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의 햇살이 따가웠다.
서울 서초동 법원 청사로 향하는 도로에 스피커가 설치돼 있었다. 조용한 팬 플루트 음악이 흘러나왔다. 곡은 타이스의 명상곡. 차분한 선율은
분쟁의 한복판을 찾아온 이들에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인생을 한번 관조해 보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법원
건물 주위에 피의자들을 실어 온 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다. 포승줄에 꽁꽁 묶인 이들이 차에서 내려 재판을 받기 위해 법원 건물로 들어섰다.
재판을 마치고 구치소로 돌아가려고 기다리는 파란 옷의 사람들이 보였다.
서울 고등법원 청사에 도착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로비로 들어섰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지금 이곳에서 행복과 불행, 生과 死의 갈림길에
서 있을까? 어떤 이는 어금니를 꽉 다문 비장한 얼굴이었고, 어떤 이는 몹시 화가 난 표정으로 내 옆을 횡하니 지나갔다.
被告나 原告로 판사를 만나는 것은 아니지만, 현직 부장판사를 만나는 마음이 가벼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李宇根(이우근·56)
서울고법 수석 부장판사와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져 발걸음이 빨라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4층에서
내렸다.
「법원은 서류 넘기는 소리만 들린다」더니 절간에 온 듯했다. 내 구두 발자국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李판사의 방은 14층 복도 맨 끝에 있었다.
「사건에 대해 문의가 있는 변호사와 검사는 직원의
안내를 받으라」는 문구가 보였다. 「변호사와 검사를 만나지 않겠다」는 逐客(축객) 표지였다.
다행히 문이
열려 있었다. 기자가 들어서니 여비서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떻게 오셨는지…』라는 물음에 경계의 빛이 역력했다.
李판사의 사무실은 19평 크기다. 정부 부처 차관급 집무실에 해당되는 규모이다. 李판사는 차관급 대우를 받고 있고, 이
자리를 거친 후 지방의 법원장으로 나가게 된다고 한다. 그의 책상 위에는 사건기록이 서너 무더기 쌓여 있었다.
李판사의 머리카락은 빗질을 하지 않아 덥수룩했다.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모습이 기자를 오히려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굉장히 피곤해 보이시네요」 했더니, 李판사는 『기록을 검토하느라 며칠 밤을 샜더니…』 하며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임관 後 첫 인터뷰
李판사는 『인터뷰는 무슨… 그냥 차나 한잔 마시고 가세요』라고 했다. 웃음을 지었지만 현직 판사로서 기자를
만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듯했다.
『음료수나 한잔 주시면 마시고 가겠습니다』라고 시원스럽게
대답을 하긴 했지만,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할까 걱정이 앞섰다. 李판사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통로를 동원했다. 李판사는 나를 소개해
준 선배 법조인들의 체면을 생각해 불편한 자리를 견디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가벼운 이야기부터 슬쩍
끄집어냈다.
―판사 생활을 하시면서 기자하고 인터뷰하신 적이 있으세요.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기자들이 내 판결문을 인용해서 마치 내가 얘기한 것처럼 인터뷰 기사를 만들어 쓴 적은
있었어요(웃음)』
―기자들에게 항의를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내
판결문을 그대로 인용했으니까, 내 얘기가 아닌 건 아니잖아요. 그냥 넘어가야지 어떡하겠어요? 문제는 하지도 않은 말을 썼을 때입니다. 법률적인
해석은 말 하나가 달라져도 의미가 전혀 다르게 전달되잖아요. 언론이 심할 때가 있어요. 짐작만으로 기사를 쓰는 경우가 없지 않아요. 기사에 대한
욕심 때문에 度가 지나치면 곤란하죠』
―법관들이 인터뷰에 잘 응하지 않아서 그렇지 않을까요.
『그렇겠지요. 하지만 직업상 어쩔 도리가 없어요. 법관들이 외부에 노출되지 않는 것으로 따지자면 어디
언론뿐이겠어요? 친구들 만나는 것도 의도적으로 피할 때가 많아요. 오죽하면 「판사는 판결로만 이야기한다」고 하겠습니까』
李판사는 기자의 시시콜콜한 질문에 대충 대답하는 법이 없었다.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로, 강약을 섞은 확신에 찬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 질문에 답을 하다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싶을 때에는 책상으로 성큼 걸어가서 관련
자료들을 찾아왔다.
수십 년 전에 내린 판결을 정확하게 기억해 내 육하원칙에 따라 설명을 해주었다.
영락없는 법관이었다.
120명의 후배 판사들을
지휘 대화가 한 시간을 넘기면서, 李판사가 「이제 그만하죠」라며 일어서지 않을까 하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천만 다행인 것은 李판사가 평생 언론을 상대하지 않아, 무작정 찾아와 인터뷰를 하려고 덤벼든 기자의 억지를 순수하게
받아주었다는 점이다.
李판사는 판사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 왔다.
지난 30년 동안 민사·형사·조세·행정 등의 분야에서 일했고, 지금은 40명의 부장판사, 80명의 배석판사, 25명의 예비판사를 사법행정상으로
지휘하고 있다.
판사 한 사람의 힘은 막강하다.
며칠 전에는
서울지법의 한 30代 판사가 종교를 이유로 병역의무를 거부한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해 세상이 온통 뒤집혔다. 李宇根 수석 부장판사는 17代
총선에서 제기된 총선 관련 선거사범 재판을 관장한다. 30여 명에 이르는 국회의원들의 정치 생명이 그의 손에 달려 있기도 하다.
李판사는 1994년, TV 방송사와 드라마 작가 사이의 저작권 분쟁사건에서 작가 측이 제기한
「放映(방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방송사상 최초로 연속극의 방영이 법원에 의해 중단됐다. 1995년에는 북한 소설 출간에 무죄를
선고해 국가보안법의 엄격한 해석과 적용을 판시했다.
지난 1월에는 참여연대가 예산운용을 감시할 목적으로
서울시를 상대로 낸 「사본 공개 거부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개인의 신상정보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공개해야 한다」며 원고 일부 승소판결을
내렸다. 서울시는 3만9000여 쪽에 달하는 판공비 사용 내역 등의 자료를 복사해 참여연대에 제공하고 있다.
―30년 판사 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판결은 어떤 건가요.
『1998년 대구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근무할 때 「삼청교육 피해자에 대해 배상을 약속한 국가가 이를 어겼다면 피해자들이 입은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어요.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의 신뢰가 위반되었다는 이유로,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판결이었어요. 「삼청교육 피해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의 제정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기억에 남아요』
민청학련 사건 변호인으로
활동 ―판결이 사회적 변화를 가져올 때 뿌듯함을 많이 느끼시겠어요
『그럼요. 1994년에 방송사와 드라마 작가가 저작권을 놓고 싸우는 사건을 맡았어요. 작가의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서 방영 중인 드라마를
중단시키라고 판결했습니다. 「판사가 판결을 내렸으니 드라마를 중단하는 건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아요. 메이저 방송사가
드라마 작가와 싸우면서 방영 중인 드라마를 내리기가 쉬운 결정은 아니죠. 판결을 순순히 받아들여 준 방송사가 고맙더라고요』
―드라마 작가의 손을 들어주셨죠.
『그랬어요. 작가가 재판이 끝나고 저를 찾아와서
「제가 질 줄 알았습니다」라고 해요.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고 물으니까 「상대는 힘이 있는 방송사가 아닙니까」라고 해요. 작가에게 분명히 말해
줬어요. 「언론이 힘이 있는 것과 법원의 판결에 무슨 상관이 있느냐? 재판부는 힘의 논리에 의해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 무엇이 올바른 방향인지에
대해 심사숙고해서 결정을 내릴 뿐이다」고』
―李판사께서 변호사로서 민청학련 사건 변호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1974년의 일이죠. 사법연수원을 졸업하고, 군 법무관 임용을 기다리는 6개월 동안 변호사
활동을 했습니다. 사무실은 열지 않고 인권변호사로 유명한 故 黃仁喆(황인철) 변호사를 도와서 일을 했습니다. 민청학련 사건의 주범으로 몰린
李哲(이철), 柳寅泰(유인태)가 제 경기고등학교 동창입니다. 제가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어요. 여럿이 힘을 합쳐 대응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洪性宇(홍성우), 姜信玉(강신옥), 李敦明(이돈명), 韓勝憲(한승헌) 변호사님이 동참했어요. 역사상 처음으로 20명에 이르는 변호인단이
조직됐고, 훗날 인권변호사·민권변호사들이 태동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李판사는 李哲 前 의원과 40년
知己다.
경기高 1학년 때인 1964년 문예반에서 처음 만나 함께 詩와 소설을 쓰고, 校誌(교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黃仁喆 변호사를 모시고 그 친구를 만나러 구치소엘 갔어요. 죄수복을 입고 변호인
접견실에 나와서 그 친구가 나를 보고 대뜸 하는 말이 「야, 담배 있냐」였어요. 사형선고를 받을 녀석이 너무나 태평스러워서 놀랍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하고…』
―서슬 푸른 유신 시절에 시국사건 변론을 했는데 軍 법무관 임용에 문제는
없었습니까.
『주변에서 다들 「軍 법무관 가는 건 포기하라」고 했고, 저도 사병으로 軍에 가야 하지
않겠나, 단념한 상태였어요. 검찰 공안 쪽에 일하는 선배들이 나서서 軍 쪽에 「이우근이가 민청학련 관련자들을 변호한 것하고, 이우근의 국가관은
아무 관계가 없다. 우리가 보장을 한다」고 설득을 해주었습니다. 그 덕에 軍 법무관으로 겨우 갈 수 있었죠』
첫 사형선고 내리고 두 달간 끙끙
앓아 正義의 여신은 눈을 가린 채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여신의 눈 먼 칼질에 운명이 갈린 인간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神을 대신해 인간의 죄와 벌을 판단하고,
인간의 목숨을 뺏으면서 판사들은 얼마나 고뇌할까?
―사형선고를 내려 본 적이 있나요.
『두 번 있었어요. 탈영한 사병이 강도·강간·살인 사건을 한꺼번에 저질렀어요. 당시 제가 軍 법무관으로 재판부 군 판사를
맡고 있었는데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그 날 저녁에 술을 엄청 마셨어요. 그러고 나서 두 달을 끙끙 앓았어요. 말로 표현할 수 없게
괴롭더라구요. 그 병사는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어요. 또 한번은 지방법원 합의부 배석판사로 있을 때였는데, 네 명을 도끼로 살인한
피고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어요』
―피고인들이 사형선고를 수긍하나요.
『너무나 긴장해서 「사형」이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듣는 것처럼 보여요. 교도관이 밖으로 데리고 나가기 위해 옆에 다가오면
그제야 판결의 의미를 알고 고개를 떨구거나, 증오의 눈길로 재판관을 바라봐요. 사형을 선고받은 형사범들은 암을 선고받은 사람과 비슷한 심리적
과정을 거친다고 해요. 「왜 하필 내가」라는 마음이 시간이 지나면서 체념으로, 그리고 마음을 정리하는 단계로 갑니다』
―사형제도에 반대하십니까.
『개인적으로는 사형 폐지 쪽이에요. 하지만 판사는 설사
사형제도 폐지론을 신념으로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공동체적 良心에 따라 판결을 해야 합니다』
개인적 양심, 공동체적
양심 ―「공동체적 양심」은 무슨 의미입니까.
『良心(Conscience)의
「Con」에는 「함께」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변과 함께 보지 않고 혼자 생각하고, 주관적인 자기만의 所信을 良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불행해집니다. 양심은 바른 말과 행동을 하려는 마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뜻에 어긋나지 않아야 합니다. 전쟁이 터졌는데
「나의 양심으로 이 전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하고, 전쟁을 피해 달아나는 사람을 양심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중년의
인텔리라도 관광버스를 태워 놓거나, 예비군 훈련에 가면 행동이 달라집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어떤 사회 속에 살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나와 너가 연결되는 관계 속에서 진정한 良心은 시작됩니다』
―지난 5월21일
서울지법 남부지원의 한 판사가 입영을 거부한 3인의 「여호와의 증인」 신도에 무죄판결을 내렸습니다. 「개인의 良心을 국가가 판단할 수 없다.
개인의 良心에 따른 병역 거부를 국가가 인정해야 한다」는 게 판결의 핵심이었습니다.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데.
『「내 良心으로는 도저히 타인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 그래서 병역을 거부한다」는 사람은 분명히 「모랄 맨」(Moral
Man)입니다. 남부지원의 판결은 최초로 良心의 자유를 天賦(천부)인권으로 선언한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를 계기로 良心을 빙자한
非良心이 판을 치게 되면 국가안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李판사는 『판사의 판결은 개인적인
善이 아니라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하급 법원의 판결에 대해 말을 아꼈다.
한국의
監獄을 거쳐 간 양심적 병역 거부자는 1만여 명이며, 현재 監獄에 있는 사람이 500여 명에 달한다. 영국과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代替(대체)복무제를 도입했다.
대만의 경우, 2년 전 2000명 정원의 代替복무제를 도입했지만 신청자가
줄어 요즘은 정원을 채우지 못한다고 한다. 대체복무가 병역보다 더 힘들기 때문이다.
李판사는 『양심적
병역 거부를 우리 사회와 법원이 인정하려면 代替복무제가 도입되고, 병영이 좀더 편안한 곳이 되고, 어머니들이 아들을 軍에 안심하고 보낼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야 한다』며 『이런 조건이 충족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재판은 법률과 판사의 良心에 의해
진행 법관은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판사로 임용된다.
대개 민·형사 좌우
배석 재판관, 민·형사 단독부 재판관, 고등법원 좌우 배석 재판관, 대법원 재판연구관, 지방법원 부장판사, 고등법원 부장판사 등을 거치게 된다.
초임 판사로부터 민·형사 1심 단독부 재판관이 되기까지 대도시 경우 6~7년, 중소도시 경우 4~5년이 걸린다고 한다.
민사 재판은 소송가액이 1억원 미만인 경우 단독심, 1억원 이상인 경우 합의부를 거친다. 형사 재판은 징역 1년 이상에
해당하는 사건이 합의부로 배당된다.
李판사는 「합리적이고 깔끔하게 사건을 처리한다」는 평을 듣는다.
수원지법에서 배석판사로 李宇根 부장판사를 모셨던 한 변호사는 이렇게 얘기했다.
『李宇根 판사님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고, 대단히 합리적인 분입니다. 물 흐르듯이 사건을 처리하는 솜씨를 그분에게서 많이
배웠습니다. 솔직히 판사라는 직업이 남들 다 하는 해외여행 한번 가기 어려울 정도로 살림이 빠듯합니다. 주변 관리가 철저하고, 청렴한 점은 후배
판사들에게 본보기죠』
―훌륭한 판사가 될 수 있는 자질은 무엇일까요.
『자격은 객관화될 수 있는 요소지만, 자질은 그 사람의 인성과 품성에 연결되는 것이어서 눈에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자질은
처신으로 직결되고,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사법고시에 합격했다고 해서 법조인으로서의 훌륭한 자질까지 갖췄다고 볼 수 없죠. 법관의 자질을 굳이
꼽자면, 良心과 합리적 판단, 균형감각입니다. 「법관이라는 자리에 맞게 성실하게 노력하는가」, 「겸손한가」, 「책임감이 투철한가」, 「다른
사람에게 삶의 모범이 되는가」라는 물음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야죠』
―균형감각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美學에서 가장 절묘한 안정감은 1대 1의 정비례가 아니라, 1대 1.618의 황금분할에서 온다고 하죠.
많이 가진 쪽이 남의 倍가 넘도록 과욕하지 않고, 적게 가진 쪽도 다른 쪽의 절반 밑으로 옹색하지 않은 여유로운 조화라고 할까요? 서로 다른
크기의 부분들이 각자의 특성을 지닌 채 상대와 넉넉히 어울리며 더욱 더 큰 전체의 조화를 만들어 가는 지혜지요』
李판사는 『재판을 하면서 당사자들 간의 균형은 물론이고, 판결과 사회의 균형까지 모두 따져 봐야 한다』며 『이것이 바로
구체적 타당성과 법적 안정성의 조화』라고 설명했다.
―인생 경험이 부족한 젊은 판사들이 단독심으로 재판을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미국처럼 변호사 경험을 쌓은 이들 가운데 판사를 선발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재판은 경험이나 感이 아니라 법률과 판사의 良心에 의해 진행됩니다. 판사들이 사건을 철저하게 검토해서
審理(심리)하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법관의 개인적 경험이 판결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 아닌가요.
『다소 영향을 미칠 수 있겠죠. 은행 여직원이 사귀는 유부남을 위해 10억원의
공금을 횡령해서 구속된 사건이 있었어요. 저같이 연애 결혼한 판사들은 여직원의 딱한 처지에 동정이 갈 겁니다. 젊은 판사들은 인간적인 연민이
그리 크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이런 판사의 감정이 판결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에요. 정상 참작이 있긴 하지만 형량에 큰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차이가 있어서도 안 되고요』
『법관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가끔씩 상식을 벗어나는 하급심의 판결이 나와 사회가 떠들썩해지지 않습니까.
『모든 판결은 법률과 판례를 기준으로 합니다. 입법 취지를 살려야 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법관은 「구체적 타당성과 법적 안정성의 조화에서 어느 쪽에 무게중심을 두느냐」를 놓고 끊임없이 고민을 합니다』
―원고와 피고가 법정에서 서로 다른 주장, 진실과 거짓을 쏟아냅니다. 그 가운데서 진실을 찾아내려면
지식보다는 지혜가 더 필요한 것 아닐까요.
『물론이죠. 법관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풍부한 교양이 필요합니다. 저는 후배 법관들에게 법률 전문서적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철학·사회학·문학 등 非법률 인문 교양도서를 많이
읽으라고 권합니다』
―대학 2, 3학년 때부터 골방에 박혀서 얼음에 박 밀 듯이 법전만 달달 외운 사람이
판사가 되고, 아무런 사회경험이 없는 20代가 단독부 판사로 배치되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민·형사
단독부 재판에 새파란 젊은 판사가 배치되는 것은 무리라고 봐요. 고등법원에서 좌우 배석 판사로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난 다음 단독부를 맡는 것이
적당합니다』
사회의 향락주의 우려할
수준 ―젊은 후배 판사들에 대해 만족하십니까.
『귀염둥이로 자라서 젊은 나이에 판사가 되면 사고가 편협해질 수 있습니다. 판사는 타인들의 문제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에고이즘(Egoism)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요즘 아이들은 대부분 혼자서 자란데다 인터넷을 사람보다 더 좋아하지 않습니까? 그들의 삶이
유행가처럼 경박하고 게임처럼 쾌락에만 머물게 되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합니다. 감각적인 것만 좋아하는 요즈음 청소년들 중에서 미래 법관이
배출된다고 생각하면 끔찍하기도 해요(웃음)』
―재판정에서 사건 審理를 하면서 우리 사회가 너무 감각적으로
흐른다는 느낌을 받으셨나 봅니다.
『저는 요즈음을 「4脫」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脫윤리, 脫문화,
脫문자, 脫역사. 범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초임 판사 시절이었던 1970년대에는 절도범의 상당수가 생계형 범죄였지요. 1990년대로
넘어오면서 쾌락추구형 범죄가 많아졌어요. 요즘 무제한의 향략주의가 판을 치고 있어요』
작년 한 해
형사범으로 구속된 피고인은 8만6200명이다. 불구속 입건은 12만 2000여 명에 달했다. 李판사는 『돈 앞에는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부모도 보이지 않는 듯이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면 절망적일 만큼 씁쓸해진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특별히
엄하게 처벌하는 범죄가 있나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인간은 善과 惡의 구별을
알아버렸지요. 善과 惡은 동시에 우리 인간에게 들어왔어요. 완전한 善도 없지만, 죽일 정도로 惡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善과 惡을 무
자르듯 할 수 없는 이유겠지요. 다만, 지난 30년 동안 비교적 엄한 처벌을 내렸던 죄가 있다면 어린이 학대였어요.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용의주도하고 치밀한 사기 범죄지요. 인간의 신뢰를 계획적으로 철저하게 배반하고
인격을 파괴시키는 범죄는 엄벌에 처했습니다』
―흔히 「형량이 가벼운 판사」와 「무거운 판사」를
구분짓더군요. 李판사님은 어느 쪽입니까.
『「(형량이) 무겁다」는 소리는 안 듣는 편일 거예요(웃음).
피고인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럴 만한 계기가 있었어요. 1984년이었어요. 삼촌과 조카가 사업체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삼촌이 조카를 「사기 횡령죄」로 고소했습니다. 검사가 구속한 피고인을 제가 일단 보석으로 내보냈습니다. 아무래도 審理를 오래해야 할 것
같은 판단이 섰습니다. 8개월 동안 審理를 하고 나서 판결을 했어요. 「다소 문제가 발생하긴 했지만 삼촌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친조카를 형사처벌하는 것만이 해결 방법은 아니다」는 논지로 무죄판결을 했어요』
李판사가 『무죄』를
선고하자, 젊은 피고인은 30여 초 동안 숨을 죽인 채 李판사를 쳐다보더니 자리에 쓰러져 하염없이 통곡을 했다고 한다.
한 달 뒤 무죄를 선고받은 피고인에게서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됐다.
「그렇게 오랫동안
심리를 하며 제 얘기를 들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판사님께서 무죄를 선고해 주신 순간 이 세상은 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李판사의 얘기다.
『사실 제게는 아주 사소하고 조그마한
사건이었어요. 그 젊은이의 편지를 받고서 「내 판결이 한 사람의 영혼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는 걸 절실하게 느꼈어요. 그 후로 더욱
신중하게 기록을 검토하게 됐습니다』
한 간첩의 참회 ―재판이 끝나고 나서 피고인이 「억울하다」 혹은 「고맙다」고 연락을 해 오는 경우가 종종 있나요.
『한번은 일흔이 넘은 간첩을 재판하게 되었어요. 審理를 해보니 「나이든 사람을 구속해 봐야 실익이
없다」고 판단되어서 석방했습니다. 이 노인이 나중에 「지금까지 이념의 허깨비로 산 것 같다. 남한 재판부의 관용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절실히
깨달았다. 고맙다」는 내용의 글을 붓글씨로 써서 직접 제게 전해 주었습니다』
―「사회가 잘못되었는데 난들
어쩌겠냐」며 자신의 범죄를 사회의 탓으로 돌리는 피의자들이 많습니다. 방송들은 이런 주장을 여과 없이 방영하고 있고요.
『오염된 방에 익숙해질수록 더 잘 견뎌 낼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결국 질식하고 맙니다. 오염된 사회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것을
큰 자랑으로 혹은 마치 처세인양 생각하고, 잘못되면 사회탓을 합니다. 이건 모두 함께 망하는 지름길입니다. 빨리 환기를 시켜서 오염을
정화시키려고 같이 노력해야죠』
―「판사들이 제일 싫어하는 피고인은 법정에서 잘 난 척하고, 자기 얘기
많이 하는 사람이다」고 하더군요. 피고인의 법정 태도가 판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칩니까.
『정상참작에
도움이 되지요. 반성이나 성실한 자세가 모두 정상참작으로 연결되지는 않아요. 사회적으로 크게 지탄받는 사건은 정상참작의 여지가 적습니다.
법관들은 사건을 맡게 되면 기록을 철저하게 연구하면서, 제출된 탄원서를 꼼꼼히 읽습니다』
―과장된
탄원서들이 더러 있지요.
『老子의 도덕경에 「말 많은 사람과 글 잘 쓰는 사람은 진실이 적다」는 말이
있어요. 진실성 없이 미사여구만 늘어놓은 탄원서는 반갑지 않아요. 이 사람이 진실로 반성하는가는 탄원서와 법정에서의 태도를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혀끝의 말, 마음을 담은
말 ―기억에 남는 탄원서가 있나요.
『뇌물수수로 구속된 어느
공무원이었어요. 수백 장이 넘는 탄원서에다가 깨알처럼 「잘못했다」고 적어서 제출했더라고요. 인상이 깊었어요』
―「반성한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닌가요.
『정말 반성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그냥 「잘못했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아요.「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잘 하겠다」는 식의 조건을 내걸지 않죠』
법관은 판결문을 쓰는 직업이다.
법정에서 피고와 원고의 말을 들으면서 판단을 내려야
하기 때문에 판사들은 「말」에 대해 이해가 깊다. 李판사는 말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학을 갖고 있었다.
『말의 신뢰성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이 과연 신뢰할 만한 인격을 지니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혀끝의 말, 마음 없는 말을 버리고 영혼 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말 없는 마음」을 말로 내놓을 때 그 말은 호소력을 갖게 됩니다』
그는 莊子를
인용해 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개가 잘 짖는다고 勇(용)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 잘 지껄인다고 영특한
것이 아닙니다. 습관이란 마치 나무 껍질에 새겨놓은 글자 같아서, 세월이 지남에 따라 年輪처럼 점점 더 확대되어 가게 마련입니다. 자신은 깨닫지
못해도 남의 눈에는 그 못된 습성이 「벌거벗은 임금님」의 寓話처럼 훤히 들여다보이는 법이지요』
―판사는
직업의 특성상 말을 아껴야 하는 편 아닙니까.
『주로 듣는 편이지요. 영미법에서는 審理를
「히어링(Hearing)」이라고 합니다. 경청을 강조하고 있어요. 법관은 친구와 밥 먹으면서도 시시콜콜한 농담 같은 말을 잘 하지 않는
편이지요』
―판사라는 직업 때문에 언행에 제약이 많겠군요.
『이
인터뷰도 그런 경우죠. 제가 법관이 아니었다면 이런저런 사회 현안에 대해 속시원하게 말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럴 수 없잖아요. 법관은 사회의
共同善에 따라야 하니까요』
판사들은 숙제가 너무
많다 우리나라의 법관은 현재 대법원장을 포함해 1878명이다.
임관
10년차 법관 한 명이 일년에 책임지고 있는 사건의 수가 지방법원 기준으로 약 900건에 달한다고 한다. 1주일에 15건 이상의 판결문을 써야
한다는 얘기다.
李판사는 『사건마다 다르지만 경찰과 검찰의 수사자료, 피고인 측에서 제출한 자료를 합쳐
1건당 10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되는 서류를 한 달에 수백 건을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살인적인 격무」인 셈이다.
―판사들의 출퇴근 시간은 몇 시입니까.
『출퇴근 시간이 따로 있을 수 없어요.
토요일과 일요일에 출근할 때가 많습니다. 휴가가 있지만 제대로 갈 수 없어요. 아들이 어릴 때 저희 어머니가 「아빠처럼 판사가 되라」고 했더니,
아들이 「나는 판사는 안 한다」고 했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숙제가 너무 많다」고 하더래요. 제가 매일 서류더미를 보자기에 싸서 퇴근했거든요.
판결문을 집에서 쓰는 일이 잦았어요. 요즘은 컴퓨터가 있어서 한결 나아졌어요』
―1건당 수천, 수만
페이지가 되는 사건기록들을 샅샅이 훑어볼 시간적 여유가 있습니까.
『판사를 오래 하다 보면 반드시 읽어야
할 핵심적인 수사자료, 기록이 어떤 건지 알게 됩니다. 요령이 생기는 거죠. 그렇다고 대충 읽을 수는 없어요. 집에 못 가는 한이 있어도
사건기록만큼은 철저하게 읽습니다』
―혹시 기록을 다 못 읽고 법정에 들어가는 일이 있습니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법정에 한 번이라도 가 본 사람은 제 말에 공감할 겁니다. 피고와 원고는
판사가 어느 쪽 증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어느 쪽 변호사의 말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지 판사의 눈빛만 봐도 압니다. 판사의 눈빛에
一喜一悲합니다. 사건기록을 안 읽고 들어가면 원고와 피고가 제일 먼저 알아차릴 겁니다』
李판사는
「사건기록을 제대로 다 읽고 재판하느냐」는 질문이 다소 껄끄러웠는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저는 평소
후배들에게 사건기록을 이 잡듯이 훑어보라고 합니다. 배석판사는 부장판사가 있어서, 부장판사는 배석판사가 있어서, 하급심은 상급심이 있어서 최선을
다합니다. 이런 견제장치가 있어서 판사는 사건을 철저하게 검토하고 분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칼의 문화, 붓의
문화 법관은 각종 사건을 다루면서 판결에 필요한 모든 자료를 검토한다. 이걸 審理라고
한다. 형사사건의 경우 검찰 측에서 제기한 공소사실 외에 원고와 피고인 양측의 주장과 증거를 받아들이고 판단한다.
재판은 반드시 審理를 거쳐 결심공판에 이르게 된다. 한 달에 수백 건의 사건을 검토해야 하는 현실에서 과연 법관들은 얼마나
審理에 충실할 수 있을까?
『법관들이 종래 일주일에 한 번 법정에 들어갔는데, 최근에는 두 번 이상
들어가고 있어요. 형사 집중 심리제도입니다. 신속하고 정확해야 한다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지요. 재판은 「빨리」도 중요하지만,
「공정」이 더욱 중요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재판에서도 「빨리 빨리」를 원합니다. 재판을 받는 열이면 열 모두가 하나같이 「재판이 빨리 진행되지
않아서 불만이 많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판결에 완전히 승복하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李판사는 일본과
한국의 재판문화가 다른 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일본의 경우 항소율이 우리나라에 비해 아주 낮습니다.
대신 1심 재판 기간 동안 審理에 충실합니다. 재판에 임하는 당사자의 자세가 아주 꼼꼼하고 철저하답니다. 그러고 나서 결과에는 깨끗하게
승복합니다. 우리나라는 50% 이상이 항소는 물론이고 대법원 상고까지 갑니다』
―왜 그런 차이가 나는
걸까요.
『일본은 칼의 문화인 반면, 한국은 붓의 문화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칼은 한 번 뽑으면 어느
쪽이든 목숨이 왔다 갔다 하지만, 붓은 언제든 다시 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일본에
비교하면 한국인들이 소송을 남발하는 경향이죠.
『맞아요. 소송에 이르기 전에 갈등을 해결하는 사법
서비스가 있어야 합니다. 소송 외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이 시급해요. 하루빨리 公的 변호제도를 활성화시켜야 해요. 법률구조공단이 독립 법인단체로
가야 하고, 행정 각부나 지방자치단체 내에 변호사 자격이 있는 법률 전문가를 배치해서 소송까지 가기 전에 사건을 상담하고 해결해야 합니다. 또한
비용이 적게 들면서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민사조정 제도의 활용이 시급합니다. 한 해에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考試生(고시생)이 1000명이나
되는 시대가 아닙니까? 충분히 가능합니다』
변호사와 판사를 不信했던
고교생 李판사는 1948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났다. 3남2녀 중 막내아들이다.
그의 부모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아이들을 데리고 부산까지 걸어서 피란 내려왔다. 李판사는 『아버님은 고향
용천에서 농사를 짓다가, 철공소를 운영했던 것으로 안다』고 했다.
그는 『어머니의 강인한 삶은 나에게
영원한 채찍』이라며 『어머니의 고난과 힘겨운 삶에 비한다면 지금 나의 삶은 호사스럽고 과분한 것』이라고 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의 품에 안겨
피란 온 그에게는 고향 산천의 모습이나,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없다. 고향 생각으로 눈물을 흘릴만한 정서적 자산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느닷없이 날아든 고향의 참극 때문에 그는 「향수병」을 톡톡히 앓고 있었다.
『고향 땅을 한번 밟아
보고서야 세상을 떠나시겠다던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사고 소식을 듣고 안절부절못하게 되더라구요. 부모님 생각이 간절해지고, 왜 하필
고향 어린이들이 이렇게 많이 희생됐는지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고등학교 때 문예반에서 활동했다고
들었는데, 법대를 지망한 특별한 동기가 있습니까.
『본래 신학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는데, 제가 초등학교 때 시작한 집안의 송사가 그때까지 끝나질 않고 있었어요. 저는 변호사와 판사에 대한 불신이 컸습니다.
아버님이 판사·변호사들이 형편없다며 불만을 털어놓으셨어요. 어린 마음에 「내가 제대로 된 판사가 돼서 正義를 지켜야겠다.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죠』
―존경하는 인물이 있습니까.
『南아프리카 공화국의 인권운동가 넬슨 만델라입니다. 만델라는 오랜 백인 통치 下에서 27년을 로빈 섬 감옥에서 보냈지만 대통령에 당선된 후
백인들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대통령이 되어 「진실과 화해 위원회」라는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특별기구를 만들어,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는
백인들에게 赦免을 베풀었어요. 만델라의 신념 속에는 「용서를 모르는 무자비한 正義」가 없었고, 「참회를 요구하지 않는 헤픈 관용」이나 「진실을
외면한 눈먼 용서」가 없었어요. 관용은 「상처 입은 자」가 아니라 「상처 입힌 자」를 위한 것이었어요』
오케스트라 지휘하는 음악
마니아 ―평소 사람 만나는 일이 조심스러우시죠.
『일종의 직업병이죠.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저 친구가 무슨 의도가 있어서 저 말을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고, 「요점이 뭐야」라고 다그치기도 해요. 오후에
재판이 있으면 점심식사를 하러 밖에 나가지 않아요. 혹시나 피고 측이나 원고 측 사람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걱정을 해서예요. 하나부터 열까지
신중하게 행동하려는 습관이 자연적으로 몸에 배었습니다』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서 그의 이름 「이우근」 석
자를 쳐 넣으면 생각지도 못한 내용들이 떠오른다.
「2002년 10월, 서울 내셔널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주최한 영양결핍 아동을 위한 명사음악회에서 현직 판사가 지휘를 맡았다」는 기사가 보인다. 영양결핍 아동 지원금 마련을 위한 무대에서 베토벤의
코랄 판타지를 지휘한 사람이 李宇根 판사다.
그는 현직 판사·의사·교수 등이 참여한 아마추어 음악 모임인
「데뮤즈(Demuse)」의 회원이다. 올해 초 예술의 전당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음악은 쉰을 넘긴 그의 삶을 이끄는 힘이다.
학창 시절 음악반장을 했고 교회에서 성가대를 지휘했다. 사법 연수원 교수 재임시절 사법연수원가를
작곡했다.
―어떤 음악을 좋아하세요.
『오르간 곡을 좋아하고….
아끼고 또 아껴서 듣는 곡이 있다면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예요. 피아노 곡인데, 베토벤이 귀머거리가 된 뒤 작곡한 것이지요. 고난으로 단련된
베토벤의 불굴의 기백이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에 치이다 보면 음악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질
것 같은데….
『본래 음악을 좋아했어요. 지금까지 음악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은 것은 순전히 아내 덕분인
것 같아요. 아내가 오르간을 전공했거든요』
최근에 집 마련 ―연애 결혼하셨나요.
『그럼요. 결혼할 상대를 복덕방에 가서 집을
고르듯 할 수는 없잖아요. 대학교 2학년 때 음악회에서 만나 6년간 연애를 했어요. 아내는 저보다 한 살 연상이었고 학년으로는 2년 선배였어요.
오르간 음악회에 갔다가 연주하는 모습을 처음 봤어요. 정말 매력적이더라고요. 그때부터 제가 작정하고 좀 따라다녔지요.
학창 시절에 제가 내성적이었는데 아내와 데이트하고 나서부터 적극적인 성격으로 바뀌더라고요』
―최근 가장 자신을 힘들게 했던 일이 무엇인가요.
『평생 처음 청약한 아파트가
시공사의 부도로 잘못되어 5년 동안 무척 힘들었어요』
30년 판사 생활은 과분한
은총 차관급 공무원이 최근까지 전세살이를 했다는 사실이 재미있어 좀더 물어봤지만, 그는
손을 내저었다.
―시간과 돈이 허락된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
『세계 곳곳을 가 보고 싶어요. 요즘은 형사 사건만이 아니라 환경 사건을 주로 맡고 있거든요. 이왕이면 아마존, 남극과 북극에 가 보고 싶네요』
―골프는 주로 어디에서 치세요.
『안 쳐요. 칠 줄도 모르고요』
―법관 생활에 보람을 느끼십니까.
『법관은 지갑도, 칼도 없는
사람입니다. 법관의 권위는 돈의 힘, 권력의 힘에서 벗어나 공정하게 판결할 때 나옵니다. 그냥 하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저는 판사라는 직분이 제게
과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어요. 「재판은 하나님에 속한 일」이라고요. 그런 일을 30년 동안 계속할 수 있었으니, 神의 은총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李판사는 최근까지 극동방송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그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시종 그가 법관보다는 애초 그가 원했던 신학자가 되었더라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