 봉정암 가는 겨울 길에는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고, 그곳에서만 들을 수 있으며 그곳에서만 깨달을 수 있는 행복과 지혜 그리고 표현되지 않는 그 뭔가가 있는 행복한 길이었습니다. 그런 행복한 마음으로 봉정암을 향해 다시 한 번 발길을 옮겨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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